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으로 시장과 교감하라- 패키징 시대, 맥주 디자인의 오늘
“특정 맥주를 사려고 마음먹고 온 사람이 아니라면 백이면 백 모두 라벨 디자인을 보고 맥주를 고릅니다. 옴니폴로 같은 맥주는 워낙 소량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병 디자인만 보고 사 가는 사람이 많아서 금방 소진되곤 합니다. 빈 병을 수집하는 사람도 있고요.”
한 보틀숍 대표의 말이다.
맥주 시장에서 디자인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과거 2~3개의 대기업 맥주 중에서 제품을 고르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최대 수천 종의 맥주가 경쟁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차별화된 패키지를 통해 소비자의 눈에 띄고 인지도를 높이는 것은 맥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됐다.
특히 현재는 크래프트 맥주의 대중화 초기 단계로, 소비자의 대부분은 자신만의 크래프트 맥주 선택 기준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디자인이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는 것이다.
크래프트 브루어리 입장에서는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광고, 대대적인 오프라인 이벤트 등 대규모 자본을 활용한 마케팅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디자인은 자사 맥주를 어필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또 다양하고 혁신적인 디자인은 크래프트 맥주 고유의 특징으로, 소비자들이 크래프트 맥주를 즐기는 이유 중 하나다. 디자인, 네이밍을 통한 스토리텔링, 브랜딩 자체를 재미 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벨에 큼지막하게 이름을 앞세운 대기업 맥주들과 달리 크래프트 맥주는 차별화와 혁신의 한 방법으로 디자인을 활용한다. 유명한 디자인 회사와 계약하기 보다는 브루어 주변의 재능 있는 지인과 협업해 맥주마다 개성을 보여주면서도 일관된 디자인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BI)를 구축한다.
2011년 스웨덴에 설립된 크래프트 브루어리 옴니폴로는 단순하면서도 초감각적인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전 세계 맥주 업계에 강한 인상을 심었다. 회사 로고나 맥주 이름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맥주의 특징을 간결하게 드러낸 라벨 디자인으로 옴니폴로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맥주’로 등극했다. 브루어 헤녹 펜티(Henok Fentie)와 디자이너 칼 그랜딘(Karl Grandin)이 함께 창업해 일관된 디자인 철학을 지속한 덕분이다.
벨기에 수도원 맥주 베스트블레테렌은 라벨이 없는 디자인으로 상식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 점은 생산 물량과 유통처가 적은 ‘귀한’ 맥주로서의 가치를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
7,000개가 넘는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경쟁하는 미국에서는 다양한 디자인의 맥주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일러스트와 타이포를 적절하게 배치해 특유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 쓰리 플로이드 브루잉부터 뉴벨지움(자전거), 밸러스트포인트(낚시) 등 창업자들의 취미를 패키지 디자인에 반영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게 구축한 경우도 있다. 크래프트 맥주 수입 초기, 한국 시장에서도 인디카가 ‘코끼리 맥주’로 불리는 등 디자인이 마케팅 요소로 톡톡히 역할을 했다.
국내 크래프트 맥주 기업들도 디자인 요소에 신경을 쓰면서 국제 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코리아 크래프트 브류어리의 아크 맥주 시리즈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병 모양과 네이밍 전략으로 2017년 영국 인터내셔널 비어챌린지 디자인&패키지 부문 금메달을 받았다. 또 더부스는 같은 해 맥주 회사 중 유일하게 디자인 포 아시아 어워드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최근 국내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는 마트, 편의점, 보틀샵 같은 소매점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디자인의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고 있다. 집맥, 혼맥 등이 늘어나는 추세가 지속되는 상황과 더불어 패키지 디자인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국내 크래프트 맥주 기업들은 디자인 변신을 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플래티넘은 캔 디자인을 대대적으로 변경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플래티넘은 지난해 11월 CU 편의점과 함께 필스너 스타일의 ‘퇴근길’ 맥주를 런칭했다. 라벨에 밤하늘을 배경으로 불 꺼진 건물을 그려 넣고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문구를 새겼다.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구매하는 소비자의 감성을 정확히 파악해 공략한 것이다. 이후 출시한 세션 IPA인 ‘퇴근길2’에서는 해질녘의 도시 풍경에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문구를 다시 활용했다.
