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는 어떻게 투명한 액체가 되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맥주는 ‘투명한 액체’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 갓 만들어진 맥주는 효모와 더불어 여러 유기, 무기물이 섞여 있는 혼합물이기에 결코 시중에 유통되는 맥주만큼 투명하지가 않다. 왜 굳이 완성된 맥주에 추가적인 과정을 더해서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걸까? 또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맥주를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걸까? 이번엔 맥주의 청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청징(Clarification)은 현탁입자나 침전물에 의해 발생하는 유탁, 또는 혼탁한 액체를 투명한 액체의 상태로 전환시켜주는 공정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탁한 액체를 맑게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대다수의 맥주는 청징을 거친 투명한 상태로 판매되며, 이는 실험정신이 강한 크래프트 맥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보통 ‘맥주에서의 청징’하면 발효 후에 효모를 제거하는 과정을 떠올리곤 하는데, 실제로 청징은 발효 전과 발효 후 모두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발효 전 청징과 발효 후 청징은 청징을 해주는 대상과 목적이 조금은 다르다.
발효 전 청징
발효 전의 현탁 현상은 몰트와 홉에서 유래한 단백질, 타닌(Tannin)을 비롯한 여러 폴리페놀, 소량의 탄수화물과 중금속 등이 관여하여 나타난다. 홈 브루잉을 해본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핫 브레이크(Hot Break)와 콜드 브레이크(Cold Break)가 발효 전에 생기는 현탁, 침전 물질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들은 각각 맥즙을 끓이고(Boiling) 식히는(chilling) 과정에서 단백질과 여러 물질들이 응고되어 생성된다. 발효 전 청징의 주목적은 이러한 큰 덩어리의 침전물들과 맥즙 제조 과정 중에 들어간 홉, 보리 등에서 온 찌꺼기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발효 전 청징은 응집제를 넣어서 현탁물질을 침전물로 응집시켜주고, 월풀蜉(Whirlpool)을 하여 홉 찌꺼기를 비롯한 여러 현탁물질을 모아서 제거하고, 홉백蜉(Hopback)을 일종의 여과 장치로 이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청징이 이루어지지 않은 맥즙은 발효가 느려지고, 발효 후의 청징 과정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등의 문제가 생긴다. 어차피 발효 후에 효모 때문에 맥주가 탁해질텐데도 굳이 발효 전에 청징을 한번 해주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발효 후 청징
발효 후 청징은 주로 효모와 잔여 발효 산물을 제거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효모는 살아있는 미생물이기에, 맥주에 남아있게 되면 이런저런 물질을 먹고 뱉는 대사를 진행하므로 지속적으로 맥주를 변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맥주의 종류에 따라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대표적으로 사워 맥주나 벨기에 맥주들)도 있긴 하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효모가 죽어서 병 안에서 부패하게 되면 맥주의 유통기한을 짧게 만들뿐만 아니라 맛도 좋지 않게 만들며, 애초에 효모 자체의 맛도 특수한 경우(대표적으로 헤페바이젠)를 제외하면 좋은 경우가 별로 없다. 즉, 깔끔한 맛과 보다 긴 유통기한을 위해서는 효모를 제거해주는 것이 좋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크래프트 맥주 회사들도 발효 후에 어느 정도의 청징을 하는 편이고, 대기업 맥주 회사에선 더욱 철저하게 청징과 살균을 하곤 한다.
여과
발효 후 청징의 방법으론 크게 여과, 원심분리(Centrifugation), 파이닝(Fining, 청징제 첨가)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확실한 청징법은 바로 여과이다. 여과는 액체를 다공성(Porous)의 매질에 투과시켜 물질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쉽게 말해서 맥주를 필터에 한번 거르는 작업을 의미한다. 필터의 구멍(Pore) 크기에 따라 여과 할 수 있는 물질에 차이가 생기며, 작게는 1.0μm (분자 수준의 물질을 거르는 용도)에서 크게는 1.0cm(홉 덩어리 등을 제거하는 용도)까지 목적에 따라 다르게 사용한다.
여과는 크게 2가지로 분류가 된다. 하나는 심층 여과(Depth Filtration)로 액체가 특정 매질을 지나는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여과, 즉 필터 전체를 지나면서 진행되는 여과를 의미 한다. 예전에 과학도서 같은 곳에서 볼 수 있었던 ‘무인도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물 정수기’같은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심층 여과에는 미세한 구멍이 많이 뚫려 있는 매질을 필터로서 사용하곤 하는데, 규조토(Diatomaceous Earth)나 펄라이트(Perlite) 등이 맥주의 심층 여과에 주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다공성 매질이다. 여과가 필요한 많은 산업에서 심층 여과는 이후에 진행될 추가적인 여과에 앞서 1차적으로 진행되는, 쉽게 말해 ‘대충 한번 거르는’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에 반해 크래프트 맥주의 경우엔 대부분 한두 번의 심층 여과 만으로 여과를 끝내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심층 여과에 사용되는 필터 종류로는 플레이트 앤 프레임 필터(Plate and Frame Filter), 스크린 필터(Screen Filter), 캔들 필터(Candle Filter)등이 있다. 이들 필터는 각각 매질이나 생김새가 다르긴 하나 대략적으로 스크린 필터와 캔들 필터는 큰 크기의 물질(대표적으로 효모)을 비교적 빠르게 거를 때, 플레이트 앤 프레임 필터는 좀 더 작은 크기의 물질(작은 크기의 박테리아나 콜로이드 등)을 거를 때 사용된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심층 여과 이외의 다른 여과법으로 표면 여과(Surface Filtration)라는 것도 있다. 이는 심층 여과와는 달리, 얇은 막에 액체를 투과시켜 막 표면에서만 진행되는 여과를 의미한다. 심층 여과를 진행할 경우, 걸러진 물질들이 막 표면에 지속적으로 쌓이게 되는데 이를 두고 케이크(Cake)라고 부르며, 이 때문에 표면 여과를 케이크 여과(Cake Filtr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표면 여과는 보통 심층여과보다 훨씬 세밀한 크기의 물질을 거르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크래프트 맥주 업계에선 좀처럼 사용하는 일이 없다.
