비어링페어링#13 펌킨에일X호박파이
비어링 페어링 열세 번째 맞춤
펌킨에일 X 호박파이
펌킨 에일을 찾아서
9월 중순을 지날 즈음, 올해 첫 가을 냄새를 맡았다. 눅진한 여름의 공기와는 사뭇 다른 청량한 가을의 공기가 방으로 스며들었다. 바깥 하늘은 어느새 파랗고 높았다. 가을이었다. 벼가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은행나무는 노랗게 색이 바래고, 큼지막한 호박은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계절.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머금으며 호박은 더욱더 큼지막해지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문득 펌킨 에일이 마시고 싶었다.
곡식이 무르익는 미국의 가을을 연상케 하는 맥주이기도 한 펌킨 에일은 미국 크래프트 양조장에서 처음 등장했다. 가을의 정점에 맞이하는 핼러윈 데이를 상징하는 호박을 사용해 만들기 때문이다. 10월을 전후로 해서 식당이나 가게를 꾸민 호박 장식을 보면 어느덧 성큼 다가온 가을을 실감한다.
핼러윈 데이가 다가오며 미국 농가에선 우량 호박 경연대회를 연다. 무게가 1톤에 달하는 호박을 길러낸 농민의 자부심 넘치는 미소는 환상 소설에 나오는 모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멋진 풍경이다. 사람보다 훨씬 커다란 거대 호박은 펌킨 에일의 맥주 통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호박으로 만든 배럴에서 뿜어져 나오는 펌킨 에일을 언젠간 꼭 마셔 봐야지.
하지만, 호박 통에서 나오는 펌킨 에일은 고사하고 펌킨 에일 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작년까진 9월 즈음에 여러 종류의 펌킨 에일이 수입되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다. 여러 보틀샵과 수입사에 문의해보았지만, 올해엔 구하지 못할 것 같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마시고 싶은데 못 마시면 더욱 마시고 싶어지는 법이다. 달큰한 호박 내음이 퍼지는 펌킨 에일을 꼭 마시고 싶었다.
애타는 마음에 호박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달래는 와중에 희소식을 접했다. 비어바나에 펌킨 에일이 있다는 소식. 펌킨 에일 온 탭.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당장 문래동으로 향했다. 잘 익은 꿀처럼 짙은 색의 펌킨 에일이 그토록 그리던 호박내음을 뿜어내며 잔에 담겼다. 펌킨 에일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의 끝이었다.
맛과 향은 어땠을까? 그 내용은 뒤에서 확인하시길!
비어바나 X 올빼미 브루펍
각양각색 매력적인 크래프트 비어를 맛볼 수 있는 문래동의 비어바나. 개인적으로 문래동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비어바나 루프탑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공업 단지가 일을 마치고, 어스름이 내려앉아 짙푸르게 물들어가는 문래동의 전경을 한눈에 담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기 때문. 기발한 레시피의 맥주를 선보이는 덕분에 여러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점도 좋다.
올빼미 브루펍은 양조사 출신이 직접 운영하는 펍이다. 여러 양조장과 협업을 통해 맥주를 선보이기도 한다. 집시 브루어리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자리에 정착한 가게라는 특징을 갖는다. 앞으로 또 어떤 맥주를 선보일지 기대되는 곳.
비어바나와 올빼미 브루펍이 함께 개발한 펌킨 에일. 향신료를 전혀 넣지 않고 호박과 단호박만을 사용해 풍미를 더 했다. 진짜배기 펌킨 에일을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이 성공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시즌이 끝나기 전에 맛보는 걸 추천한다
호박파이
호박으로 디저트를 만든다고 하니, 호박으로 무슨 디저트를 만드냐고 묻는 친구가 있었다. 호박을 몸에 좋지만 먹기 싫은 채소라고 여겨서 거부감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그런 인식이 있는 건 아마도 애호박이나 주키니 호박을 주로 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된장찌개나 전으로 붙여 먹다 보니 어린 시절 억지로 먹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까. 자신에게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면 주황색 옷을 입은 오동통한 호박 요정이 얼마나 슬퍼할까. 그 친구에게 호박의 달콤함을 전해주고 싶었다. 늙은 호박으로 만든 달콤한 호박죽이나 단호박을 튀기거나 속을 비워 만든 단호박 튀김, 단호박 떡볶이도 달달하고 맛이 좋다. 하지만 이번에 호박을 위한 선발 투수로는 호박파이를 선발했다. 미국 추수감사절에 주로 즐겨 먹는 호박파이는 더더욱 달콤하고 부드러우니까.
