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코끼리로 가득했던 델리리움 데이!
한여름 밤의 핑크 코끼리를 만난 적이 있는가?
아직 만나보지 않았다면 조심하는 게 좋다. 그 귀엽고 발랄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방심하다가 큰코다칠지 모른다.
벨기에 휘게 브루어리에서 만드는 맥주 브랜드 ‘델리리움’은 까불대는 듯한 핑크색 코끼리 그림과 독특한 도자기 맥주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맛 또한 화려한 디자인에 뒤지지 않는다. 가장 유명하고 기본적인 라인업인 ‘델리리움 트레멘스’는 향긋하고 둥글둥글한 과일 풍미가 매력적인 맥주다. 거품이 풍성한 황금색 외관을 보고 있노라면 여름 갈증에 못 이겨 벌컥벌컥 들이켜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이 맥주는 보기와 달리 알코올 도수가 8.5%에 이르는 벨지안 스트롱 에일이다. 그러니 앞서 왜 핑크 코끼리를 조심하라고 했는지 알 것이다.
지난 8월 6일, 신촌에 위치한 펍 뉴타운에서 '델리리움 데이' 행사가 열렸다. 델리리움 수출 담당자 Stijn De Neve의 방한 일정에 맞추어 진행된 본 행사는 티켓이 판매되기 시작한 지 5시간 만에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코끼리 네온사인부터 코끼리 양동이, 코끼리 코스터, 코끼리 잔 건조 매트, 코끼리 쟁반까지 사방에서 까불대는 핑크 코끼리들이 이날 뉴타운에 들어서는 방문객들을 반겼다.
전통과 역사에 혁신을 더하는 벨기에 맥주
델리리움에서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지역 수출을 담당하는 Stijn De Neve는 20년 가까이 벨기에 맥주 산업에 종사한 맥주 전문가다. 보스틸스 브루어리에서 브랜드 홍보 대사로 일하던 그는 브루어리가 세계 최대 맥주 회사인 ABI에 인수된 후 최근 델리리움을 생산하는 휘게 브루어리로 적을 옮겼다. 큰 기업보다는 작은 가족 기업의 문화와 일 처리 방식이 본인에게 더 잘 맞는다는 이유에서다. 이날 손목에 핑크 코끼리 시계를 차고 있었던 그는 비단 델리리움뿐 아니라 벨기에 맥주 자체에 대한 열의와 애정이 커 보였다.
국내에서 ‘수입 맥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독일, 체코, 미국, 중국, 일본 맥주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벨기에 맥주는 오랜 전통과 독특하고 뚜렷한 특색을 지녔음에도 그다지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은편이다. Stijn은 벨기에 맥주의 매력은 바로 전통에 가미하는 혁신에 있다고 강조했다.
“벨기에 맥주의 전통은 아주 유서가 깊습니다. 당장 휘게 브루어리만 해도 1674년에 이미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세대를 거쳐서 지금은 4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죠.”
20년 전 그가 맥주 업계에 종사하기 시작했을 때는 지금처럼 미국식 ‘크래프트맥주’가 알려지기 전이었다. 그때는 벨기에 전통 맥주가 곧 크래프트 맥주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시작된 전 세계적 크래프트 맥주 붐이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에까지 다다르면서 벨기에 양조장들의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고, 벨기에 맥주가 정체성을 재확립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따라서 벨기에 맥주는 오로지 전통적 방식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혁신하고자 하고 있다. 혁신이 벨기에 맥주의 미래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 일환으로 휘게 브루어리는 올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기존의 전통적인 맥주와 양조 방식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크래프트 맥주의 방식으로 한 배치 씩 색다른 맥주를 만들어보는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든 맥주 중 하나는 벨지안 IPA입니다. IPA지만 벨기에 맥주의 성격을 띤 것이죠. ‘크래프트 맥주’라는게 극적이고 강렬한 맛을 띠는 경우가 잦은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맥주에게는 때로 ‘맥주’라는 정체성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극단성을 추구하지 않으려 합니다. 너무 공격적이지 않은 맛, 가볍지 않으면서 적당히 풍성한 질감이 있는 맛, 오로지 홉 풍미로만 채워지지 않는 맛을 추구하는 것이죠.”
