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맛을 구별할 수 있을까?
“맥주 한 병 주세요.”라고 맥주를 주문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급 일식 레스토랑에 가서 “오마카세” 주문을 요청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메뉴판에 beer list를 적어 놓은 음식점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녁 회식 때 부장님이 착석하여 넥타이를 풀자마자 녹음기처럼 외치던 멘트가 “자, 입가심으로 맥주 한 잔씩 하고 밥 먹자”였습니다. 맥주는 주인공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르르 저녁을 먹은 후 2차에 가서 치킨을 먹을 때 목말라 마시던 치킨의 보조 나부랭이였습니다.
주는 대로 먹던 시절에는 “맥주 맛을 구별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아무거나 마시는데 맥주 맛을 구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실, 카스와 하이트만 마시고 살았던 시절이었기에 따지고 보면 아무거나 마셨던 것도 아닙니다. 그 열악했던 시절에도 카스와 하이트를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초능력자들이 우리 주위에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식당 이모가 병맥주
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고 뒤돌아 가는 그 짧은 찰나에 좀처럼 보이지 않는 출고 날짜를 한 눈에 스캔한 뒤, 뒤돌아서는 이모를 다시불러 “저는 출고일 2주 지난 맥주는 마시지 않습니다.”라며 바꿔오라며 자신의 능력을 지인에게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2018년은 1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맥주 천국입니다. 웬만한 동네 펍에도 IPA, Weizen, Pilsner등등 수십 종의 생맥주(tap)와 병맥주 리스트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슬리퍼에 반바지 입고 가는 동네 치킨집에 가도 기본 5종 이상의 맥주를 팔기도 합니다. 입가심으로 대충 한 잔 마시는 평민 레벨에서 급상승하여, 예수님의 흔적을 만나러 성지 순례를 하듯 맥주 마시러 펍크롤링(pub crowling)을 하는 신의 경지에 등극하였습니다. “맥주 맛을 구별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은 아닌척 해도 누구나 한번 쯤 집에서 실험(?)해 보고 자신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며 씨잌~ 웃어 본 경험이 떠오르는 당연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 영국에서 있었던 어느 밀크티 모임
날씨 좋았던 어느 1920년대 말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의 한 모임에서 밀크티를 마시던 한 부인이 툭~~ 하고 멘트를 하나 날렸습니다. "저는 제가 마시는 밀크티에 우유를 먼저 넣고 홍차를 부었는지 홍차를 잔에 따르고 우유를 나중에 넣었는지 구별할 수 있답니다." 밀크티를 같이 마시던 모든 사람들이 웃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제가 바빠서 그 밀크티 모임 현장에 없어 진짜 웃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웃는 신사들 사이에 수염을 기른 한 남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절대 미각 부인에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레이디, 제가 당신의 실력을 한 번 테스트해 보고 싶습니다.” 통계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Ronald A. Fisher입니다. 이 유명한 홍차 테스트는 1935년 본인이 저술한 책에 소개되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런 테스트 방식을 " 임의화 비교시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맥주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는 방식도 임의화 비교시험에 속합니다.
피셔는 절대 미각의 부인에게 밀크티 8잔을 무작위로 섞어 놓고 맞춰 보라고 했습니다. 당시 레이디는 밀크티 8잔 중 몇 잔을 맞추었을까요? 이유는 모르지만 신기하게도 8잔을 전부 맞추었다고 합니다. 1/70의 확률(1.4%)입니다. 희한하지만, 그 정도 확률이라면 우유를 먼저 넣었는지, 홍차를 먼저 넣었는지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해도 대부분 OK 할 것 같습니다.
밀크티를 만들 때 홍차를 먼저 따르고 우유를 섞는지, 우유를 빈 잔에 먼저 따라 놓은 후 홍차를 붓는지에 대한 맛의 논쟁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라면을 끓일 때 스프를 먼저 넣을지 면을 먼저 넣을지에 대한 논쟁보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참고로,라면을 끓일 때 스프를 먼저 넣을지 면을 먼저 넣을지 고민하면 절대 안 됩니다. 물을 먼저 넣어야 합니다.
