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링 페어링 #3 델리리움 크리스마스
델리리움 크리스마스
분홍색 코끼리가 그려진 라벨이 매력적인 델리리움. 도자기를 연상케 하는 병도 예쁘다. 태국 문자를 닮은 서체도 독특하다. 병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기코끼리 덤보>에서 덤보가 만났던 분홍색 코끼리가 떠오른다.
반면 맥주 이름이 지닌 뜻은 귀엽지 않다. 델리리움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의 섬망증, 풀어쓰자면 크리스마스에 생기는 환각 증세란 뜻이다. 프랑스어에선 델리리움을 알코올 중독에 의한 섬망이라고 정의한다. 덤보도 술을 마셔 취했을 때, 분홍색 코끼리 부대가 나온다. 섬망에 가까운 상태였겠지.
의미에 대한 내용은 잠시 잊어도 좋다. 산타클로스의 옷을 입은 귀여운 코끼리가 앞에 있는데 무서운 얘기는 필요 없으니. 분홍색 코끼리로 유명한 델리리움은 트레멘스와 녹터눔을 비롯해 여러 가지 변주가 있다. 델리리움 시리즈는 도수가 높은 편이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델리리움 크리스마스는 그중에서도 도수가 가장 높다. 맛있는 맥주 맛에 빠져 마음껏 마시면 어느새 분홍색 코끼리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델리리움과 벨기에
델리리움이 탄생한 나라인 벨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맥주를 보유한 나라다. 독일과 달리 맥주 순수령에 의한 제약이 없었던 덕분에, 벨기에에선 다양한 허브와 재료를 추가한 맥주가 탄생했다. 다채로운 에일, 람빅, 트리펠, 세종, 필스너까지 별별 맥주가 다 있다. 같은 종류라도 양조장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변하니 벨기에가 보유한 맥주는 1,000가지가 넘는다. 하루에 맥주 하나씩 맛봐도 몇 년이 걸린다.
매일 맥주를 마셔 배가 나오면 어쩌나. 벨기에로 맥주 여행을 떠난다면 운동화를 꼭 챙겨 가시길. 시간 날 때마다 달리기해서 체중을 유지해야 한다. 잠깐, 한참 달리고 나서 마시는 맥주만큼 맛있는 맥주는 또 없는데. 신나게 달리고 맥주를 마시고 집에 오는 길에 분홍색 코끼리를 만날지도 모른다.
델리리움 크리스마스
종류 상면발효맥주, 벨지안 스트롱 다크 에일
원산지 벨기에, 위그
양조장 위그 양조장(Brouwerij Huyghe)
원료 물, 보리맥아, 홉, 효모
도수 10%
용량 330ml, 750ml
블루베리 소스를 곁들인 오리구이
우리나라엔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특정한 음식이 없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화려하게 장식된 케이크가 있지만. 물론 종교적 의미를 떠나 문화 행사로서의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과 맥주 한 잔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때때론 전통을 따라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설날엔 떡국을, 동짓날엔 팥죽을, 한가위엔 송편을 먹는 것처럼 기념일에 어울리는 요리를 찾아 먹는 재미를 무시하긴 어렵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요리를 하나 꼽을 때 로스트 덕(오리구이)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과일과 허브로 풍미를 살리고 오븐에 통으로 넣어 구워낸 오리구이는 크리스마스 상찬에서 빠질 수 없다. 바삭바삭한 껍질부터 육즙을 촉촉이 머금은 다리 살과 식감이 쫀득한 가슴살까지. 거기에 달콤한 블루베리 소스를 곁들인다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못 받더라도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다. 델리리움 크리스마스와의 페어링 전략은? 크리스마스의 흥겨움이면 충분하다. 반짝이는 조명과 예쁘게 장식한 트리, 그리고 울려 퍼지는 캐럴 아래서 요리와 맥주를 먹고 마시는데 맛이 없을 수가 있을까. 흥겨움이란 만능열쇠를 제외하고도 둘의 조합은 훌륭하다. 아래서 확인해보시길!