늙은 호박으로 만들어도 좋지만, 달콤한 맛을 강조하기 위해 단호박으로 호박파이를 만들기로 결정! 만드는 내내 호박 내음이 달큰하게 부엌을 채운다. 열어 둔 창문에서 가을 햇살에 바짝 마른 공기 냄새가 들어온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가을의 정취. 추수를 하며 노동요를 부르는 농부의 마음으로 호박파이를 굽는다. 호박 요정을 기쁘게 해줄 수 있기를 바라며.
펌킨 에일 X 호박파이
펌킨 에일은 향을 즐기기 좋다. 대부분의 펌킨 에일엔 호박 향과 더불어 계피, 바닐라, 육두구 같은 향신료를 첨가해 미묘한 향기를 만들어 낸다. 그 은은하면서도 오묘한 향기를 음미하며 마신다. 맥아의 풍부한 단맛과 호박에서 나오는 중후한 단맛 또한 특징이다. 홉의 맛과 향은 비교적 약하지만, 단맛과 대비되어 이따금 존재감을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호박이 주는 특색으로 개성이 강한 맥주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페어링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 자신이 없다면 전통적인 조합을 빌려오면 문제가 없다. 전통적인 조합은 바로 추수감사절 요리다. 갓 구워낸 칠면조 구이나 진저 브레드, 치즈를 듬뿍 얹은 매쉬드 포테이토는 각각 다른 이유지만, 모두 펌킨 에일과 잘 어울린다. 펌킨 에일의 부드러운 목 넘김은 칠면조 구이와, 복합적인 향은 진저 브레드와, 개성 강한 맛은 매쉬드 포테이토와 잘 어우러지는 요소다.
이번 비어링 페어링은 맥주와 요리가 서로의 특색을 강화해주는 조합 전략을 사용했다. 둘 다 호박이 기본이 되기 때문에 둘이 어우러져 그 개성을 강화한다. 게다가 올빼미 브루펍의 펌킨 에일은 호박을 제외하곤 그 어떤 향신료도 사용하지 않았기에 호박의 맛을 돋보이게 하는 전략이 양조사의 의도를 존중한다고 생각했다.
펌킨 에일은 잘 숙성한 꿀처럼 짙은 적갈색에 탁한 색이 인상적이다. 호박을 푹 삶으면 어두운 주황빛을 띠는데, 맥주와 닮았다. 잔에 따르기만 했는데도 호박밭에 온 것처럼 향이 진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진짜 펌킨 에일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향과 외관이다. 기쁜 마음으로 한 모금 마셨다.
진한 호박 내음이 퍼진다. 이어서 쌉싸름하면서 살짝 매콤한 맛이 나고, 이어서 호박 특유의 단맛이 다시 등장한다. 호박즙을 마시는 것처럼 강한 향과 맛이다. 맥아의 단맛과 호박의 단맛이 균형 잡혀 있다. 맥아의 단맛에 이어 호박의 단맛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자연스럽다. 목 넘김은 조금 가벼운 미디엄 바디. 부드럽게 넘어간다. 탄산감이 강하고 종종 쓴 맛이 등장해 많이 마셔도 지치지 않게끔 만든다.
호박처럼 생긴 호박파이를 한 조각 잘라 맛본다. 앞니에 부드러운 생크림이 닿았다가 촉촉한 필링을 지나 곧바로 바삭한 타르트에 닿는다. 순식간에 이어지는 다채로운 식감을 느끼는 찰나 달큰한 맛으로 입이 채워진다. 생크림의 옅은 단맛, 필링에 담긴 진한 호박 단맛. 생크림은 호박 필링이 더욱 강조되도록 역할을 수행한다.
맥주를 마시고 파이를 먹으면 디저트의 단맛이 배가된다. 펌킨 에일의 쌉싸름한 맛이 파이의 단맛을 강화하기 때문. 반대로 파이를 먼저 먹고 맥주를 마시면 펌킨 에일이 우유처럼 파이를 부드럽게 녹인다. 코와 입이 호박 향과 맛으로 가득하다. 묵직한 호박의 맛과 향은 마치 호박 나라에 온 기분이 들게끔 한다. 단풍이 붉게 물들고 은행나무도 노랗게 빛나고 오곡백과가 풍요롭게 익어가고 집채만 한 호박이 여기저기 자라는 호박 나라 한가운데엔 호박 요정이 기다리고 있다. 호박의 매력을 알리려 노력했으니 상이라도 주려나. 펌킨 에일과 호박파이를 만들 수 있도록 존재해준 것 자체가 이미 상으로 충분하지만.
후일담 친구에게 호박파이 한 조각과 펌킨 에일을 선물했다. 친구는 호박으로 만들었다는 걸 믿기 어려워했다. 호박이 이토록 맛있다니 믿을 수 없다며.
에디터: 젠엔콩 Jenenk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