카스와 하이트 맥주 맛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맥주 맛을 구별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려면 통계학적으로는 10번 중 9번을 맞추거나 100번 중 95번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 두어 번 마셔 보고 맛이 다르다고 해서 맥주 맛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하기 애매합니다. 3번 도전해서 3번 모두 맞추었다 하더라도 1/8의 확률이므로 "우연의 일치"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빨간색과 파란색 색종이는 색맹이 아닌 분들이라면 누구나 100번 중 95번 이상을 맞출 수 있습니다. 아마 한번이라도 틀리면 장난으로 틀렸다고 생각할겁니다. 샤넬 향수의 향과 생선 비린내 역시 웬만한 사람은 10번 중 9번 이상을 맞출수 있습니다. 이건 우연의 일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동전을 3번 던져 앞면/뒷면을 3번 모두 맞출 확률은 1/8입니다. 누구도 3번 모두 맞췄다고 해서 당장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운명철학관을 개업하진 않을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임을 누구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전 대신 맥주나 음식으로 테스트를 하면 이상하게도 두어 번 맛 본 후 맛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알려주면 화를 냅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블라인드 테스트해서 맞춰야 진짜라고 하는데, 눈을 감으면 누구나 맛을 모르잖아요?”라며 굉장히 어이없어합니다. 블라인드 테스트는 눈을 감고 테스트하는 게 아니라, 피시험자가 결과를 모르는 상태로 실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제게 카스와 하이트 맥주를 구별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구별할 수 없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10번 중 9번 이상 맞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10번 중 9번은커녕 5번 정도 맞출 것 같습니다. 10번 중 5번의 정답률이라면 랜덤(random)입니다. 굳이 마셔 보지 않고 찍어서 맞출 확률과 같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제 7의 맛, 병맛 그리고 잔맛
저는 일요일 점심에 마시는 맥주 한 잔이 그렇게 좋습니다. 너무 행복해서 1994년 개봉작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가 교도소 외부 작업을 마친 후 동료 죄수들과 맥주를 나누어 마시며 행복해하는 장면이 늘 떠오릅니다. 몇 년 전 일요일 아침 냉장고에서 브루독 Punk IPA 한 병을 꺼내어 전용잔에 따라 마시던 중, 갑자기 인간에게 제 7의 맛인 “잔맛”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한 병을 비운 후, 새로 한 병을 따서 반은 전용잔에, 나머지 반은 락앤락 용기에 따라 마셔 보았습니다. 같은 병에서 따른 맥주인데도 맥주 맛은 매우 달랐습니다. 예상과 달리, 락앤락에 담아 마신 맥주는 제가 생각했던 punk IPA 맛이 아니었습니다. 전용잔은 맥주의 맛을 2배 맛있게 만들어 주는 마법같은 아이템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제 7의 맛 “잔맛”이 존재함을 확인했던 어이없는 순간이었습니다.
펑크보다 훨씬 향이 강하고 좋은 IPA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브루독의 punk IPA를 좋아하는 이유는 맛과 향 때문만은 아님을 언젠가부터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Punk IPA를 병 디자인 때문에 선호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였습니다. 병에 붙어 있는 하늘색 라벨은 아주 먹음직스러운 디자인입니다. 게다가 라벨의 까만 글씨는 양각으로 새겨 있어서 엄지로 글씨를 쓱 문질렀을 때 점자처럼 만져지는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저만 그런 것도 아니고, Punk IPA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똑같은 A라는 맥주인데 많은 사람들이 병에 담긴 맥주를 선호하곤 합니다. 크로넨베르그 블랑 1664 맥주는 캔보다 병이 맛있다고 생각하는건 저만 그런가요? 파/하/빨 프랑스 삼색기를 상징하는 코발트블루 색깔의 병에 붙은 하얀색 라벨, 빨간색 테두리가 들어간 맥주병은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불려 일으킬만한 병입니다. 제가 블랑 1664를 병이 캔보다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 디자인이 캔보다 먹음직스러워서 그렇게 여길 뿐입니다. 맥주 회사에서 정책적으로 병과 캔의 맥주 맛을 다르게 세팅한 것이 아니라면 병과 캔은 맥주 맛이 동일해야 합니다.
그걸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 인간이 느끼는 또 다른 제 7의 맛 “병맛”인 것입니다. 사람의 입맛은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습니다. 내 입맛은 아주 평화로운데 절대 미각이라는 틀에 본인을 가두어 버리면 맥주 뿐 아니라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반감됩니다. 아이폰을 사고 수입차를 타는 것이 가성비만으로 설명할 수 없듯, 맥주를 고르고 구별하는 것도 후각, 미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저처럼 맥주를 시각과 병 디자인으로 구별하고 선호한다고 쿨하게 인정해 버리면 훨씬 풍요로운 맥덕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EDITOR_배성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