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링 페어링 #4 우드 괴즈 분 X 홍어삼합
우드 괴즈 분
가장 원초적인 맥주 형태라고 불리는 람빅은 호불호가 뚜렷이 갈린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맛에 빠져드는 사람과 쿠리쿠리한 냄새와 시큼한 맛에 난색을 표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상반되는 반응을 보고 있으면 입맛이란 얼마나 상대적인지를 실감한다. 누군가에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누군가에겐 절대로 못 먹는 음식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처음 람빅을 맛보고 ‘우악-’하는 소리와 함께 뱉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는 분들께 소개하고 싶은 맥주가 바로 괴즈다. 괴즈는 한동안 묵힌 람빅과 갓 양조한 람빅을 배합해 만든다. 덕분에 람빅이 지닌 강한 개성이 조금 누그러들며 샴페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처럼 시도하기 쉬운 질감으로 변한다. 괴즈가 주는 맛에 익숙해지고 그 풍미를 이해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람빅을 시도했을 때 이질감이 한층 덜어진다. 크릭이나 파로, 프루트(fruit)처럼 달달한 람빅 계열도 입문용으로 괜찮다. 일종의 람빅 근본주의자들은 설탕을 첨가한 람빅을 경멸하기도 하지만. 괴즈는 보다 람빅 본연의 맛에 가까운 편이다.
허나 아무리 마셔도 람빅 맛에 익숙해지지 않는 친구가 곁에 있다고 해서 우월한 감정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음식 취향은 상대적이니까. 평양 냉면을 사랑하고 떡볶이를 싫어하는 태도가 미식가의 자격은 아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향유한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다만 새로운 경험에 열린 마음을 갖는 건 중요하니 새롭게 도전하지 않는 친구에겐 권유하는 게 좋다.
우드 괴즈 분(Oude Geuze Boon)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남서쪽 할레에서 만들어 지며, 18개월 숙성 람빅 90%와 3년 숙성 람빅 5%, 미숙성 람빅 5%를 섞어 만든다. 대체로 유통기한이 긴 람빅의 특성대로 상미기한이 무려 20년에 육박한다.
프랭크 분(Frank Boon)과 분 브루어리
‘우드 괴즈 분’에서 ‘우드(oude)’는 오래되었다는 뜻을 지닌 네덜란드어이며, 괴즈(Geuze)는 숙성기간 1년 이하의 영 람빅(young lambic)과 2-3년 숙성된 올드 람빅(old lambic)을 블렌딩해서 병입 숙성한 것을 말한다. ‘우드 괴즈’는 100% 람빅을 두 종류 이상 배합하고 단맛을 첨가하지 않은 것을 일컫는다. 아무리 자연발효를 거치고 전통 방식 그대로 맥주를 만들어도 다른 지역에서 만든다면 람빅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양조장 이름인 ‘분’은? 양조장을 설립한 프랭크 분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프랭크 분은 1975년 스물한 살 나이에 죽어가는 람빅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겠다고 다짐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라거 열풍으로 인해 에일이나 람빅 같은 전통 맥주는 한창 사양 산업이었던 만큼, 그의 시도는 호기로웠다. 그는 전통 방식으로 람빅을 꾸준히 제조했고 ‘우드 괴즈’라는 명칭을 고안했다. 캄라(Campaign for Real Ale)의 람빅 편이랄까. 람빅 수호자라고 칭해도 좋겠다. 공격적인 투자와 지속적인 노력 끝에 분 브루어리는 오크 통 숙성 람빅 시장에서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덕분에 훌륭한 람빅과 괴즈를 맛볼 수 있으니 고마운 분이다.
종류 자연발효맥주, 괴즈
원산지 벨기에, 렘비크
양조장 분 브루어리(Boon brewery)
원료 물, 보리맥아, 밀맥아, 홉
도수 7%
용량 250ml
홍어삼합
매일 먹고 싶지는 않지만 때때로 떠오르는 요리가 있다. 베트남 쌀국수, 꼬리뼈 찜, 루꼴라 피자, 돈코츠 라멘 등등. 3-4개월에 한 번쯤, 혹은 1년에 한번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요리들. 평소에 관심을 받지 못해 애정 결핍에라도 걸린 것처럼 먹기 전까지 계속해서 떠오른다. 코에 냄새가 맴돌고 눈을 감으면 모습이 아른대며 입엔 침이 고인다. 한시라도 빨리 먹어 욕망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사라진다. 다시 먹고 싶은 마음이 찾아올 때까지. 홍어삼합도 그런 요리 중 하나다. 삭힌 홍어가 주는 톡 쏘는 냄새와 시큼한 맛, 잘 익은 묵은지에서 나오는 달큰하면서도 강한 산미, 균형을 잡는 담백하고 쫄깃한 수육까지. 셋은 따로 먹을 때보다 함께일 때 더욱 빛난다. 홍어와 묵은지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상대를 방해하지 않아 조화로운 연주를 이룬다. 수준 높은 재즈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가 즉흥 연주를 펼치는 듯하다. 재즈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묵묵히 중심을 잡아주는 드러머. 그 역할을 수육이 수행한다. 입안에서 펼쳐지는 재즈 콘서트. 팀이름은 ‘삼합트리오’려나. 삼합은 일 더하기 일더하기 일이 단순히 삼이 아닐 수 있다는 명제를 실증한다.
