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심사에 대하여- BJCP를 통해 알아보는 맥주 심사 과정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커진 만큼, 국내건 해외건 간에 여기저기 많은 맥주대회들이 생겨났다. 맥주를 광고할 때 쓰이곤 하는 ‘어느맥주 대회에서 무슨 상 수상’ 같은 문구는 이제 너무 흔해서 큰 감흥이 들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됐을 정도다. 근데 이러한 문구 를 볼 때면 한번쯤 ‘대체 무슨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고 심사를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진 않았는가? 이번엔 맥주 심사관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맥주를 심사하는지, 가장 대표적인 맥주 심사 방식인 BJCP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맥주를 심사한다는 것
‘심사’란 자세하게 조사하여 등급이나 당락 따위를 결정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심사를 통해 나온 결과물은 우열이 존재해야 한다. 문제는 맥주를 판단하는 기준이 ‘미각’이라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미각은 굉장히 주관적인 영역이므로,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맥주가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맥주로 꼽히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는 공정해야만 한다. 심사관이 내린 결과를 참가자가 납득할 수 있어야 좋은 심사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단순히 맛있다, 맛없다로만 심사를 내린다면 이는 좋은 심사라고 볼 수 없다. 맛있다, 맛없다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주 심사에는 특정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 ‘기준’은 나라마다, 대회마다 각기 다르므로 같은 맥주라도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현재 크래프트 맥주 씬에서 가장 대표적인 심사 기준으로 꼽히는 것은 ‘맥주의 스타일에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이다.
앞서 언급한 ‘BJCP(Beer Judge Certification Program)’가 맥주 스타일에 따른 심사의 가장 적절한 예시이다. BJCP는 스타일별로 ‘잘 정제된 맥주의 범주’를 제시하고, 심사하는 맥주가 이 범주에 보다 부합할수록 높은 점수를 주는 시스템이다. 제 아무리 맛있는 맥주라 할지라도 스타일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처참한 점수가 나오게 된다. 때문에 맥주를 만듦에 있어 창의성을 어느정도 제한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가령 요즘 유행하고 있는 탁한 IPA(뉴 잉글랜드 IPA)를 4~5년 전 BJCP의 기준으로 IPA 스타일에서 채점을 했다면 썩 좋지 못한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BJCP가 세계적인 심사 기준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심사 기준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열리는 대다수의 맥주 경연 대회에선 BJCP를 기준으로 맥주를 심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많은 맥주 경연 대회 역시 BJCP를 기준으로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글에서 굳이 BJCP를 기준으로 맥주 심사에 대해 소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꼭 BJCP를 기준으로 삼지 않더라도, 많은 맥주 대회들이 맥주의 스타일을 기준으로 심사를 진행하곤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엄격한 맥주 경연 대회라 여겨지는 GABF(Great American Beer Festival)와 WBC(World Beer Cup)도 맥주 스타일을 기준으로 심사를 진행한다.
반면 맥주에 대해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유럽권의 경우에는 스타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맥주 경연 대회도 존재한다. 에일과 라거를 한 카테고리에 묶어서 심사하는 광경도 볼 수 있을 정도다. 가령 1886년부터 이어져 오고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 경연 대회인 BIIA(Brewing Industry International Awards)는 맥주의 품질과 상업적 가치를 기준으로 맥주를 심사한다. 이 대회에선 맥주의 스타일이 아닌 무게감과 알코올 도수에 따라 맥주를 분류하며 도수가 높은 맥주는 높은 맥주들끼리, 도수가 낮은 맥주는 낮은 맥주들끼리 심사를 진행한다. 고도수의 맥주는 저도수의 맥주보다 풍부한 풍미를 가지고 있기에, 둘을 함께 심사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고도수 맥주 쪽이 높은 점수를 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맥주의 알코올 도수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도 이 대회의 특징 중 하나이다. 또 영국의 Great British Beer Festival에서도 리얼 에일(Real Ale)들 간의 경연을 진행하곤 하는데, 이 대회에선 맥주의 스타일같은 건 상관없이 그냥 ‘심사관이 이 맥주를 얼마나 즐겼는가’에 따라 맥주를 심사한다. 이외에 대회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다양한 심사 기준을 갖춘 맥주 경연 대회들이 존재한다.
