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마시자, 맥주!
바보야, 문제는 결국 맥주라고!
겨울에도 마시자, 맥주!
계절이 변하고 온도가 서서히 바뀔 즈음,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오는 음악이 있다. 매년 봄이 되면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게 된다. 또한 여름이 무르익을 무렵이면 비치보이스(The Beach Boys)의 ‘Surfin’ USA’가 TV 프로그램의 단골배경 음악으로 등장한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된 듯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게 되는 주옥같은 명곡들이 많은 계절은 역시 가을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베리 매닐로(Barry Manilow)의 ‘When October Goes’를 빼놓고 이 계절의 사운드트랙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을도 이제 서서히 사라져 간다. 그렇다면 겨울은 어떨까? 그렇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바로 그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 (Mariah Carey)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바로 그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뺨을 스치는 공기의 온도와 더불어 귓가를 맴도는 음악을 통해서도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하지만 우리의 입, 입속의 혀, 그리고 혀끝의 미뢰에서도 계절은 변한다. 겨울이 왔다.
겨울이 오면 역시 알코올 함량이 높고, 맛이 진한 맥주를 찾게 된다. 바깥 날씨가 춥고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야외보다는 실내에 머무르며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더위를 식혀줄 짜릿하고 시원한 맥주보다는 대화와 함께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맥주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셈이다. 스타우트(Stout), 그중에서도 러시안 임페리얼 스타우트(Russian Imperial Stout)는 바야흐로 추운 날씨에 무척 잘 어울리는 맥주 스타일이다. 19세기에 영국으로부터 러시아로 수출되었던 맥주를 가리키는 이름인 러시안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일반적인 스타우트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 한결 깊고 진한 맛을 자랑한다. 영국에서 인도로 운송되었던 페일 에일(Pale Ale)의 ABV와 홉 함량을 높여 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을 만들었던 것처럼, 북해와 발트해를 건너 먼 길을 가야 하는 스타우트에 새로운 옷을 입혀 러시안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탄생시켰다. 홉을 잔뜩 넣어 부패를 예방했고, 홉에서 비롯되는 쓴맛을 정돈하고, 결빙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트 사용량을 늘렸으리라 짐작해 본다. 결국 증가한 몰트만큼 알코올 함량도 높아졌을 테고, ABV 10을 넘나드는 달콤하고 근사한 맥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절박한 필요에 의해 탄생한 IPA는 오늘날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꽃이 되었고, 러시아 황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겨울의 꽃으로 피어났다.
미국의 노스코스트(North Coast Brewing Co.)는 스크림쇼(Scrimshaw)라는 썩 괜찮은 필스너(Pilsner)로도 잘 알려졌지만,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올드 라스푸틴(Old Rasputin)으로 유명세를 탄 바 있다. 이제는 크래프트 맥주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그 이름을 들어봤거나, 한두 번쯤 마셔본 경험이 있는 ‘대중적인’ 맥주가 되어버렸지만,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섣부른 시도로 저녁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올드 라스푸틴은 꽤나 매력적인 선택지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제품 레이블을 감싸고 있는 러시아어 문구는 “진정한 친구는 한 순간에 얻을 수 없다.(A sincere friend is not born instantly.)”는 의미로서, 부드럽고 다정한 올드 라스푸틴의 매력을 속삭이듯 드러내고 있다.
좋은 맥주에 굳이 곁들여 먹을 음식이 필요할까 싶지만, 임페리얼 스타우트라면 초콜릿과 함께 즐기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애초에 맥주의 재료로 카카오닙이나 커피빈 등이 활용되기도 하거니와, 임페리얼 스타우트 자체의 풍미가 초콜릿과는 환상의 조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도가 덜한 다크 초콜릿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달콤한 밀크 초콜릿을 더 좋아하는 편인데, 이 부분은 전적으로 취향의 영역이라 믿는다. 다만 비장미와 낭만이 공존하는 퀸Queen의 명곡 ‘이누엔도(Innuendo)’와의 페어링은 강력히 추천!