홍어삼합 만드는 법
재료 수육용 돼지고기 400g, 홍어 270g, 묵은지 1/4포기, 대파 1/3대,
통마늘 5알, 월계수잎 2장, 된장 2큰술, 커피가루 1큰술, 통후추 약간, 양파 12/개, 고량
주 1/2컵, 물
tip 1. 고량주 대신 소주를 넣어도 좋다.
tip 2. 젓가락으로 고기를 찔렀을 때 핏물이 나오지 않으면 익은 것이다.
tip 3. 삭힌 홍어는 인터넷이나 동네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포장된 홍어에서 진물이 나오지 않은 걸 고르는 게 좋다. 또 살이 무르지 않고 탱탱한 홍어가 더욱 맛있다.
우드 괴즈 분 X 홍어삼합
괴즈는 람빅이 지닌 특성을 대부분 공유한다. 식초를 연상케 하는 시큼한 맛(sour), 곯은 과일, 비에 젖은 장작에 핀 버섯, 습기를 머금은 에티오피아 커피가루 같은 향이 두드러진다. 시큼함 외에도 과실주를 떠올리게 하는 달큰함이 옅게 자리한다. 이런 다채로운 특성 탓에 괴즈가 지닌 섬세한 향과 맛에 어울리는 음식을 찾기는 까다로운 편이다.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다양한 요리 중 괴즈에도 어울리는 짝이 있다. 우선 괴즈에 필적하는 풍요로운 맛과 향을 지닌 블루 치즈를 추천한다. 묵은지와 삭힌 홍어가 만들어내는 조화처럼 이 조합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괴즈의 또 다른 친구는 생굴이다. 생굴의 부드럽고 깊은 맛은 괴즈의 시큼하고 톡 쏘는 맛과 잘 어울린다. 연상이 쉬이 되지 않는다면 굴에 식초를 뿌려 먹는다고 생각하면 용이하다.
위 같은 조합은 맥주와 요리가 지닌 개성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이어지도록 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을 사용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직관을 신뢰해야 한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맛을 나열하고 조합해서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실패할 수도 있지만, 너무 괘념치 마시길. 실패한 조합도 데이터로 치환되어 페어링 서랍장 한 편에 꽂힐 테니까(이를테면 생연어회와 벨지안 페일 에일). 다음 조합을 구상할 때 커다란 도움이 된다.
홍어를 먹으며 괴즈를 떠올렸는지 괴즈를 마시며 홍어를 떠올렸는지는 중요치 않다. 어느 순간 괴즈와 삼합이 꽤나 잘 어울리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호불호가 뚜렷이 갈리는 맥주와 호불호가 뚜렷이 갈리는 요리. 그 둘이 만나면 어떨까. 서랍장을 열고 맛 데이터를 확인해보니 결과는 금세 도출되었다. ‘합격.’
우드 괴즈 분과 홍어삼합을 차려 놓으니 향부터 강렬하다. 그 향을 맡은 입엔 침이 고인다. 기다리지 않고 괴즈를 한 모금 마셨다. 강한 탄산감. 부드러운 목 넘김. 시큼한 효모향. 삭힌 과일 또는 습기를 머금은 참나무에 핀 두툼한 버섯 같은 냄새. 찾아오는 옅은 달큰함. 역시나 다채로운 맛의 향연.
젓가락으로 홍어와 수육, 묵은지를 솜씨 좋게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온다. 톡 쏘는 홍어, 담백한 돼지고기, 쿰한 묵은지. 홍어의 삭은 맛은 묵은지에서 달큰한 맛을 이끌어낸다. 불꽃놀이 축제가 입에서 펼쳐진다. 아삭하고 촉촉하고 단단한 식감도 덤으로 따라온다.
과연 조합은 어떨까. 괴즈를 한 모금 마시고 삼합을 한 점 먹었다. 한동안 혀가 정신을 못 차린다. 수많은 맛과 향이 입과 코를 점령한다. 무차별적인 폭격에 하나하나를 감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요란한 폭우는 파괴적이지 않다. 비가 내린 곳에 생명을 자라게 하는 따뜻한 맛이다.
다시 괴즈와 삼합을 함께 입으로. 시큼달큼한 맥주 맛과 삼합 특유의 맛이 어우러진다. 각자가 지닌 산미와 풍미가 서로를 북돋는다. 맛있다. 잘 어울린다. 쿠리쿠리한 발효 향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각자 자리를 지킨다. 마지막엔 풍부한 탄산이 입에 남은 삼합 향을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어쩌면 올해 트랜드는 ‘혼맥’이 아니라 ‘홍맥’이 될지도 모르겠다.
EDITOR_젠엔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