원심분리
원심분리는 혼합물을 바깥방향으로 굉장히 빠르게 회전시킴으로서 원심력을 이용해 침전물을 아래로 가라앉히는 방법이다. 쥐불놀이를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며, 아마 생물학과 관련 있는 영화에서 원심분리를 하는 장면을 한번쯤 보곤 했을 것이다. 원심분리의 성능은 기기마다 다르긴 하지만 생각보단 강력하므로 효모나 홉 찌꺼기와 같은 큰 덩어리는 물론 라거링 중에 생성된 콜드 브레이크나 일정 수준의 콜로이드 도 제거할 수 있디.
원심분리는 양조 과정 중에 다양하게 사용된다. 발효 전 청징을 할때 핫 브레이크와 콜드 브레이크를 더욱 확실히 제거해주기 위해 사용하거나, 1차 발효가 끝난 후 가라앉은 효모 시체들을 어느 정도 제거해주기 위해 가볍게 사용하기도 하며, 여과를 진행하기 전에 미리 원심분리를 하여 대부분의 침전물을 어느 정도 제거해서 여과 장비를 더욱 효율적이고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 주기도 하고, 포장 직전에 맥주를 차게 만드는 과정에서 생성된 콜드브레이크를 마지막으로 제거해주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또 원심분리는 여과와 달리 침전물을 한곳으로 모아준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원심분리를 이용하면 효모를 한곳으로 모아 다음 맥주 양조시에 재사용하기가 아주 수월하다. 이처럼 원심분리는 유용한 방법이지만 장비의 가격이 매우 비싸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비교적 대규모의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들이 주로 애용하며, 소규모 양조장에서 원심분리를 이용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파이닝
파이닝은 응집제(혹은 청징제)를 넣어서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효모나 단백질, 콜로이드 등을 서로 뭉치게 하여 입자를 크게 만들어주는 방법으로 청징 방법이라기 보다는 청징을 도와주는 과정이라 보는 것이 더 좋다.
갓 발효를 마친 효모의 세포벽은 보통 음전하를 띄고 있기 때문에 같은 음전하를 띄는 효모들끼리 척력이 발생하여 잘 붙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곤 한다. 이러한 음전하를 중화시키기 위해서 넣어주는 것이 양전하를 띄고 있는 응집제이며, 응집제와 반응하여 중화된 효모의 세포벽은 다른 세포벽과 달라붙는 것이 수월해지므로 서로 달라붙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일련의 과정은 응집제를 넣어줌과 동시에 일어나는 굉장히 간단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이기에 아직도 많은 양조장들이 파이닝을 하고 있으며, 이때 사용되는 양전하를 띄는 응집제로 물고기의 부레로 만든 부레풀(Isinglass), 젤라틴(Gelatin), 아라비아 고무(Gum Arabic)등이 쓰인다.
반면 단백질을 응집시키기 위한 응집제는 그 성질이 정 반대이다. 단백질을 응집시키기 위한 응집제는 음전하를 띄고 있으며, 때문에 양전하를 띄고 있는 단백질들이 직접적으로 응집제에 달라붙어 큰 덩어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 응집제로는 보통 카라기난(Carrageenan), 알긴산(Alginate) 등이 사용되곤 한다. 언급했다시피 단백질 응집제와 효모 응집제는 서로 정 반대의 전하를 띄고 있기에 동시에 사용한다면 효율이 매우 좋지 않다. 그러므로 시간차를 두고 사용하거나,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여(보통 효모를 응집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에 이쪽을 사용한다) 파이닝을 진행하곤 한다.
막상 이렇게 청징에 대한 얘기를 쭉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최근 크래프트맥주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청징을 하지 않은 맥주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뉴 잉글랜드IPA이다. 이 맥주는 기존의 ‘맥주가 탁하게 나오면 좋지 않은 것’이라는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맥주가 탁해질 법한 방식만 골라서 행하여 만든 굉장히 탁한 맥주이다. 덕분에 유통기한이 짧아지고 청징을 거친 맥주가 지니고 있는 청량감은 없어졌으나, 청징을 하지 않아 온전히 보존된 무수한 풍미 물질들과 부드러운 마우스 필을 선사해주는 단백질들로 인해 마시기 쉬우면서 향이 매우 풍부한 맥주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이 글을 읽은 분들도 ‘그래서 맥주는 투명하게 만들어야 하는구나’보다는, ‘그래서 맥주는 투명하게 만들기도 하는구나’ 정도로만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EDITOR_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