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 맥주는 무엇인가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인생 맥주가 있기 마련입니다. ‘맥주와 맛’이라는 이번 호의 주제에 맞게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인생 맥주’란 무엇이고, 그 ‘인생 맥주’를 선택하게 된 ‘맛’의 기준은 무엇인지 비어포스트 페친에게 물었습니다.
‘맛’의 사전적인 정의는 ‘물질을 혀에 댈 때 느끼는 감각’입니다.
사전적 의미와 별개로 맛은 경험적인 측면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혀에서 인지하는 실질적인 맛의 지표와 함께 상황, 분위기, 개인적인 경험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이 영향을 미쳐 종합적인 맛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 잘 마시지 않던 맥주가 여행지에서 멋진 풍경을 바라보면서 마셨을 때 인생 맥주로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 이렇듯 맛 일부는 감각적인 영역에서 판가름 되지만 일부는 주관적인 감각에 따라 복합적으로 변화합니다. 이번 설문 기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맛있게 마셨던 ‘인생 맥주’는 무엇인지, 그 맥주를 ‘맛있는 맥주’라고 선택하게 된 상황적, 감각적 기준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Q 단순한 미(味)의 영역을 넘어서서 오감까지 만족하게 했던 당신의 ‘인생 맥주’는 무엇인가요?
인생 맥주를 선택한 요인으로는 실질적인 ‘맛’에 대한 긍정적인 요인도 작용했지만, 대부분 상황적인 부분이 많이 관여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설문에 참여한 분들은 맥덕의 길로 접어들게 한 맥주, 힘들 때 마셨던 맥주, 양조장 앞에서 마신 맥주 등 다양한 ‘인생 맥주’를 꼽은 이유를 적어 주셨습니다.
맥주의 맛에 처음 눈을 뜨게 해준 맥주
김웅교 밸러스트 포인트의 스컬핀 IPA. 처음 접한 크래프트 맥주입니다. 이전까지는 아사히, 하이네켄 등 수입 맥주들을 '특별한' 맥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스컬핀을 통해 정말 '특별한' 맥주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안호균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 건너 외국 땅을 밟아본 것이 90년대 중반의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시절을 보낸 바 있는 저 같은 아저씨 세대에게 미국은 그저 멀고 먼 남의 나라가 아닌, 궁극의 이상향이자 국가의 이데아와도 같았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스치듯 만나는 사람, 사소한 풍경마저도 깊은 인상과 울림은 선사했습니다. '신세계'에 발을 들인 지 2주가량이 흐른 어느 일요일 오후, 저보다 한 달 먼저 수도 워싱턴을 '접수한' 친구의 안내를 따라 조지타운 대학가의 한 허름한 피자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른바 인생 맥주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 맥주가 바로 사무엘 아담스 보스턴 라거입니다. 당시에는 크래프트 맥주나 엠버 라거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그때의 경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떤 맥락의 일단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맥주가 있다니!"라고 되뇌며 느꼈던 충격과 공포는 오늘까지도 마치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우리나라 맥주와 미국의 부가물 라거가 맥주 맛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저에게 사무엘 아담스가 선사한 묵직한 바디감과 달콤한 곡물의 풍미, 더불어 향기로운 홉의 느낌은 마치 '귓가에 울리는 종소리'와도 같았습니다. 지금 되짚어 보면 어설프고 유치해 보이지만, 맛있는 맥주를 찾는 신나는 모험이 시작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으니 저에게는 사무엘 아담스야말로 진정한 인생맥주인 셈입니다.
진선태 맥주라고는 대기업 라거밖에 모르던 시절 우연히 수도원 맥주라는 소개와 함께 마셔본 로슈포르 6가 제 인생 맥주입니다. 로슈포르 6를 고르게 된 맛의 기준은 '개성 있는 맛'입니다. 지금은 훨씬 더 개성 있는 맥주들을 알게 됐지만, 그 당시엔 맥주에서 느낄 것으로 생각 못했던 다양하고 독특한 맛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날 덕통사고를 당해 지금껏 맥덕의 길을 걷게 해준 로슈포르 6의 '개성 있는 맛'이 인생 맥주를 고른 기준입니다.
양조장에서 갓 나온 신선한 맥주
강대웅 체코 필스너 우르켈 공장 마당에서 마셨던 필스너 우르겔과 코젤 다크. ’맥주는 공장 굴뚝 아래서 가장 맛있다.’, ‘맛있는 맥주는 여행하지 않는다.’라는 명언이 진실임을 알게 된 순간.
이나경 슈나이더 바이세 Tap 5. 밀맥주 좋아하는 밀덕이라 병맥주로는 마셨을 때 입안에서 남는 향이 너무 좋아 독일여행 갈 때 양조장에서 꼭 마셔보리라 다짐했고 실제 탭으로 마시니 신선함이 정말 남다르더라고요.
힘든 시절 마신 맥주
이태환 뱅드뱅 볼비어. 잦은 주말 출근에 피로에 찌든 상태에서 돈을 모아 빚 갚기 급급했던 시절 4캔 만원 하나 먹기 두려워하던 겁쟁이 생활이 싫증이 나서 홧김에 집어서 마셔보니 맛이 확 달랐음. 달달한 단내와 부드러운 맛까지 이색적인 감정은 너무나도 충격.
