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코끼리 맥주’ 델리리움에 관한 5가지 이야기
‘핑크 코끼리 맥주’
델리리움에 관한 5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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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리움’이란 이름을 달고 연중 생산되고 있는 맥주들은 가장 유명한 ‘델리리움 트레멘스(Delirium Tremens)’를 필두로 ‘델리리움 녹터넘(Delirium Nocturnum)’, ‘델리리움 크리스마스(Delirium Christmas)’, ‘델리리움 레드(Delirium Red)’까지 총 4종이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이 맥주를 만드는 브루어리의 이름이 ‘델리리움’이겠거니 싶지만, 사실 ‘델리리움’은 브루어리 이름이 아닌 하나의 시리즈의 이름이다. ‘델리리움’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양조장의 이름은 ‘휘게 브루어리(Huyghe Brewery)’로, 벨기에 Melle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델리리움’ 시리즈 이외에 ‘La Guillotine’, ‘Averbode, Floris’, ‘Campus’ 등 다양한 시리즈의 맥주들도 만들고 있으나,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역시 ‘델리리움’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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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리움’은 섬망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섬망은 심한 과다행동(예를 들어 안절부절못하고, 잠을 안 자고, 소리를 지르고, 주사기를 빼내는 행위)과 생생한 환각, 초조함과 떨림 등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중에서도 ‘델리리움 트레멘스’는 ‘알코올진전섬망’이란 의학 용어로, 알코올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알코올양을 줄였을 때 보이는 떨림, 환각 등의 섬망 증상을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델리리움’의 상징인 핑크 코끼리는 ‘델리리움 트레멘스’증상을 보일 때 핑크 코끼리의 환각이 보인다고 해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극적이면서 되려 음주 욕구를 억제할 법한 이름을 맥주 이름으로 지은 이유는 이 맥주의 스타일이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이기 때문이다.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은 필스너의 열풍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맥주 스타일이다. 때문에 필스너와 비슷한 황금색을 띠지만 필스너와 달리 도수가 높음을 강조하기 위해 강하고 자극적인 이름을 쓰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악마라는 뜻의 ‘듀벨(Duvel)’, ‘루시퍼(Lucifer)’, 해적이란 뜻의 ‘피랏(Piraat)’ 등의 맥주이며 ‘델리리움 트레멘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여담으로 이 이름은 세금 징수원이 이 맥주를 마시면서 예상치 못하게 빠르게 취해가는 중에 떠올린 이름이라는 일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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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리움 트레멘스’의 과거 라벨을 보면 핑크 코끼리뿐 아니라 우스꽝스럽게 생긴 초록색 악어와 보라색용도 크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딱 봐도 세련됐단 느낌은 전혀 없고 조악하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드는 라벨인데, 그도 그럴것이 ‘델리리움 트레멘스’의 라벨은 한 미술 대학 낙제생이 디자인한 라벨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라벨을 디자인한 대가로 맥주 2상자를 받은 것이 다였다. 하지만 이러한 라벨에도 불구하고 ‘델리리움 트레멘스’는 대박을 쳤고, 덕분에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 디자인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 최근 라벨 디자인은 과거보단 좀 더 세련되게 바뀌긴 했으나, 그 상징성을 기리기 위해 초록색 악어와 보라색 용을 작게나마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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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리움’ 시리즈를 상징하는 것은 핑크 코끼리 외에 회색의 도자기 병도 꼽을 수 있다. 이 병은 다른 맥주병과는 달리 빛을 완벽히 차단시켜주므로 빛에 의한 변질을 완전히 방지해주며, 병 내에서 2차발효중인 효모들이 문제 없이 발효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이 맥주가 처음 만들어질 때만 해도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도자기로 된 맥주병을 쓴것은 아니었다. 그저 독일의 한 브루어리에서 남아있는 도자기 병 재고를 싸게 팔았기에 매입하여 사용했을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렇게 만들어진 ‘델리리움 트레멘스’는 대박을 쳤고, 도자기 병 또한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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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델리리움’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델리리움’ 시리즈가 비슷한 맛일 거라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왜 굳이 같은 시리즈에 넣었는지 모르겠을 만큼 서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델리리움 트레멘스’의 경우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이며, 이름 그대로 황금색을 띠는 맥주다. ‘델리리움’ 시리즈의 기원이 된 맥주이며 3종의 효모를 이용하여 만들어지고, 병 내 숙성도 진행하는 맥주답게 8.5%의 높은 알코올 도수를 지니고 있다. 풍부하고 산뜻한 밝은색 계열 과일과 알싸한 향신료 풍미와 더불어 약간의 알코올 느낌이 느껴지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1997년 세계 최고의 맥주(Best Beer Of The World 1997)로 선정되기도 했다.
‘델리리움 녹터넘’은 ‘환각의 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벨지안다크 스트롱 에일에 어두운 고동색을 띤다. ‘트레멘스’와 마찬가지로 3종의 효모를 이용하여 발효를 진행하며 8.5%의 도수를 지니고 있다. 다크 스트롱 에일답게 고소한 캐러멜과 약간의 초콜릿 맛이 느껴지며, 감초나 코리앤더 같은 향신료 풍미도 느껴지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델리리움 크리스마스’는 추운 겨울철 몸을 뜨뜻하게 데워주는 윈터 에일(Winter Ale)이며, 거기에 맞게 10%라는 높은 알코올 도수를 지니고 있다. 색은 ‘녹터넘’보단 조금 밝은 구리색이며, 약간의 캐러멜스러운 단맛과 말린 과일의 맛을 가지고 있으나 훨씬 풍부한 향신료 풍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델리리움 레드’는 체리와 엘더베리 주스 등이 직접 들어간 과일 맥주(Fruit Beer)이다. 그것에 맞게 풍부한 체리 맛과 단맛, 약간의 신맛이 주가 되는, 디저트와도 같은 맥주이다. 하지만 알코올 도수는 8.0%이니 무턱대고 마시다간 정말로 핑크 코끼리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EDITOR_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