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의 일생: 농장에서 펍까지 세계적 홉 생산지, 야키마 밸리
맥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야기할 때, 보통은 원재료를 사용해 양조하는 과정을 언급한다. 맥아를 파쇄해서 따뜻한 물에 담가 맥즙을 만들고, 이 맥즙을 끓이는 과정에서 홉을 넣고, 끓임 과정이 끝난 맥즙을 식힌 뒤 효모를 투여해 발효한다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러나 맥주의 재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모르는 것 투성이다. 맥아와 홉이 어떻게 재배되는지, 이후 어떤 가공을 거쳐 제품으로 탄생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쏠리지 않는다. 게다가 맥아의 경우 곡물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홉의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홉과 제품으로서의 홉은 상당히 다르다. 국내에서 홉은 대부분 펠릿(Pellets)이라고 불리는 형태로 판매되며, 오일 형태의 액체나 분말 형태로 판매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홉은 어떻게 재배되고 제품화될까? 미국 홉의 최대 산지인 야키마 밸리에 위치한 야키마 치프 홉스에서 8월 30일부터 9월 2일까지 4일간 열린 홉앤브루 스쿨(Hop&Brew School)에서 홉의 품종개량에서부터 재배, 제품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농장에서 양조장을 거쳐 한 잔의 맥주에 홉이 담기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해보자.
홉의 출발은 품종 개발에서부터
맥주의 기본 재료인 맥아, 홉, 효모, 물 중에서 홉은 맥주의 개성을 표현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재료로도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태동한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성장동력이 바로 홉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홉은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성장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크래프트 맥주를 대표하는 IPA를 살펴보면, 같은 스타일 안에서도 어떤 홉 품종을 사용하느냐, 맥주 양조 과정 중 어느 시점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홉의 향기도, 쓴맛도 크게 달라진다. 이러한 면에서 홉은 크래프트 맥주만의 정체성과 특징을 표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맥주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이 홉에 주목하는 것은 홉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홉을 이용해서 맥주와 해당 양조장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홉 생산자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소비자(맥주를 만드는 사람과 맥주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개성과 기호를 만족시킬 수 있는 홉 품종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홉의 품종개량은 최초에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쪽으로 진행되었으나, 맥주 시장에서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독특한 향기와 특성이 있는 품종을 개발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맥주의 재료인 홉은 삼나무과 덩굴식물의 암꽃으로, 현재 세계적으로는 300-400여 종의 홉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품종마다 특유의 향기가 있다. 홉이 이렇듯 다양해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은 아니다. 맥주에 사용되는 전통적인 홉 품종은 주로 유럽 지역에서 기원한다. 전통적인 홉 품종으로는 ‘노블 홉’으로 불리는 독일과 체코의 홉 품종을 비롯해 영국산 홉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미국 홉이다. 미국 홉은 크래프트 맥주와 함께 발전해 왔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홉 품종개량 기술의 발전이다.
11년, 500만분의 1
같은 품종의 홉이라 할지라도, 토질이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맛에 영향을 주는 각종 물질의 수치가 달라진다. 동일한 품종에는 동일한 특성이 있지만, 사용량과 방법적인 면에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품종에 환경적 변화를 주는 걸 두고 품종개량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품종개량이란 원하는 형질을 지닌 생물로부터 선별적으로 자손을 얻는 것을 말하며, 이 중 농작물의 수확량과 품질을 향상시키려고 하는 품종개량을 ‘육종’이라고 한다.
육종의 목적은 원하는 특성과 품질을 지닌 작물의 수확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유전자조작 역시 품종개발의 일환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홉의 경우 교접 등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한다. 일반적인 작물의 경작에서 수확량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병충해를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내성이 강한 품종을 개발하는 것이다. 또한 홉의 경우 병충해 외에도 향기와 맛 등 맥주의 맛을 좌우하는 요인을 충족시킬 품종을 개발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와 같은 품종개량은 결과적으로 맥주 양조사들의 창의성을 자극하고 맥주 맛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홉 품종이 개발되어 상업 생산에 이르기까지 최소 1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육종 프로그램의 첫 단계는 육종 계획에 따른 홉 품종 간 교잡을 통해 새로운 홉을 기르는 것이다. 2년 차가 되면, 첫 번째 선별작업을 통해 전체의 약10%가 선택된다. 이후 3~5년 차에서는 선택된 홉을 옮겨 심고 2차 선별작업을 진행한다. 이때 1차 선별분 중에서 약 1% 정도만 살아남는다.
6~8년 차에 접어들면 선택된 홉 품종을 조금 더 큰 규모로 재배하면서 3차 선별 작업을 진행한다. 이때 2차에서 선별된 것 중 약 2% 정도가 살아남는다. 9년 차로 접어들면 3차선별작업에서 선택된 홉은 상업화 가능 여부를 평가 받는다. 그리고 1% 이하의 홉이 최종적으로 상업화된다.
