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를 경험하는 참신한 루트(route), 브루펍 ‘크래프트 루트(root)’
강원도 속초시 노학동. 콘도와 리조트들이 자리잡은 가운데 드문드문 순두부집들이 늘어선 이 곳에 2800평(약 9260m2)에 이르는 대지가 펼쳐져 있다. 넓은 대지 위에는 원통을 몇 개 붙여놓은 것처럼 생긴 단층 건물이 서 있다. 요즘 보기 드문 모양의 30년된 건물이다. 외부 곳곳에 칠이 벗겨지고 색이 바랬다. 가까이 가 보면 건물 앞쪽에 ‘CRAFT ROOT’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공간의 절반 가량에는 시원하게 트인 홀이 마련돼 있고 나머지 반에는 양조 장비들이 들어차 있다. 천장에는 오래된 자재들이 그대로 노출돼 있고 바닥에는 무릎 높이까지 오는 호박돌(건물의 기초로 삼기도 하고 골재로 쓰기도 하는 둥근 모양의 돌)이 놓여 지난 시간과 자연을 보여준다. 반면 맥주 탭이 있는 바와 양조 장비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모던함을 뽐낸다.
지난해 말부터 자체 맥주를 내놓은 크래프트 루트의 모습이다. 김정현 크래프트 루트 대표는 “세월의 흔적을 없애고 싶지 않아 가능하면 30년 전 모습을 인테리어에 활용하려고 했다”며 “자연과 첨단의 조화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강원도 속초는 설악산과 대포항, 영금정, 속초해수욕장 등 천혜의 환경으로 관광객을 유혹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어느 새 크래프트 루트는 또 하나의 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한치의 모자람도 허용하지 않는다
크래프트 루트는 서울 익선동의 한옥 펍 ‘크래프트 루(Craft Roo)’에서 시작됐다. 건축 디자인 회사에 다니던 김정현 대표는 한옥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 또 그는 홈브루잉을 하면서 맥주에 대한 애정을 키워오고 있었다. 김 대표는 한옥과 맥주라는 이 두 키워드를 한 데 모아 2016년 4월 크래프트 루를 열었다.
크래프트 루는 익선동에 새로운 상권을 만들 정도로 ‘대박’이 났다. 김 대표는 “처음에는 펍보다 양조장을 먼저 생각했는데 소비자와 직접 만나야 사업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순서를 바꿨다”며 “펍이 잘 풀리면서 자신감을 갖고 브루어리에 도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익선동의 크래프트 루는 ‘누각에서 따온 이름이고 크래프트 루트는 크래프트 루의 뿌리가 되어 줄 곳이라는 의미다.
작년 12월 크래프트 루트에서 판매할 첫 맥주가 나왔다. 장비를들여놓고 맥주를 만든 지 3개월만의 일이다. 그 동안 10번 양조한 맥주(10배치)를 폐기했다. 김정현 대표는 “양조 장비와 궁합을 맞춰가는 시간이었다”며 “10톤에 해당하는 맥주를 버리면서 손해가 적지 않았지만 절대 낮은 수준 맥주 내놓고 싶지 않았다”
고 강조했다. 크래프트 루를 운영하면서 까다로운 맥주 관리로 업계에서 ‘원망 아닌 원망’을 받았던 그답다. 공급받은 맥주가 완벽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매상이나 브루어리에 연락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브루어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너도 한번 당해봐라’라는 말을 들었다”며 웃었다.
크래프트 루트에서 양조하고 있는 맥주는 총 5종. IPA 두 종과 스타우트, 페일 에일, 윗 비어 등 기본이 되는 스타일이다. 마셔보니 멋 내지 않고 각 스타일에 충실한 맥주여서 오히려 더 매력이 느껴졌다. 김 대표는 “맥주는 어려운 술이 아니고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술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면에서 음용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맥주를 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루트는 ‘속초’의 양조장
이런 생각에는 속초 지역 사회와 상생하려면 지역 주민이 즐기는 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녹아 있다. 크래프트 맥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중성 있는 맥주를 먼저 소개하겠다는 것이다.
고향이 속초인 김정현 대표는 “속초의 지역 맥주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먼저 맥주 이름과 패키지에 지역성을 담았다. 속초 IPA, 대포항 스타우트, 동명항 페일 에일, 아바이 윗 비어 등이다. 또 속초 곳곳의 사진을 찍은 다음 일러스트 디자인을 의뢰해 패키지 라벨에 담았다.
음식에서도 속초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문어 숙회 샐러드, 해산물 뚝배기 스튜, 먹태 감자칩 칠리 소스 그라탕, 오징어 먹물 리조또 등 속초산 해산물을 활용한 음식을 심혈을 기울여 개발했다.
그는 “속초의 먹거리를 키울 수 있는 단초가 맥주에 있다고 보고 있다”면서 “예를 들어 속초 중앙시장의 닭강정을 맥주와 페어링 하면 맥주와 속초 음식이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크래프트 루트의 맥주가 속초의 새로운 관광 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지역자치단체와 축제를 비롯한 여러 행사를 기획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맥주는 사람이 만든다
크래프트 루트의 또 다른 한 축은 바로 ‘맨파워’다. 김정현 대표를 비롯해 회사 구성원들이 대부분 되멘스 비어 소믈리에 자격을 갖고 있다.
특히 크래프트 루트의 맥주 레시피를 완성한 박진수(Kayson Park) 헤드 브루어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맥주에 빠져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와인 및 맥주 양조 교육의 명문 나이아가라 칼리지에서 맥주를 전공했다.
박진수 헤드 브루어는 현지에서 열린 맥주 대회에서 한국산 오미자를 넣은 맥주로 우승을 차지해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와 함께 세계 최고 비어 소믈리에를 뽑는 ‘비어 소믈리에 월드 챔피언십(World Championship of Beer Sommeliers)’에 한국 대표로 출전했던 최훈진 브루어도 크래프트 루트에 합류해 맥주 맛에 힘을 보태고 있다. 또 브루어리와 펍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윤수구 부장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비어 소믈리에 교육을 받은 120명 중 최고 득점으로 비어 소믈리에 자격을 획득한 실력자다.
김정현 대표는 “올해는 브루어리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지역과 상생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것이 목표”라며 “지역에서 사랑받는 맥주가 되어야 외지에서도 사랑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DITOR_황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