이른바 ‘진한 맥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스타일이 바로 복(Bock)이다. 복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이 맥주가 처음 양조된 동네의 지명인 아인벡(Einbeck)을 바이에른(Bayern) 사투리로 발음했을 때 아인복(Ainbock)이 되었고, 이후 간소화되면서 ‘복’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하나는 복 맥주가 지닌 상대적으로 높은 알코올 함량과 다소 남성적인 특성을 따서 ‘숫염소’나 ‘산양’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단어 복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추론이다. 실제로 복 맥주들 중에는 레이블에 염소 그림을 새겨넣은 제품들이 꽤 많은 편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밀맥주인 바이젠(Weizen)으로 잘 알려진 파울라너(Paulaner)에서도 살바토르(Salvator)라는 이름의 복 맥주를 소개한 바 있다. 하면발효로 양조된 살바토르는 일반적인 복, 즉 싱글복 보다 좀 더 강렬한 맥주라 할 수 있는 도펠복(Doppelbock) 스타일이지만,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중후한 매력을 보여준다. 수도승들이 식사 대용으로 즐겼던 맥주답게 곡물의 달달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입안을 파고든다. 또 다른 독일 바이젠의 명가 바이엔슈테판(Weihenstephan)이 내놓은 비투스(Vitus) 역시 복 맥주의 매력을 한없이 드러낸다. 좀 더 명확히 설명하자면, 비투스는 밀맥아를 활용한 상면발효 맥주에 해당한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바이젠에서 느낄 수 있는 바나나 또는 정향의 풍미가 우세하지만, 후반부로 접어들면 복비어의 특징인 달콤함과 알코올의 존재감이 고개를 든다. 다소 이질적인 요소들이 모여 이례적인 조화를 보여주는 멋진 맥주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노래를 통해 온갖 장르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는 퀸의 대표곡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어쩌면 복비어의 주제가로 제격일 듯싶다.
추운 날씨와 어울리는 또 다른 맥주 스타일을 꼽을 때, 베럴 숙성(barrel-aged) 맥주 역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맥주를 양조한 뒤 수 개월에 걸쳐 위스키 배럴 등에 숙성시켜 만드는 이 스타일은 맥주가 지닌 특성과 위스키 혹은 위스키 생산에 활용된 베럴이 가진 장점을 하나로 결합시킴으로써 독특하고도 강렬한 풍미를 탄생시킨다. 하디우드(Hardywood Park Craft Brewery)의 버번 크루(Bourbon Cru)는 버번 위스키 베럴에 숙성시킨 벨지안 쿼드러펠(Belgian Quadrupel) 스타일의 맥주로서 ABV 12%의 높은 도수를 자랑한다. 맥주잔을 입에 대기도 전에 콧속으로 파고드는 치명적인 오크 향과 알코올의 존재감은 흡사 폭탄주를 떠올리게 하지만, 막상 입안에 스며드는 아몬드의 달콤함과 체리의 향긋함은 12도의 부담감을 잊게 할 정도로 부드럽고 사랑스럽다. 다만 벌컥벌컥 들이켜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 있으니 늘 조심하자! 이는 물론 독자들이 아닌 필자 스스로를 위한 권고이자 다짐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아티스트 퀸과 데이빗 보위(David Bowie)가 함께 만든 노래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야말로 베럴숙성 맥주를 위한 찬가로 잘 어울릴 듯하다.
겨울 맥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계절마다 자주 듣게 되는 음악에 대해 짧게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틀어대는 ‘벚꽃 향기’가 듣기 싫어 외출조차 부담스럽다는 친구가 있더라도 굳이 타박할 필요는 없다. 반복적인 루틴과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맥주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른바 겨울 맥주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빅토리(Victory Brewing Co.)의 서머 러브(Summer Love)를 추천하고 싶다. 캐스케이드(Cascade), 시트라(Citra), 그리고 심코(Simcoe)를 적당히 버무려 필스너(Pilsner) 몰트와 결합시킨 이 계절 맥주는 여름 한정으로 발매되었다. 왜 굳이 여름 맥주를 겨울에 마셔야 하나 의아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북반구의 겨울이 남반구에서는 엄연히 여름일 뿐만 아니라, 맥주와 함께 여름의 추억과 흔적을 되짚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복숭아와 파인애플의 향이 폴폴 묻어나는 서머 러브와 함께 달콤한 ‘윈터 러브’를 도모하는 것도 근사한 도전이 될 것이다. 퀸의 노래들 가운데 가장 낭만적이고 달콤한 느낌을 자아내는 ‘굿 올드패션드 러버 보이(Good Old-Fashioned LoverBoy)’와 함께라면 겨울도 여름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여름과 가을을 은하수처럼 아로새겼던 수많은 맥주 행사와 페스티벌은 어느덧 지난날의 추억이 되고, 쓸쓸함과 추위로 움츠러드는 겨울과 연말이 찾아왔다. 맥주를 마시자는 주변 사람들도 줄어들고, 맥주를 파는 가게들은 매출 감소로 울상이다. 하지만 겨울에도 맛있는 맥주는 여전히 맛있고, 오히려 겨울에 더 맛있는 맥주가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 더 큰 유혹인 것처럼 말이다. 이쯤에서 우리의 영웅 이소룡(Bruce Lee)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코트를 걸치고 추운 길을 나서려 한다. 물론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만약 당신이 고전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다면, 당신은 루틴, 전통, 그리고 그림자를 잘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막상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겨울은 어쩌면, 맥주를 마시기에 가장 좋은 계절일 지도 모른다.
EDITOR_안호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