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 브루어리 크롤링
세계에서 인구당 가장 많은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있는 도시는 어디일까? 뮌헨? 뉴욕? 도쿄? 아니다. 정답은 포틀랜드이다. 미국 오리건 주에 위치한 포틀랜드는 인구 60여만의 작은 도시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만 무려 90여개의 브루어리가 있다면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참고로 한국에는 80여개의 브루어리가 있다.) 힙스터, 킨포크, 자전거, 나이키 등 포틀랜드를 수식하는 단어는 다양하다. 그러나 맥덕에게 포틀랜드는 크래프트 맥주의 성지로서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으로 추앙받고 있다.
포틀랜드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것. 그리고 과연 무엇이 이 도시를 크래프트 맥주의 메카로 유명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오로지 포틀랜드에서 맥주를 마시겠다는 일념 하나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 질렀다.
포틀랜드 브루어리 크롤링 시작
포틀랜드에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1984년이다. 그 이전까지 소규모 맥주 양조, 판매, 유통에 엄격했던 오리건주의 규제가 한꺼번에 풀리기 시작하면서 브루어리가 우수수 생겨났다. 이는 우수한 자연환경과 퀄리티는 높지만 화려하지 않고 개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포틀랜디안들의 의식에 힘입은 결과였다.
본격적인 포틀랜드 맥덕 기행을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먼저 구글맵에 접속했다. 숙소가 위치한 차이나타운에서 멀지 않은 펄 디스트릭트(Pearl district)부터 크롤링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지역에는 10 배럴 브루잉(10 Barrel Brewing), 데슈츠 브루어리(Deschutes Brewery), 로그 브루어리(Rogue Brewery)와 같이 맛있고 신선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브루어리가 우리네 분식집처럼 골목마다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곳은 10 배럴 브루잉이다. 포틀랜드에 오기 전 소개 받은 현지 지인이 “도심부에서 가장 맥주를 즐겁게 마실 수 있는 곳”이라며 추천을 했었다. 이는 역시나 옳은 말이었다. 평일 낮인데도 홀과 루프탑을 가득 채운 맥덕들의 뜨거운 열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랜 기차 이동으로 제대로된 음식을 하루 종일 먹지 못해 포만감을 주는 식사와 맥주를 양껏 먹고 싶었다.
에게 추천 받은 푸드 페어링은 후무스(Hummus)와 브라운 에일 (Brown ale). 고작 맥주 한 잔은 부족하다고 느낀 나는 서버의 제안을 뿌리치고 과감히 샘플러 10종을 주문했다. 로컬에서 나는 신선한 식재료를 활용해서 음식을 만든다는 서버의 자랑이 결코 허황되지 않은 듯 고소한 후무스가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매콤하게 양념 된 감자 슬라이스, 다양한 맥주를 함께 곁들이니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면서 그 맛에 감탄했다. 양도 많고, 가격도 저렴해서 정말 흡족했다.
여세를 몰아 방문한 곳은 베일리스 탭룸(Bailey’s taproom). 이 곳 은 오리건과 워싱턴 주에서 맥주 좀 만든다고 소문난 브루어리를 엄선하여 탭 리스트를 구성하고 있다. 바에 앉아 어떤 맥주를 마실지 골똘히 고민하고 있으니 “원하는 맥주를 테이스팅 시켜 주겠다”고 한다. 다양하고 독특한 맥주가 넘쳐나는 도시라서 그런지 고객의 선택을 돕기 위하여 테이스팅을 자유롭게 권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아이콘, 크래프트 맥주
포틀랜드의 많은 브루어리들이 평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해피타임을 운영한다. 그 날 그 날 정해진 탭을 15~20% 할인가로 판매하기 때문에 맥덕이라면 이 시간을 알차게 활용해야 한다. 1984년 생겨나 포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브루어리인 브릿지포트 브루잉(Bridgeport brewing)에서 이튿날을 시작했다. 꽤 오래된 브루어리답게 페일 에일, IPA, 포터 같은 일반적인 스타일의 맥주가 대부분이었고, 그 맛은 준수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하얀 수염을 기르 고 후덕한 풍채를 자랑하는 아저씨들이었는데, 마치 단골 노포를 들리듯 서버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맥주를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크래프트 맥주가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 아이콘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포틀랜드는 자전거의 도시답게 도심 곳곳에 공유 자전거가 넘쳐난다. 포틀랜드에 본사를 둔 나이키가 이 도시의 공유 자전거 시설을 도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덕분에 뚜벅이 여행자들은 1달러도 안되는 값싼 비용으로 브루어리를 돌아다닐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상쾌한 바람을 가로지르며, 북동부 지역(Northeastern Portland)의 이클립틱 브루잉(Ecliptic brewing)을 찾아갔다. 