이 두 맥주는 이른바 ‘감성 맥주’로 불리며 플래티넘 맥주 매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플래티넘이 처음 캔맥주를 편의점에 런칭했던 지난 2017년과 비교하면 수십 배로 매출이 늘었다. 플래티넘 맥주 관계자는 “퇴근길부터는 제품 하나하나에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하고 네이밍을 입혀주고 가독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다른 제품과 차별화를 시도했다.”라며 “패키지가 바뀌자 시장 반응이 완전히 달라졌다.”라고 맥주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플래티넘이 올 6월 출시한 ‘인생 에일’ 역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인생 에일은 플래티넘 페일 에일의 국제 대회 수상 내역을 캔 디자인을 통해 노출해 역사와 품질을 강조했다. 주목할 점은 인생 에일이 플래티넘이 지난 2017년 출시한 페일 에일 캔 제품과 맛이 유사한 맥주라는 점이다. 당시 페일 에일 캔은 시장에 크게 어필하지 못했던 반면 인생 에일은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플래티넘 맥주 관계자는 “미묘한 레시피의 변화만 있었을 뿐인데 ‘쓴 맛이 강하다’는 소비자 불만이 크게 줄었다.”라며 “시각이 테이스팅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처럼, 패키지 자체가 소비자의 미각 경험에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플래티넘은 이 기세를 몰아 오는 10월 캔 2종을 추가 출시할 예정이다. 새로 내놓는 맥주들 역시 한글 네이밍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갈 방침이다.
카브루 역시 지난 4월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변경했다. 어두운 갈색으로 보였던 로고의 색깔을 밝은 노란색으로 변경하면서 발랄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또 그동안 로고를 원이 감싸고 있어 여러 상품에 로고를 적용하기 어려웠던 점을 고려해 오픈된 형태로 로고를 바꿨다. 과거 로고는 탭 핸들, 잔 등에 활용할 때 원이 찌그러져 보이는 등 활용에 한계가 있었다. 카브루 관계자는 “BI 컬러 변경에 대한 내외부의 평가가 좋다.”라며 “소비자에게 친근한 노란색을 도입한 것이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라고 밝혔다.
카브루는 BI를 바꾸는 동시에 브랜드가 소비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구미호 맥주’라는 펫네임을 도입했다. 이를 알리기 위해 팝업스토어, 동영상 광고 등을 통해 홍보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 개별 제품의 네이밍과 캔 디자인에도 개성을 담았다. 맥주 스타일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식(살랑살랑 바이젠, 수줍은 피치 에일 등)으로 맥주에 이름을 붙였다. 감성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것으로,. 맥주 이름의 분위기에 맞춰 컬러와 디자인 등을 적용했다.
특정 지역에 자리잡은 크래프트 브루어리들은 디자인에 지역적인 요소를 담아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 예로 크래프트 루트는 동명항, 아바이마을 등 속초의 랜드마크를 활용하여 디자인한다. 국산 크래프트 맥주들이 디자인과 네이밍 등으로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가운데 현실적인 제약도 있다.
맥주 캔에 디자인을 입히는 방법은 크게 캔 위에 직접 인쇄하거나 스티커, 수축 필름(슈링크)을 붙이는 방식으로 나뉜다. 이 중 캔에 인쇄하는 방법이 가장 심미성이 높고 훼손 확률이 낮으며 개당 제작 단가도 낮다. 그러나 캔 인쇄를 위해서는 최소 30만 개의 물량을 발주해야 한다. 캔 인쇄를 하는 업체는 소수에 불과하고 맥주 대기업들의 물량이 시장 표준으로 자리 잡아 크래프트 맥주의 소량 주문 제작 니즈가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해 플래티넘, 제주맥주와 같이 대량으로 캔을 생산하는 업체만 캔 인쇄 방법을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들 업체도 새로운 맥주가 나올 때마다 캔에 인쇄를 진행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나머지 소형 맥주 업체들은 공캔을 대량으로 구매해 수축 필름을 캔에 감싸는 작업(카브루)을 하거나, 스티커를 붙이는 식(크래프트 루트, 플레이그라운드, 화수 브루어리 등)으로 디자인을 반영하고 있다. 카브루 관계자는 “캔에 인쇄하는 방식이 경제적이고 보기도 좋은 방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현실적인 이유에서 슈링크 방식을 쓰고 있다.”라며 “앞으로 캔 물량이 많아지면 방식 변경을 검토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국내에서 맥주 디자인을 통한 브랜딩은 아직 초기 단계로, 업체마다 일관성 있는 패키지 디자인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앞으로 시장이 성숙해가면서 어떤 병이나 캔에서도 해당 브루어리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디자인이 대거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한 맥주업계 관계자는 “디자인은 맥주를 선택하도록 설득하고 맥주와 소비자를 정서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다.”라며 “국내 크래프트 맥주가 맛의 다양성을 확대하는 동시에 디자인 수준도 높여가고 있다.”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