여행 중 마신 맥주
김슬기 원래 다코야키를 좋아했고(일단 현지에서 먹었던 다코야키는 한국에서 먹었던 맛이랑 크기 또한 달랐음. 안주도 물론 맛있었고), 첫 해외 자유 여행이었기에 상황적으로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고 저녁때 서툰 여행에 지쳐 배도 고팠는데 다코야키와 산토리 나마비루는 환상적! 산토리는 한국에서도 마셔본 맥주였는데 마시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음.
남서아 돈이 넉넉하지 않았던 뉴욕 여행 시 걷고 또 걸어 다리는 힘이 빠지고 배고픔은 절정에 치달았는데 찾던 레스토랑은 나오지 않아 절망하고 있던 와중 발견한 곳에서 마신 브루클린 맥주’가 인생 맥주.
Q 그렇다면 ‘맛있는 맥주’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강대웅 좋은 재료로 잘 만든 맥주를 신선하게 운반하고 깨끗한 장비로 따라서 어울리는 잔에 즐거운 장소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시는 맥주
김건표 공장에서 갓 만들어낸 맛을 집 앞 가게에서 혹은 내 집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맥주
김웅교 맛있는 맥주를 결정하는 조건은 맥주 자체가 양조된 (선천적) 조건과 + 맥주가 서빙되는 순간의 (후천적) 조건 + 맥주를 마시는 사람의 (개인적) 조건이 모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천적 조건이란: 보리, 홉, 물, 효모, 부가물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인 맥주가 양조(또는 양조장 에이징)을 거쳐서 갖게 되는 캐릭터입니다. 그 캐릭터는: IBU, 당도, ABV, 색깔, 아로마 등을 꼽을 수 있겠죠. 즉 선천적 조건이란 양조장이 만들어낸 맥주의 '맛' 자체입니다.
후천적 조건이란: 맥주가 케깅/병입되어 서빙되는 그 순간까지 미치는 모든 외부 영향입니다. 케그, 병, 탭, 유통과정, 손상상태, 출고 후 에이징, 서빙되는 온도, 장소, 맥주잔, 가게의 분위기, 가격, 라벨, 산미 기한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 선천적 조건과 후천적 조건이 결합한) 어떤 상태로 맥주가 서빙되었을 때, 마침내 마시는 사람의 조건을 고려합니다.
그 사람의 취향, 취한 정도, 기분, 분위기, 함께 마시는 사람, 이전에 그 스타일/브랜드에 대해서 있던 선지식, 서빙 장소에 대한 선호도 등이 영향을 미칩니다.
(선천적 조건과 후천적 조건이 결합한) 맥주가 마시는 사람의 마음에 들 때 그 맥주는 맛있는 맥주가 됩니다. 그 기준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김빠진 카스일지라도 마시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마시고 있다면 최고로 맛있는 맥주로 기억될 수도 있겠죠. 반대로 최고의 상태로 에이징된 베스트블레테렌을 마시더라도, 마시는 사람이 취향, 기분 등의 이유로 맛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맛없는 맥주가 됩니다. 감각은 주관적인 거니까요.
개인적으로는, 퀄리티+의외성을 갖는 맥주를 맛있는 맥주라고 기억하는 편입니다. 기본적으로 맥주는 잘 만들어져있어야 하고, 서빙되기 좋은 상태여야 합니다. 그런 맥주를 우연히 고르거나, 큰 기대 없이 골랐을 때 '어? 이게 이렇게 맛있단 말이야?'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맥주가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성연규 마실 때 불편함(오프)이 없음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내면서도 음용성을 떨어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안호균 맛있는 맥주는 역시 언제 누구와도 즐겁고 신나게 마실 수 있는 맥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남들이 보여주지 못한 독특하고 강렬하며 참신한 맛을 선사하는 맥주에도 무한한 박수와 칭찬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맛있는 맥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미각과 후각의 조합을 통한 객관적인 분석의 결과이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마음속의 이미지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맥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와도 함께 마실 수 있는 맥주, 야구나 축구를 보며 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맥주,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티비를 보며 소소하게 나누는 맥주가 제 마음속에 먼저 떠오릅니다.
진선태 맛있는 맥주란 그 맥주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면서도 조화로운 맥주인 것 같습니다. 홈브루잉 클래스에서 실수로 로즈마리를 과다 투여해 탄생했던 드라이 로즈마리 세종은 개성은 있었지만, 맥주라기보다는 로즈마리 향수에 가까웠기 때문에 맛있다고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로슈포르 6는 라거밖에 모르던 제 입맛에도 매우 조화로우면서도 충분히 독특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맥주가 된 것 같습니다. 조화롭지만 진부하지 않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맥주가 맛있는 맥주인 것 같습니다!
맥주를 업으로 삼으면서 맥주를 마실 때 생각을 하면서 마시는 것이 필수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오히려 예전보다 ‘맛있는 맥주’가 줄어든 느낌입니다. 구하기 힘들고 비싸다는 맥주들도 가끔 좋은 기회에 마셔보게 되는데, 당연히 그런 맥주는 객관적으로 상당히 맛있긴 하지만 저에게 ‘인생 맥주’라고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이취가 있는지, 무슨 맛이 나는지 분석하면서 먹는 맥주 한 잔보다 고생스러웠던 일과를 마치고 TV 앞에 앉아서 시원하게 마시는 맥주 한 캔이 오히려 맛있는 맥주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하게 ‘맛있는 맥주’ 한 잔 어떠신가요?
EDITOR_김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