이렇게 상업 생산에 들어가 제품번호와 정식 이름을 얻는 홉종이 나타나기까지 대개 10년에서 1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홉은 다년생 덩굴 식물이지만, 1년에 한 번 꽃을 맺는다. 품종개발에서 제품화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초의 육종계획에서부터 여러 단계의 선별작업을 거쳐 최종적으로 상업화될 확률은 500만분의 1이다.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500만개의 교잡종 중 하나가 살아남아 이름을 얻고 상업 맥주에 사용되는 것이다. 길고 긴 시간과 수많은 실패 속에서 하나의 향기롭 고 빛나는 홉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홉 재배지의 입지조건
상업적으로 재배되는 홉은 광활한 홉 농장에서 재배된다. 상업적 재배를 위해서는 홉의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고, 품질이 좋아야 한다. 또한 홉 농장을 조성하려면 자본의 투입 역시 필요하다. 단순히 재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제품화하기 위해 홉재배의 환경적인 요건과 자본의 투입이 필요한 것이다. 그중에서 홉이 잘 자라는 환경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한 홉 농장의 입지 조건 중 위도, 겨울의 추위 정도, 지형, 토양, 바람, 물 등이 중요하다.
위도
홉의 재배에서 위도가 중요한 이유는 위도가 낮의 길이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홉은 대개 봄부터 여름을 지나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기 전 수확한다. 저위도 지역의 경우 낮과 밤의 길이 차이가 계절에 따라 큰 차이가 없지만, 고위도 지역은 낮과 밤의 길이 차이가 크다. 특히 여름에 낮의 길이가 매우 길어진다. 일조량은 홉 재배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홉을 상업 재배하는 대규모 재배지가 대개 북위(또는 남위) 35도에서 55도 사이의 지역에 위치하며, 이중 독일의 할러타우가 북위 48도, 미국의 야키마가 북위 46도 정도에 위치한다.
겨울의 추위 정도
홉은 다년생 덩굴식물로, 겨울에 접어들면 줄기가 생장하는 대신 뿌리를 발달시키는 휴면기로 접어든다. 그 기간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기에 뿌리의 발달은 다음 해에 더 많은 수확량으로 이어지는데, 겨울에 온도가 높을 경우 휴면으로 인한 뿌리의 발달이 불충분하거나 불규칙해질 수 있다.
지형
현재 대규모 상업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홉 재배지의 지형은 대체로 완만한 기복이 있는 곳이거나 평지다. 이러한 지역에서 재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언덕이 많고 굴곡이 심한 지형에 비해 토양의 균질성이나 배수 정도의 균일성이 높아 작물 재배 비용의 효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토양
홉은 생장에 있어 토양 입자의 점도나 굵기 등 토질의 영향을 적게 받는 편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벼운 질감의 수분이 없는 깊은 토양이 수분 공급에 이점이 있어, 이를 홉 재배에 최적의 토양으로 간주한다.
바람
홉은 덩굴식물의 꽃으로, 바람 때문에 피해를 받을 수 있다. 강한 바람이 부는 지역에서는 홉잎이나 홉 콘이 손상되는 등 수확량에 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며, 개화기에서 성숙기에 이르는 기간에 고온의 바람이 분다면 홉 품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
홉의 생장에는 많은 일조량이 필요함과 동시에 다량의 물 또한 필요하다. 홉의 뿌리는 수분의 흡수를 위해 토양 깊숙하게 뿌리가 생장하는 작물이기도 하다. 과거 유럽의 전통적인 홉 재배지들이 강과 인접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따라서 좋은 품질의 홉 수확량을 극대화하려면 원활한 수분 공급을 위한 관개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
높은 품질과 효율성을 위한 홉의 재배와 가공
홉은 많은 일조량이 필요한 덩굴식물이다. 홉을 심을 때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뿌리를 일렬로 심는다. 절대적인 일조량뿐만 아니라 햇볕을 잘 쬘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홉 덩굴이 타고 올라가 충분한 햇볕을 쬘 수 있도록 로프나 와이어를 설치해주면, 덩굴이 이를 타고 올라가 약 5m까지 자라게 된다. 여기에 열을 따라 관개시설을 두어 원활한 수분 공급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홉은 대체로 봄에 심고, 뜨거운 여름을 지나 8월 중순에서 10월초 사이에 수확한다. 맥주에 사용되는 홉은 홉 덩굴의 암꽃으로 홉 콘(Hop Cone)이라고 부른다. 재배되는 연도의 기후조건과 품종에 따라 수확 시기에 편차가 있지만, 대개 아로마 홉 품종이 알파산(쓴 맛을 내는 성분)이 많은 홉보다 수확 시기가 이른 편이다.
