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영화- 봄날은 간다 & 분 괴즈 마리아쥬 파르페
“라면… 먹을래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허진호 감독의 연출작 <봄날은 간다>는 2001년에 개봉하여 약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넓은 연령대에 걸쳐 잔잔한 감동을 전해왔다. 최근에는 영화 속 대사의 패러디인 “라면 먹고 갈래요?”로 재차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이 영화는 ‘사랑 영화'로 각인돼 있다. 강릉의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사랑이 피어났다 지는 과정을 아련하게 담아낸 이 영화는 각자 간직한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은 마치 계절이 가고 오는 자연현상처럼 사랑 역시 어차피 지나가고야 마는 것이라는 씁쓸한 뉘앙스를 암시한다. 배우 이영애와 유지태의 아름다운 한때를 보고 있자면, 어차피 지나갈 것이라 해도 이 봄날 사랑하고픈 마음이 샘솟는 기분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어차피 지나가는 것’은 비단 연인 간의 사랑에만 그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자.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일상에는 지나가고 끝나가고 붙잡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다. 지나가는 봄날을 마지막으로 즐길 수 있는 5월에 이 영화를 함께 곱씹어보고자 한 이유이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을 나이 먹고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감흥을 느끼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봄날은 간다> 역시 20대에 봤을 때와 40대에 봤을 때 각각 느끼는 감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함께 나이를 먹고 농밀하게 성장해가는 ‘숙성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세월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맥주는 없을까? 각종 효모와 미생물을 활용한 오크 배럴에서 발효를 거치며 특유의 쿰쿰한 풍미를 자아내는 ‘숙성 맥주’가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괴즈(Geuze)는 숙성의 정도가 각기 다른 람빅을 블렌딩함으로써 복합적인 맛을 낸다. 분(BOON) 양조장에서 만든 괴즈 ‘마리아쥬 파르페’는 ‘완벽한 배합’을 의미하는 불어로, 올드 람빅과 영 람빅의 블렌딩 비율을 두고 비유적으로 붙인 이름일 것이다. 오래된 쿰쿰함과 그 사이에서 상쾌하게 피어오르는 산미가 오묘하게 섞여 있는 이 괴즈는 영화를 보며 느낄 수 있는 잔잔하고 아련한 감동을 더욱 진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다
붙잡고 싶지만 지나가는 것들
소리, 할머니, 그리고 사랑
<봄날의 간다>는 ‘기다림’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서려 있을 기차역에서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백발의 할머니와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설득하는 주인공 상우(유지태 분)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언가 그리워한다는 것을 뜻한다. 영화는 다양한 그리움의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영화 속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와 아나운서 겸 PD 은수(이영애 분)는 지역의 소리를 전하는 강릉 라디오 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다. 대나무숲, 눈 오는 절 처마 밑에 달린 풍경, 흐르는 강물 소리 등 아름답지만 귀를 거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소리를 녹음기에 붙잡아 두는 작업을 함께하며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싹튼다.
치매를 앓는 상우의 할머니는 자꾸만 기차역에 앉아 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행여 할머니가 길을 잃거나 사고라도 당할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상우는 할머니 마음에 아픈 기억이 있음을 알기에 그 기다림의 시간을 함께 보내다오곤 한다. 할머니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할아버지의 닳아버린 옛 사진을 닳은 손으로 쓸어 만진다. 할머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걸까, 기억을 그리워하는 걸까? 할머니가 끝내 붙잡고 싶었던 기억은 무엇이고, 지우고 싶었던 기억은 무엇일까?
은수와 상우의 마지막 녹음은 60년 동안 아라리를 불러온 노부부의 목소리이다. 어느덧 무성해진 백발을 원망하고, 서산에 지는 해를 슬퍼하고, 떠나가는 임을 애타게 부르는 아라리의 노랫말은 둘의 사랑 역시 끝에 다다랐음을 암시한다. 이미 한 번 결혼의 쓴맛을 겪은 은수는 사랑에 정착하려 하지 않는다. 결혼을 생각하는 상우와 달리 은수에게 찾아온 변덕과 함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맛있는 라면도 매일 먹으면 지겨운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 역시 은수에게는 익숙하고 질리는 것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상우가 천역덕스레 부르는 사랑 노래는 거친 파도소리에 가려 은수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랑이 지나가고 할머니 또한 가버린다. 큰 키에 소년의 얼굴을 한 상우가 감당하기에는 가혹한 상실이다. 계절이 지나고 봄과 함께 다시 찾아온 은수를 상우는 잡지 않고 놓아준다. 정확히는 붙잡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견뎌 내었다.’ 그는 이제 예전에 은수와 함께 작업한 녹음본들을 다시 꺼내 들으며 기억을 불러내는 용기도 생긴다. 놀랍게도, 비로소 상우는 자기를 되찾게 된다. 홀로 녹음에 나서 미소 짓는 상우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끝내 놓지 못했던 것을 놓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억은 그를 아프게 하기도 했지만 치유하기도 했다.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리시라고 울부짖는 상우의 입에 알사탕을 물려주던 할머니처럼 말이다.
충분히 그리워하고 새로움으로 나아가기
종이 사진앨범이 휴대폰 앨범으로 옮겨온 지 꽤 되었지만, 옛 사진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 느껴지는 오래된 냄새를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곰팡내 같기도 하고 먼지 냄새 같기도 한데 묘하게 옛 기억을 불러오는 바로 그 냄새 말이다. 괴즈에서 느껴지는 쿰쿰한 풍미 역시 그것과 닮아 있다.
영화 속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비록 끊임없이 과거를 곱씹고 그리워할지라도, 우리는 엄연히 현재에 살아있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함께 공존하는 ‘지금'은 마치 올드 람빅과 영 람빅이 섞여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괴즈의 맛과 닮아 있다. ‘마리아쥬 파르페’는 최소 3년 이상 숙성한 올드 람빅이 95%, 영 람빅이 5%의 비율로 블렌딩 되어있다. 올드람빅의 쿰쿰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지배적으로 깔린 가운데 영 람빅이 주는 날카롭고 강렬한 맛은 오래되어 닳아버린 추억과 현재의 날 것의 감정이 뒤섞인 <봄날은 간다>의 정서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봄날의 간다>는 이미 지나갔지만 붙잡아 두고 싶은 기억을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담아내었다. 마치 ‘그때'의 기억을 꺼내 보듯 마리아쥬 파르페를 따보자. 기다렸다는 듯 탄산이 밀어내는 ‘뻥’ 소리와 함께 지나가버린 것들을 불러오고는, 다시 놓아줄 것이다.
EDITOR_홍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