전통을 간직하되 혁신을 더해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유행하는 무언가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Stijn은 설명한다.
알코올 섬망증과 핑크 코끼리?
‘델리리움 트레멘스’는 본래 알코올 의존의 금단 증상으로서 착각이나 환각, 심한 불안 증세를 동반하는 의식 장애를 말한다. 이러한 심각한 질환을 맥주 이름으로 지은 것도 무시무시한데, 발랄한 핑크 코끼리와 함께라니 대체 무슨 연유인가 싶다.
그러나 델리리움 트레멘스라는 이름은 누군가 우연히 툭 던진 우스갯소리에서 비롯되었다. 이 맥주가 처음 탄생한 것은 1988년이었는데, 당시 브루어리를 방문한 국세청 직원이 맥주를 마셔보고는 “더 마시다간 알코올 섬망증이 올 것 같다”라며 농담을 한 것이다. 그 후 이 맥주의 이름은 알코올 섬만증이 되었다. 라벨에 그려진 핑크 코끼리는 환각 증세를 나타낸다. ‘핑크 코끼리가 보인다’는 말은 20세기 영미 문학에서 주로 사용되기 시작해, 알코올 섬망 상태를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이 휘게 브루어리는 몰라도, ‘핑크 코끼리 맥주’는 알거든요.”
델리리움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핑크 코끼리는 휘게 브루어리의 혁신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벨기에 맥주의 전통성과 역사성은 현재 유행하는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 자칫 한계로 작용할 소지도 있다. 새롭고 트랜디한 크래프트 맥주를 매일같이 접하는 소비자에게 낡고 구식이라는 이미지로 치부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Stijn은 델리리움이 핑크 코끼리 캐릭터를 통해 그런 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익살스러운 코끼리 캐릭터로인해 델리리움이란 브랜드는 구식은커녕 재밌고 친근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이러한 브랜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해 델리리움은 ‘델리리움 카페’라는 이름으로 세계 각지에서 펍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맥주 종류를 보유해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오른 브뤼셀 본점을 비롯해 말레이시아, 일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지에 파견된 핑크 코끼리들이 델리리움 맥주를 전파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안고 나아가는 브루어리
“비록 작은 나라의 작은 브루어리지만, 모두가 조금씩 노력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로서 눈에 띄는 델리리움의 또 다른 행보는 바로 사회적 책임을 인지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실천한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속가능한 양조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한 폐해는 최근 벨기에에서도 폭염과 가뭄, 농작물 피해 등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델리리움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폐수 재사용 시설을 확충하여, 양조장 운영에 필요한 전체 에너지의 50%를 자급자족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델리리움은 약 90명의 전체 직원 중 15~20명의 장애인을 고용하여 장애인의 고용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맥주 라인업 중 하나인 ‘델리리아’는 전 세계에서 여성들을 초대해 만드는 맥주로서 매년 국제 여성의 날에 출시되며, 수익금의 일부를 유방암 인식 개선과 연구를 위한 기금으로 사용한다.
델리리움을 생산하는 휘게 브루어리는 향후 2년간 새로운 마이크로 브루어리를 3개 더 만들 계획이다. 또한 미국에서 성행하는 배럴 에이징 라인업 역시 선보일 예정이다. Stijn은 자기가 하는 일이 단지 맥주를 만드는 것에 관한 게 아니며, 맥주를 향한 하나의 의식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가끔은 제가 맥주를 영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해요. 저 스스로 벨기에 문화의 홍보대사라고 느끼기도 하거든요. 다른 나라로 벨기에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죠. 단순히 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맥주를 향한 진정한 열의를 바탕으로 항상 맥주에 관해 생각합니다. 맥주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맥주에 관해 5시간도 넘게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데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