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트 맥주를 그리다- 시각 디자이너 조예림 인터뷰
맥주는 맛있으면 장땡이지만, 맛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맥주를 맛보기
전에 먼저 마주하는 것은 맥주의 이미지다. 잘 만들어진 로고나 라벨은 시선과 흥미를 끌고 맥주의 캐릭터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맥주 디자인은 마치 맥주에 옷을 입히듯 브랜딩하고 스타일링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다양한 맛과 개성이 특징인 크래프트 맥주는 일반 맥주보다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넓다. 그렇다면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도 크래프트 맥주를 전문적으로 디자인하는 사람이 있을까?
알음알음 밟아온 맥주 디자인의 길
이태원 펍 사계의 아르바이트로 크래프트 맥주 세계에 발을 들인 조예림씨는 미켈러 바, 어메이징 브루잉, 사워 퐁당, 미스터리 브루잉 등 국내 유수의 양조장과 펍에서 비어 서버(Beer Server)로 일하는 동시에 맥주 라벨, 포스터, 공간 등 다양한 디자인 작업을 해왔다. 국내에서 첫 번째로 치러진 BJCP 시험에 합격한 예민한 미각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맛에서 출발하는 맥주 디자인
“언젠가 펍에 가서 아이리쉬 레드 스타일의 킬케니를 마신 적이 있어요. 그곳 매니저님이 킬케니를 주면서 한 말이 생각나요. ‘이 맥주를 마시면 따뜻한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기분’이라고요.”
물론 맥주를 디자인할 때 의뢰인의 설명이나 스토리도 밑바탕이 되지만, 맥주의 맛도 중요한 영감을 준다. 맥주를 마시고 나서 연상되는 분위기나 감정 등 누구나 느끼는 바를 시각화하는 것이다.
“마시고 나면 이미지가 팍 떠오르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맥주는 마시면 갖가지 허브가 피어있는 들판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또 어떤 맥주는 마신 뒤 아주 도전적이고 거친 여자가 지프차를 타고 달리는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죠. 아니면 하얀색 모자를 쓴 소년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맥주도 있고요.”
그는 처음 맥주 포스터로 만들었던 히든트랙 브루잉의 ‘유어복'을 회상했다. “봄에 출시된 복(Bock) 스타일 맥주였는데, 달달하면서도 플로럴(floral)한 향이 났거든요. 그 느낌을 주려고 꽃을 배치하고, 스타일에서 전반적으로 떠오르는 색깔로 표현했어요.”
국내에서 인상적으로 느낀 맥주 디자인을 묻자, 그는 맥파이 브루잉, 테트라포드 브루잉, 그리고 탭하우스이자 보틀샵인 크래프트 브로스의 디자인을 좋게 평가했다. 다른 한편 미켈러, 밸러스트 포인트, 옴니폴로 등 아티스트가 맥주 브랜드를 책임지고 담당하는 해외의 사례를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미국에 있는 밸러스트 포인트 펍에 갔었는데, 작가가 스케치한 그림을 액자에 끼워서 전시해놓은 걸 봤어요. 미켈러도 작가의 그림스타일대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었잖아요. 그런 게 좋아 보이죠.”
한편으로 디자인만 예뻐서는 맥주가 잘 팔릴 수 없다. 일회성이라면 몰라도, 꾸준히 잘 팔리려면 맥주 자체가 맛있어야 한다. “디자인은 부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요. 물론 좋은 방법이 될 순 있지만, 우리나라 크래프트 맥주 씬이 내실을 다지고 잘 성장하는게 핵심이죠.”
크래프트 맥주의 대중화를 꿈꾸며
“크래프트 맥주가 아직은 진입장벽이 높다고 생각해요. 아직 맥주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요. 굳이 디자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육이 될 수도 있고, 맥주 축제나 대회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책을 낼 수도 있겠죠.”
조예림 씨는 크래프트 맥주 씬을 크게 넓혀서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 방법으로 맥주를 잘 모르는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특히 수많은 종류의 맥주를 접할 기회가 일상적으로 제공되는 ‘마트’라는 공간을 눈여겨 봤다.
“일반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 가장 효과적인 공간이 마트라고 생각해요. 가장 쉽게 많은 크래프트 맥주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예를 들어 판매되는 맥주에 관한 얇은 안내 책자 등을 만들어서 비치해놓으면, 소비자가 그걸 보면서 ‘이런 맥주는 그래서 이런 맛이 나는구나. 다음에는 다른 것도 먹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그는 현재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구체적인 생각을 구축하는 단계이며, 아직은 희미하지만 어떤 형태가 되든 일반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맥주 관련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단지 맥주를 좋아한다고 해서 관련 일을 하는 것은 조금 우려스럽다고 조예림 씨는 말한다. 맥주가 좋아서 맥줏집에서 일을 해보니, 막상 생각했던 것과 달라 실망하거나 지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맥주를 즐기면서 애정이 커진다면, 다시 말해 맥주를 통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생긴다면, 그땐 일에 뛰어들어도 잘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명확하게 정하고 그걸 꾸준히 상기시켜가며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도 했다. “일에 파묻혀서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 잊을 수도 있고, 섣불리 일했다가 좋아하는 것에 질려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건 좋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그는 아주 중요한 조언을 덧붙였다.
“이 일을 하면 살이 쪄요. 제 주위 사람들도 그랬고, 저도 15킬로나 쪘어요. 각오하고 시작하시면 좋겠어요.”
EDITOR_홍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