BJCP(맥주 심사관 인증 프로그램)에 대하여
BJCP는 1985년 American Homebrewers Association과 Home Wine, Beer Trade Association이 협력하여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이후 1995년 4월에 별개의 조직으로 독립하여 맥주 스타일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맥주 심사관을 양성하며, 올바른 맥주 심사관과 맥주 경연대회를 연결해주는 일을 하고있다.
BJCP 맥주 스타일 가이드라인은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2015년판을 기준으로 크게는 34종, 소분류까지 포함하면 118개의 맥주 스타일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BJCP 위원회의 합의를 거쳐서 만들어지며, 지속적으로 수정과 업데이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이드라인은 각각의 스타일마다 그 스타일의 향기(Aroma)와 외관(Appearance), 풍미(Flavor), 입에서 느껴지는 감각(Mouthfeel)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주며, 추가적으로 그 스타일에 대한 간단한 역사와 코멘트, 그 스타일만의 특징적인 재료와 다른 스타일과의 차이점, 이 스타일에 맞는 상업맥주의 예시까지 소개하고 있다. 또한 OG(Original Gravity)1)와 FG(Final Gravity)2), IBUs(International Bitterness Units)3), SRM(Standard Reference Method)4), ABV(Alcohol by Volume)5)와 같은 수치화 가능한 것들의 제원도 제시해주고 있으므로 스타일 분류를 좀 더 명확히 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BJCP를 기준으로 심사를 할 경우,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제시하고 있는 범주들에 부합하는 정도에 따라 맥주에 점수를 매긴다. 위에 보여지고 있는 것이 BJCP가 자신들의 기준에 맞게 맥주를 평가할 수 있도록 고안한 스코어시트이다. BJCP를 기준으로 개최되는 맥주 경연에선 이 스코어시트에 따라 맥주를 심사하게 된다. BJCP 스코어 시트에 따른 심사는 50점 만점으로 이루어진다. Aroma는 12점, Appearance는 3점, Flavor는 20점, Mouthfeel은 5점, 총평은 10점으로 각 분야마다 배점의 비중에 차이를 두고있다. 심사관은 각 파트 마다 자신이 이 맥주에 대해 어떻게 감지 했는지를 서술해주며 그에 따른 자신의 점수를 매기고, 그 총점을 마지막에 적어준다. 이때 총점이 45~50점인 맥주는 ‘Outstanding(해당 스타일에서 최고 수준에 속하는, 월드클래스의 맥주)’, 38~44점인 맥주는 ‘Excellent(약간의 조정이 필요한, 매우 좋은 수준의 맥주)’, 30~37점의 맥주는 ‘Very Good(몇가지 흠을 보유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수준의 맥주)’, 21~29점의 맥주는 ‘Good(해당 스타일엔 다소 맞지 않으며, 몇가지 흠을 가지고 있는 맥주)’, 14~20점의 맥주는 ‘Fair(스타일에 맞지 않는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불쾌한 감을 줄 정도의 맥주)’, 0~13점의 맥주는 ‘Problematic(이취가 지배적인, 마시기 힘들 정도의 맥주)’한맥주로 평가하고 있다.
BJCP 기준에 따른 맥주를 심사하는 방법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한 맥주가 심사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는 사실상 BJCP 스코어시트를 작성해가는 과정이라 봐도 좋다.
1.우선 스코어시트의 윗부분을 채운다. 심사관 자신의 이름과 참가자가 제시한 이 맥주의 스타일, 특징적인 재료는 무엇인지 아는 대로 써 넣는다.
2. 맥주를 개봉하기 전, 맥주의 상태가 어떠한지 눈으로 확인한다. 이는 홈브루잉 맥주를 심사하는 경우에 주로 해당되는 과정이다. 침전물이 적당한 양이 들어있는지 (너무 과다한 침전물이 들어있을 경우 오염의 가능성이 있다), 용기 안에 맥주가 적당한 양이 들어있는지(맥주 양이 너무 많으면 탄산화가 잘 일어나지 않을 수 있고, 양이 너무 적으면 과도한 산화가 일어날수도 있다), 병목 주변에 링이 형성 되어 있진 않은지(이는 오염의 징조이다) 등을 확인하면 된다. 이를 확인 후 스코어시트의 Bottle Inspection 칸을 작성한다.