로스트 덕과 블루베리소스 만드는 법
재료 오리구이 로스용 오리 한마리, 귤 1/2개, 감자 5개, 양파 2개, 월계수잎 1장, 시나몬스틱 1개, 소금, 후추, 오향(정향, 팔각, 회향등의 향신료), 치킨스톡 500ml 블루베리 소스 사과주스 4큰술, 설탕 1/2큰술, 베리잼 1큰술, 냉동블루베리 2컵, 레몬즙 1큰술, 귤즙 1/2개 분량 양배추 브로콜리 볶음 양배추 1/2개, 브로콜리 1개, 발효버터 5큰술, 건조 블루베리 1/2컵, 물 1/2컵, 소금, 후추 약간씩
블루베리소스를 곁들인 오리구이 x 델리리움 크리스마스
식탁을 가득 채우는 오리구이와 산타 모자를 쓴 델리리움 크리스마스를 보니 맛을 보기 전부터 신이 난다. 껍질이 노릇노릇하게 그을려 식욕을 자극한다. 향긋한 허브향과 은은한 과일 향이 고기 내음과 어우러진다. 잔에 따른 맥주는 진한 붉은 빛을 띤다. 과실주를 떠올리게 할 만큼 색이 예쁘다.
델리리움 크리스마스는 벨지안 스트롱 다크 에일이다. 벨지안 스트롱 에일은 벨기에 특유의 다채로운 이스트 덕분에 양조장에 따라 맛과 향이 다양하다. 따라서 하나의 계열로 맛을 규정하기 어렵다. 각 브랜드를 맛보며 맛을 비교해보기 좋다. 흐릿하게나마 전체적 윤곽을 그려보자면 은은한 과일향, 캐러멜 향, 강한 도수에서 비롯된 진한 알코올 맛 등이 특징이다.
푸드 페어링 전략으론 달큰한 측면을 살려 디저트와 함께 먹는 방법과 맥주의 맛과 향을 뛰놀도록 육류로 바탕을 만들어 주는 방법이 있다.
이번에 두 가지 모두를 선택했다. 잘 익은 오리구이는 고소하고 담백한 풍미로 맥주를 뒷받침해주며, 달콤한 블루베리 소스가 달큰한 맛을 배가시켜준다.
델리리움 크리스마스를 마시면 가장 먼저 은은한 건자두향이 찾아온다. 캐러멜 맛이 살짝 드러났다가 달큰하게 볶은 몰트의 단맛으로 이어진다. 곧바로 홉이 주는 씁쓸함과 함께 거센 알코올 기운이 들이닥친다. 앞서 부드럽게 나오던 맛과 달리 거센 맛이어서 그 대비가 뚜렷하다. 목에 후끈한 감각이 머문다.
다시 한 모금 마신다. 이번엔 계피 특유의 알싸한 향이 두드러진다. 또다시 한 모금. 크렘 브륄레 표면의 살짝 탄 설탕 맛. 델리리움 크리스마스는 맛이 풍부해서 마실 때마다 새로운 맛을 발견할 수 있다.
맥주를 마시고 곧바로 다리 살을 베어 물자 입안에서 육즙이 팡하고 터져 나온다. 허브향을 머금은 육즙이 맥주의 쓴 향을 눌러준다. 동시에 혀는 씁쓸한 맛을 탐하며 손을 맥주로 뻗게끔 만든다. 부드럽고 쫀득한 오리고기의 식감이 강하지 않은 탄산과 잘 맞아 떨어진다. 블루베리 소스를 끼얹은 오리고기를 먹고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달콤한 블루베리 소스가 혀에 감각을 흔들어 깨운다. 아직 체험해야 할 맛이 더 있다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격려하는 듯하다. 과연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블루베리 소스의 잔향이 맥주를 마신 뒤까지 남아 맥주 잔향과 어우러져 더욱 풍부한 맛을 만들어 낸다.
떡처럼 쫀쫀한 가슴살은 식감이 인상 깊다. 가슴살답게 입을 살짝 마르게 하는데, 이때 마시는 맥주는 가뭄에 내린 비처럼 안을 적셔준다. 함께 곁들여 먹는 브로콜리와 감자도 놓쳐선 안 된다. 크리스마스의 상찬답게 맛도 식감도 다채롭다.
오리구이가 점점 줄어들고 맥주도 덩달아 줄어든다. 어디선가 분홍색 코끼리가 춤추는 소리가 들려온다. 섬망증에 빠진 어엿한 주정뱅이가 된 느낌이다. 그래, 오늘 하루쯤은 코가 빨개지고 소리 높여 캐럴을 따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크리스마스에 맛 좋은 맥주와 요리를 즐기는 시간은 삶에 활력을 줄 테니까, 분명히. 그렇다면 만족한다. 잠깐, 이거야말로 주정뱅이가 할 법한 소리이려나.
EDITOR_젠앤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