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주세요, 당장" 영국 맥덕의 한국 맥주생활 이야기
여러분 안녕하세요? 한국 크래프트 맥주계에 대한 저의 견해가 궁금하시다면 잘 오셨습니다. 까마득히 먼 옛날 이야기같지만, 일단 처음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국을 떠나 인천공항에 도착했던 2011년 3월 1일은 작게는 제 생애 첫 아시아 여행의 시작이었고, 크게는 자신에 대한 도전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한국어라고는 가나다도 모르고,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문외한인 제가 인천 북서쪽 어딘가에서 유치원생들과 초등학생들에게 12개월간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기 때문이죠.
한국에 오기 전 저는 세계시간의 기준이자 Meantime Brewing의 고향, 런던 그리니치에 살았었습니다. 아직 맥덕의 길에 들어서기 전이었죠. 2010년 벨기에 브뤼헤를 가 보기는 했지만 트라피스트 맥주에 대한 지식도 띄엄띄엄 아는 정도였고, 한국에 와서도 처음엔 딱히 맥주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중간 중간 끊어져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첫 1년간은 가끔 주말에 이태원에 놀러 갈 때 크래프트웍스에서 마시는 맥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카스 레드를 달고 살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180도 바뀌었지만. 한국에서 1년을 보내고 2012년에 브뤼헤를 재방문 했을 당시에 저는 막 트라피스트 맥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이 때 처음 트라피스트 로슈포트 10을 마셔봤죠. 그렇게 복잡한 풍미와 고도수의 맥주에 대해 알게 되고 나서 제 세계관이 뒤집혔습니다. 브뤼헤에서 트라피스트 맥주 한 병의 가격은 2-3 유로 정도입니다. 가성비 좋은 데이트 장소로는 최고에요.
휴가가 끝나고 나서 저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전라남도 고흥에 있는 과역이라는 시골마을로 내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지역 4개의 공립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기회가 주어졌고, 덥석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한국 시골은 (상상이 가시겠지만) 서울이나 부산의 크래프트 맥주 씬과는 극과 극이죠. 그래도 전라남도에서 2년간 지내는 동안 광주, 순천, 서울을 돌며 틈만 나면 맥주를 마셨습니다.
전라남도에서 저는 크리스 엔라이트라는 미국 친구를 만나 금방 친해졌습니다. 사진 보이시죠? 송도에서 맥주 마시면서 찍은 사진이에요. 네, 고백하자면 맥덕력으로 맺어진 우정입니다. 왕좌의 게임 대사를 잠깐 빌리자면 “술 마셨죠.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니까.” 페어로 맥주를 마시러 다니다 보니 한국에서 좀 알려지기 시작하더군요.
한국 맥주 여정에서 기억에 남는 것을 꼽자면 Great Korean Beer Festivals를 빼 놓을 수 없겠죠. 맛있는 맥주가 많은 것도 있지만 GKBF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한국 브루어가 만든 맥주뿐 아니라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 브루어가 만든 맥주도 맛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누구 한 사람을 딱 집어서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요즘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질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만드는 김에 벨기에 쿼드도 좀 만들어 주세요… 배럴숙성 쿼드가 뜰 수도 있잖아요.
2016년 11월부터 송도에 살고 있는데, 2015년부터 종종 와 보기는 했지만 정작 살게 되고 보니 정말 느낌이 다릅니다. 지금은 문 밖으로 나가면 Bottle Shop B#, Playground Brewing, Amazing Brewery, Cinder Bar, 그리고 Big brewery가 있고 대형 슈퍼마켓에 가면 맛있는 맥주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행복합니다. 2011년에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한국 크래프트 맥주계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경리단길 같은 핫플레이스는 2014~2015년 정도에이미 정점을 찍은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크래프트 브루펍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으니 희망적이긴 합니다. Nicky’s 바틀샵에서 맥주계의 대부 윌리엄 밀러와 수다를 떨던 수많은 주말이 기억나네요. 윌리엄 밀러는 바비큐에도 프로지만 맥주 레시피 만들어 내는 데에는 가히 초능력자인 것 같습니다. 윌리엄 밀러 얘기하다 보니 미켈러가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죠. 이 덴마크 친구를 저는 2015년에 만났습니다. 제 또 다른 덴마크 친구 Jens Christian Ring은 수 개월째 비어포스트에 기고하고 있는데 이 친구는 서울 맥주 축제에서 한 일 년 전에 만났고요. 제가 아는 한 최상급 레벨의 맥덕입니다.
제 한국 생활에 언제 마침표를 찍을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올해 내로 아예 떠날 수도 있고, 영국에서 몇 달 정도 쉬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요. 숀코너리가 그랬던가요, 절대로 절대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송도에서의 생활은 정말 즐거웠지만 다들 그러잖아요. 아쉬울 때 떠나라고. 그렇게 말하기엔 한 삼 년 전에 떠났어야 됐을 지도 모르지만요. 어찌 됐든 일단 한 잔하죠. 심심하면 놀러오세요, www.facebook.com/realbeergeeks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