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의 여왕, 오르발
어느 백작의 부인이었던 마틸다. 남편을 여읜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어쩌다 결혼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낙심한 상태로 강가에서 주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놀랍게도 그때 송어가 입안에 반지를 물고 물 밖으로 나타났다. 마틸다는 기뻐하며 ‘이곳이 황금계곡 Val d'Or = Valley of Gold 이구나!’ 라고 외쳤고, 그 자리에 수도원을 세우기로 결심한다. 황금계곡을 뜻하는 Val d'Or에서 따온 명칭인 Orval이 이곳의 지명이자, 수도원과 맥주의 이름이 된 사연이다. 황금계곡의 전설을 확인하기 위해 로슈포르에서 약 1시간 반을 운전하여 오르발에 도착하였다.
어랑쥬 가르덴
오르발 수도원의 입구로 가는 길목의 한 건물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로 오르발 맥주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인 어랑쥬 가르덴이 있기 때문. 입구에는 깜찍한 송어 입간판이 반겨주고 있었다.
오르발 수도원의 입구로 가는 길목의 한 건물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로 오르발 맥주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인 어랑쥬 가르덴이 있기 때문. 입구에는 깜찍한 송어 입간판이 반겨주고 있었다.
오르발 맥주는 기본적으로 한 가지 종류만 생산되며 호리병 모양의 디자인과 더불어 마구간 냄새 비슷한 독특한 풍미가 강한 인상을 준다.
오르발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리는데, 바로 쿰쿰한 냄새 때문! 오르발에 사용되는 브렛Brett이라는 효모는 곰팡이 같은 쿰쿰한 향을 만들어 내는 것이 특징이다. 오르발을 처음으로 마셔보는 사람이라면, ‘트라피스트 맥주들은 이렇게 이상한 맛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향에도 불구하고 브렛 효모는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될 정도로 맥주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맥주 재료이다.
이 레스토랑에서는 두 가지 버전의 오르발 맥주를 판매하는데, 당해에 생산한 영Young오르발과 1년이 지난 올드Old오르발이 그것이다.
오르발은 병 속에서도 발효작용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맛이 변한다. 오래될수록 풍미가 고급스러워진다는 평이 많아 이곳에서도 올드오르발이 영오르발 보다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맥주 마니아들에게 쏠쏠한 재미인 비교시음을 위해 영오르발과 올드오르발 각 1병씩을 주문하였다. 올드오르발은 거품이 상당히 풍성하고 탄산감이 적게 느껴져 질감이 부드러운 반면, 영 오르발은 신선한 맥주답게 탄산감이 많고 질감도 거칠었다. 다만 고작(?) 1년 차이의 맥주인지라 뉘앙스의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만약 10년 정도는 묵은 오르발을 마셔보면 훨씬 큰 차이가 느껴졌을 것이다.
이 레스토랑에서는 오르발의 히든맥주를 판매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쁘띠오르발!Petit는 ‘작은 것’을 의미. 이번 여행에서 맛본 트라피스트 맥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꼽으라면 개인적인 평가로는 쁘띠오르발이다. 엥켈Enkel타입의 맥주로서 알코올 도수는 4.5도이며 황금색을 띠고 있는데, 시중에는 유통되지 않고 오직 이 레스토랑에서만 마실 수 있는 아주 희귀한 녀석이다. 게다가 생맥주로 판매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검은 글씨가 새겨진 잔에 채워져 나오는 일반 오르발과 달리 쁘띠오르발은 초록색 글씨가 도드라지는 잔에 서빙되었다. 한 모금 마셔보니 홉향이 입안 가득 느껴져 IPA1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쿰쿰한 향도 거의 없어 거부감 없이 꿀꺽꿀꺽 넘어갔다. 게다가 오직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는 희귀성 때문에 더 훌륭한 맛으로 느껴졌으리라.
주문한 음식들도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오르발의 치즈 역시 ATP 인증을 받은 만큼 치즈가 들어간 음식과 함께 마신다면 더욱 황홀한 경험이 될 것이다. 매력 넘치는 쁘띠오르발을 한두 잔 더 마신 뒤 수도원 입구로 이동하였다.
오르발 Orval 수도원
오르발 수도원은 많은 시련을 겪어온 곳이다. 13세기에는 무려 100년 동안의 복구 작업이 필요했을 정도로 큰 화재를 겪었고, 17세기의 30년 전쟁과 18세기의 프랑스 혁명으로 여러 번 크게 파괴되기도 했다. 다행히 어느 가문이 폐허가 된 이곳을 구입해 수도회에 기부를 하면서 수도원을 재건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르발 수도원은 내부를 공개하지는 않지만, 별도의 유료 관람 코스가 있다2018년 기준, 성인 6유로. 빠르게 둘러봐도 1시간은 족히 걸릴 만큼 볼거리가 다양하다. 입장료를 지불하는 곳에 상점이 있는데, 전용잔과 오프너 등 몇 가지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오르발 병 모양의 오프너는 가격도 2 유로로 저렴하기 때문에 선물로 제격이다. 관람 코스에 입장하면 철창 너머로 멋진 수도원의 내부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인 6유로. 관람 코스는 정돈이 잘 된 공원에 온 듯한 느낌을 주며, 미술전시관, 약초관, 맥주전시관 등 다양한 테마의 볼거리가 가득하다. 코스를 따라 조금 더 걷다 보면 허물어진 건물과 폐허로 남아있는 공간을 볼 수 있다. 수차례 파괴된 오르발 수도원의 시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수도원과 관련된 유적들이 전시되어있는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관람 코스가 끝이 난다. 맥주와 음식 모두 만족스러웠던 오르발 레스토랑, 그리고 볼거리가 가득한 수도원의 관람 코스까지. 부족할 것이 없었던 오르발 체험을 마치고, 다음 숙소가 있는 룩셈부르크로 이동하였다.
집과 회사를 반복하던 평범한 회사원, 맥주에 흠뻑 빠져 유럽의 맥주 성지로 떠나다!
맥주라고는 소주와 막걸리 중에 골라 마시는 술, 어쩌다 회식 자리에서 소주와 말아먹는 술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만큼 맥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평범한 회사원. 독일과 체코 여행에서 우연히 맛본 밀맥주를 계기로 구수하면서도 깊은 맥주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수도원에서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트라피스트의 매력으로까지 푹 빠지게 되면서 전 세계의 맥주 성지라 불리는 곳들을 탐방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직접 둘러본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중심으로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유명 브루어리와 펍을 총망라하였다. 오직 한 가지 최상의 맥주를 만드는 준데르트, 세계 최고의 맥주라 불리는 베스트블레테렌, 트라피스트의 여왕 오르발... 유럽 맥주의 최고봉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영감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현수
학저비라는 닉네임으로 5년째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여행을 테마로 했던 그의 블로그는 어느새 전 세계의 매력이 넘치는 맥주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국내외 양조장과 펍을 방문하여 생생한 후기를 남기고, 맥주 관련 행사를 다녀와 흥미로운 소식을 전하는 등 맥주 전도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직접 맥주 만들기도 시도해 보았지만, 여러 차례 실패한 뒤 결국 '돈을 벌어 남들이 만든 맛있는 맥주를 마시자' 라는 결론을 내리고 즐거운 맥주 덕후 생활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