여러 브루어리를 돌아다닐 예정이라 많은 맥주를 시킬 수는 없어서 브루펍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 세종(Saison)을 주문했다. 일본산 유자와 벨지안 효모를 사용해서 그런지 과일 주스를 마시는 것처럼 상큼했다. 깔끔하게 한 잔을 비우고 내친김에 근처에 위치한 엑스노보 브루잉(Ex novo brewing), 캐스케이드 브루잉(Cascade brewing)을 방문했다. 그 중에서 압권은 시큼한 사워 맥주로 유명한 캐스케이드 브루잉이었다. 한국에서는 감히 비싸서 사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 캐스케이드 맥주가 드래프트로 20여 종류나 있었고, 잔당 3~8달러로 판매되고 있었다. 나는 사워 맥주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2온즈(oz)로 여러 잔을 시켜 먹었는데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맛과 향에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질만큼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든 맥주를 맛보고 싶어서 염치 불고하고 테이스팅을 요청했으나 “캐스케이드 맥주는 원체 비싼 재료를 사용해서 오랫동안 빚어낸 맥주이기 때문에 무료로 드리기는 어렵다”고 한다. 한국에서 맛보기 어려운 맥주인만큼 캐스케이드는 몇 번 더 방문할 가치가 있지 싶어서, 여행 기간 동안 두 번이나 더 방문했다.
포틀랜디안에게 맥주는 어떤 의미일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매튜 후버는 나이키 본사에 근무하는 직원인데, 포틀랜드에 거주한지는 3년이 되었다고 한다. 브루어리 투어가 취미인 그의 안내를 받아 그레이트 노션 브루잉(Great notion brewing)을 찾아갔다. 그레이트 노션은 블루베리 머핀 사워(Blueberry muffin sour), 홉 와플 에일(Hop waffle ale)처럼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명으로 유명하다. 매튜는 “처음 블루베리머핀, 와플 같은 이름을 들었을 때는 코웃음을 쳤다”면서 “마시고 난 뒤 진짜 블루베리 머핀을 먹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강력히 이 곳을 추천했다. 설마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몇 잔을 마셨는데, 목구멍 깊숙히 달달한 블루베리 머핀 맛이 번져나갔고 기분 좋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 반응을 본 매튜는 “거봐, 내가 뭐라고 했냐”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소개 시켜주고 싶은 곳이 더 있다는 매튜를 따라 방문한 브레이크사이드 브루잉(Breakside brewing)은 IPA가 일품이었다. 오리건 주에서 재배되는 홉을 다양하게 배합하여 만들어내는 IPA를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천혜의 자연환경이 선사해준 맛있는 크래프트 맥주를 매일 같이 마실 수 있는 포틀랜디안들이 너무나 부러워졌다.
그 외에도 여행 기간 동안 나는 포틀랜드에서 헤어 오브 더 독 브루잉(Hair of the dog brewing), 배어릭 브루잉(Baerlic brewing),롬폭 브루잉(Lompoc brewing) 등을 방문했는데, 하나같이 깔끔하고 독특하며 맛있는 맥주를 직접 양조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정성껏 테이스팅을 도와주고, 전문적인 설명을 들려주는 서버들의 친절한 태도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포틀랜디안에게 크래프트 맥주란 어떤 의미일까. 저마다 많은 대답이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도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기이(Weird)하고 독특한 분위기처럼 포틀랜드의 맥주에서는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와 해방감이 느껴졌다. 헤어 오브 더 독 브루잉에서 만난 한 브루어는 “우리 맥주는 좀처럼 미국 내 다른 주나 해외 판매를 하지 않는다”면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미션은 품질 좋은 로컬 재료로 상상력 풍부한 맥주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로 포틀랜디안과 그들이 빚고자 하는 맥주 철학을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포틀랜드 브루어리 크롤링 팁
맥주로 유명한 도시답게 브루어리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 중 이색적인 것은 브루사이클(Brewcycle). 열댓 명이 한꺼번에 탈 수 있는 자전거로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브루어리를 순례하는 투어 프로그램이다. 어떤 브루어리를 방문해야 할지 잘 모르는 초보자들에게 적합하다. 이 외에도 브루버스(Brewbus)나수륙 차량을 타고 윌래밋 강을 도는 브루바지(Brewbarge) 같은 재미난 투어 프로그램이 많으니 잘 활용하여 포틀랜드의 브루어리를 더욱 알차게 즐겨보자.
EDITOR_오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