수확할 때는 홉이 달린 덩굴 전체를 자른다. 수확된 홉 덩굴에서 홉 콘을 분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제품 가공이 시작된다. 이 때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자동화 기계를 이용해 홉 콘이 덩굴에서 분리되고 나면, 한낮의 열기 속에 품질이 빠르게 저하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빠른 속도로 가공해야 한다. 따로 출하되는 물량을 제외하고, 홉 콘은 가공되지 않은 생 홉일 때 바로 건조장으로 옮겨진다. 건조장에서는 신선한 홉의 품질 저하를 최대한 막기 위해 분쇄 등을 거치지 않고 8.5-10.5%의 수분만 남도록 열풍으로 홉을 건조한 뒤 압착하여 포대에 담는다. 그리고 모든 포대는 샘플링을 통해 품질 검사를 받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건조 홉(Whole Leaf Hops)이 야키마 치프 홉스에서 생산하는 모든 제품의 기초가 된다. 건조 홉을 그대로 맥주 양조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여러 형태의 제품으로 재가공된다.
첫 번째는 맥주 양조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펠릿(Pellets) 형태의 제품인 T-90 펠릿이다. 펠릿은 리프 홉을 분쇄하여 압착한 것으로, 일관된 밀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진다. 펠릿의 장점은 리프홉보다 보존 기간이 길고, 공간을 덜 차지하며 양조 시 홉 성분을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홉 펠릿은 단일 품종으로 제작되는데, 야키마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경우 블렌딩한 홉을 이용해 만드는 펠릿도 있다.
두 번째는 아메리칸 노블 홉(AMERICAN NOBLE HOPS™)이다. 아메리칸 노블 홉은 홉 콘의 잎 부분을 극저온 분리 공법으로 분리해낸 것으로, 루풀린(Lupulin) 대부분이 제거되어 쓴맛이 거의 없는 제품이다. 이는 ‘노블 홉’으로 불리는 유럽 품종처럼 쓴맛이 적고 향기가 강조된 제품으로서, 필스너, 쾰쉬, 블론드 에일 등 전통적인 유럽 스타일 및 고제, 괴즈, 베를리너 바이세 등 신맛이 특징인 스타일에 쓰인다.
세 번째는 CRYO HOPS® 제품이다. 아메리칸 노블 홉과는 극저온 공법으로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아메리칸 노블 홉이 루플린을 제거해 쓴맛을 감소시킨 제품인 반면, CRYO HOPS®은 홉에 함유된 대부분의 성분을 정제한 루플린 분말을 사용함으로써 식물 특유의 풍미는 최소화하면서 홉의 풍미와 향기는 극대화한 것이다. 또한 정제된 분말 제품이므로, 양조 시 발생하는 결감량을 적게 해 효율성과 수익성의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네 번째는 홉 이산화탄소 추출물인데, 초임계 공법(supercritical CO2 extraction) 방식으로 T-90 펠릿을 통해 만든다. 이산화탄소는 섭씨 31.1도에서 73.8기압의 압력을 가하면 액체와 기체 상태를 구별할 수 없는 초임계 상태가 되며, 특정 성분을 추출하는데 좋은 용매가 된다. 이러한 이산화탄소는 독성이 없고 용매로서 추출 대상의 성분을 쉽게 추출하고 분리할 수 있어 식품 분야에서 널리 이용된다. 이 공법을 이용해 T-90 펠릿의 홉 성분을 추출한 것이 홉의 이산화탄소 추출물(SINGLE VARIETAL CO2 HOP EXTRACT)이다. 이 제품은 홉 수지의 추출물로, 45%~65%의 알파 산(α-acid)과 15%~35%의 베타 산(β-acid), 홉 오일 등 맥주의 맛과 향기로 표현되는 핵심적인 홉 성분을 함유한다. 모든 종류의 홉 품종으로 생산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알파산수치가 높은 품종으로 만든다.
이렇게 생산된 홉과 홉 제품은 양조장과 브루어의 손에 전달된다. 양조장과 브루어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맥주의 스타일과 의도에 따라 적합한 홉 제품을 구매하고, 이를 사용해 맥주를 양조한다. 홉 수확이 한창인 시기에는 가공되지 않은 생 홉(Fresh Hops)으로 맥주를 양조하기도 하며, 특정 목적을 위해 고도화되고 정제된 제품을 구입하기도 한다. 기존의 홉 제품 생산자들이 제품의 개발과 생산에 치중했다면, 지금은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자체 블렌드 제품을 출시해 목적에 맞는 제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거나, 양조장의 비용 절감과 생산 효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만한 제품들을 선보인다. 이러한 능동적인 변화는 홉을 경작하고 제품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맥주 시장과 맥주 양조를 이해하기에 가능하다. 단순히 생산과 판매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양조장 운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양조장과 양조사의 개성, 홉 농장과 회사의 고민. 그리고 이들 모두의 노력으로 맥주 한 잔이 우리 앞에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