3. 맥주를 개봉하여 적당한 양(30-100mL)을, 적당한 거품을 형성하며 따른다. 그리고 푸어링으로 인해 향이 가장 많이 피어 오를 시점인 이때 즉시 향부터 맡는다. 향을 맡을 땐 길게 한번에 들이마시거나(Long, Deep Sniff) 혹은 짧게 끊어 맡거나(Short, Shallow Sniff) 당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다만 향을 맡는 방법은 심사되는 모든 맥주들에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향을 맡는 방식이 바뀌면 향이 느껴지는 정도가 맥주마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4. 느껴지는 향들을 적는다. 이때 맥아의 측면, 홉의 측면, 에스테르의 측면, 그 외 다른 측면에서 어떠한 향이 느껴지는지 각각 서술한다. 가령 맥아의 경우엔 캐러멜, 구운 보리, 태운 듯한 보리의 향 등이 느껴질 수 있으며, 홉의 측면에선 꽃, 시트러스, 소나무 등의 향을 느낄 수 있다. 에스테르는 맥주 스타일에 따라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만약 존재한다면 베리류, 체리, 배, 자두 등의 풍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것들을 적으면서 BJCP 스타일 가이드라인에 제시된 해당 스타일의 향의 범주에 부합한지 확인한다.
5. 다음으로 확인해야 할 것은 외관이다. 색깔은 어떠한지(황금색, 호박색, 구리색, 갈색, 검정색 등), 투명한 정도는 어떠한지(Cloudy, Turbid, Clear, Sparkling, Opaque 등)를 확인하고 이것이 해당 스타일에 적합한지를 판단한다. 또한 거품의 색깔과 거품 크기, 얼마나 잘 유지되는지 등을 확인한다
6. 이제 맛을 볼 차례다. 우선 첫 모금의 인상이 어떠한지를 작성한다. 이때 입안에서 몇 초간 굴리며 맛을 제대로 음미한다. 또한 맥주를 삼키고 난 직후의 풍미(Finish)와 삼킨 이후 몇초 후에 느껴지는 느낌과 향(Aftertaste) 또한 작성한다. 이때 맥아, 홉, 에스테르측면의 풍미와 단맛, 신맛, 쓴맛 등의 기본적인 맛이 어떠한지, DMS, 디아세틸, 아세트알데히드, 솔벤트 등의 이취가 존재하는지 등을 모두 체크해줘야 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밸런스가 어떠한지도 중요한 요소이다. 이 요소들이 해당 맥주의 스타일에 잘 맞는지 판단한다.
7. 다음은 입에서 느껴지는 느낌, 통칭 마우스필이다. 맥주의 바디감이 어떠한지(Thin, Watery, Medium, Full, Thick), 탄산은 어느 정도인지(Carbonation Level), 알코올에서 오는 따뜻한 느낌의 정도(Alcoholic Warmth), 그 외 떫은 맛 등의 모든 촉감을 서술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해당 스타일에 적합한지 판단한다.
8. 그리고 총평에선 이 맥주를 즐기고 난 후의 일반적인 감상을 적으면 된다. 이때 해당 스타일에 보다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인 의견을 적도록 한다. 그리고 이취와 같은 결함(Flaws)은 원인과 해결 방안을 적어준다.
이후 점수를 매기게 된다. 이때 자신의 종합적인 감상으로 내린 총점을 먼저 적은 후 세부적인 점수를 총점에 맞춰 매기는 방법과, 세부적인 점수를 먼저 매긴 후 그에 대한 총점을 적는 방식 중 편한 방법을 골라서 사용하면 된다. 그리고 같은 맥주를 심사한 심사관들과 맥주의 점수를 최종적으로 합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합의된 점수들로 맥주들 간의 우열을 판단하여 심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심사라는 것이 언뜻 굉장히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그 자체가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느껴지는 맛과 감상을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그걸 짧게 몇 마디라도 적어보는 것도 일종의 심사이다. 보다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심사를 위해선 매우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꼭 BJCP Judge나 맥주 심사관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심사하듯이 맥주를 마셔보는 것은 맥주를 이해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준다. 혹시 맥주 심사에 관심을 두고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자신의 맥주를 스스로 심사 해보고픈 홈브루어라면 위의 과정을 따라 스코어시트를 작성해보는 것은 어떨까.
EDITOR_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