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잃은 크래프트 맥주 규제
한국의 크래프트 맥주 산업은 외형적으로 급변하고 있다. 1년새 10여개의 브루어리가 새로 생겼다. 크래프트 맥주를 다루는 매장이 크게 늘어난 데다 마트, 편의점에서도 크래프트 맥주를 예전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또 대통령이 마신 크래프트 맥주가 ‘대박’이 나기도 했다. 크래프트 맥주 업계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산 크래프트 맥주 업계의 실상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업계에서는 2017년 말 기준 국내 크래프트 맥주 시장 규모를 400억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대기업 3사를 제외한 국내 브루어리들의 매출을 합한 것이다. 이는 전체 국내 맥주 시장 4조 7300억원의 0.8%에 머무는 수준이다.
성장률로만 보면 국내 생산 크래프트 맥주는 2016년 대비 35%가 커진 것으로 집계되지만 아직 ‘산업’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모양새를 갖췄다고 하기 어렵다.
국내 크래프트 브루어리들은 72%에 이르는 주류 중 최고 수준의 주세에 교육세와 부가세 부담까지 안고 있다. 특히나 생산 원가를 과세 표준으로 하는 체계 때문에 판매관리비, 인건비, 임대료에까지 과세가 된다. 여기에 생산, 유통 관련 각종 규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부분 크래프트 맥주 생산 기업들이 중소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상황 속에서 맥주 본연의 맛에 집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비어포스트는 2018년 새해를 맞아 국내 크래프트 맥주 현황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윤정훈 플래티넘 맥주 부사장, 김정하 브로이하우스 바네하임 대표, 김재현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 이사와 맥주를 나누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무의미한 유량계
이 자리에서는 먼저 크래프트 맥주 관련 실효성이 없거나 과도한 규제가 도마에 올랐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적폐’로 맥주 제조 탱크에 달아 맥주의 양을 체크하는 ‘유량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지난 2002년 소규모 맥주 면허가 도입된 이래 국세청은 소규모 맥주 제조자들이 탱크에 유량계를 부착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맥주 생산량을 파악해 과세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유량계는 애초 주류를 위한 장비가 아니기 때문에 맥주의 생산량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맥주의 탄산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거품까지도 유량으로 체크하게 되고 양조 장비를 세척할 때 사용되는 물과 화학약품 등도 유량계를 거치면서 숫자로 카운팅 된다.
여기에 유량계 시스템의 허점도 만만치 않다. 탱크 바깥에서 내부로 물을 흘려 보내면 유량계 숫자를 반대로 돌리는 것이 가능하다. 브루어리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유량계의 전원을 내려 유량계 가동을 멈출 수도 있다.
특히 관계 당국의 관리 소홀도 지적된다. 유량계를 납으로 봉인을 해서 브루어리에서는 손대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봉인을 풀 수 있는 장비를 브루어리에 준 사례도 있다. 소규모 맥주 양조장에 유량계 시스템은 짐만 된다. 정확하지도 않은 수치를 매일 자료로 남겨야 하며 1년에 한번 50만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 유량계 검정을 받아야 한다.
유량계를 통한 생산량이 실질적으로 세금 부과의 근거 데이터로 활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업계와 당국이 모두 인지하고 있지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15년째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크래프트 맥주에 대한 실질적인 과세는 포스에 기록된 판매량을 기준으로 한다.
윤정훈 플래티넘 맥주 부사장은 “전 세계적으로 유량계로 맥주 생산량을 체크해 과세하는 국가는 없다. 유량계는 주유소에서나 쓰는 것이다. 맥주 업계에서 유량계는 과학적이지도 않고 쓸모도 없다”고 말했다.
과도한 패키지 규제
이와 함께 잦은 식품 정보 표시 사항 개정도 크래프트 맥주 업계에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제도가 바뀌어 2018년 1월 1일 생산 맥주부터는 캔이나 병에 식품 정보 표시 사항 내용과 폰트 등이 조정된다. 이 때문에 기존 제작해뒀던 병이나 캔은 사용할 수가 없다. 실제 플래티넘의 경우 7만개에 이르는 사전 제작 캔을 당장 내년부터는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규제에 대한 해석도 들쭉날쭉해 업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김정하 브로이하우스 바네하임 대표는 “몇 달 전 케그에 납세필증등을 표시하는 라벨을 반드시 부착해야 하는지 당국에 질의를 했더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나 최근 케그에 무조건 납세필증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내려왔다”며 “불과 몇 달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김재현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 이사는 “맥주를 크라울러1)에 담아 판매할 때 용기 검증을 받고 납세필증을 캔 아래 쪽에 부착한 적이 있었다”며 “이에 대해 캔 위 쪽에 붙이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고객이 브루어리에 그라울러 등 용기를 가져와서 맥주를 담아 갈 경우에도 용기에 라벨을 붙여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업계에서는 “다양한 용기에 맞는 라벨을 하나하나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며 “패키지에 대한 규제가 과도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부의 규제가 많아질수록 맥주의 원가가 올라가게 된다. 크래프트 맥주의 원가에 대해 세금이 부과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맥주 가격 상승 요인이 된다. 결국 소비자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동시에 맥주를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소비자의 권리가 침해된다는 것이 업계 안팎의 지적이다.
성장을 저해하는 소규모 양조장 시설 제한
맥주 제조를 포함한 모든 제조 산업은 생산량이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야 이익을 낼 수 있다. 초기 브루어리 설립 비용이나 인건비, 재료비 등이 거의 고정돼 있는 상황에서 양조를 많이 할수록 이득의 폭이 커지는 상황이다. 또 맥주 생산량이 많을수록 원부재료 구매 협상에서도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소규모 맥주 제조 면허의 용량 제한 아래서는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 어렵다. 현행제도 아래에서는 75k리터가 상한선이며 120k리터로 상한선을 올리는 제도 개선이 진행되고 있다. 윤정훈 부사장은 “에일 맥주를 기준으로 할 때 120k리터 시설에서 연간 생산할 수 있는 최대 맥주 양은 200만리터 정도로 추정된다”며 “이 정도 생산량으로는 브루어리가 장기 성장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기업에 대해 규제를 해 구조적으로 돈을 못 벌게 만들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김재현 이사는 “현재 주세 구조에서 돈을 버는 브루어리는 서너 곳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매번 ‘우는 애 젖 물리는’ 식으로 용량 제한이나 규제를 조금씩 풀다 보니 규제가 방향을 잃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큰 틀에서 산업에 대해 고민하고 정책의 방향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업계 분열 조장하는 맥주 제조자 면허 분리
이렇게 크래프트 맥주 업계를 옥죄는 규제가 많은 상황에서 업계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원인은 맥주 제조 면허가 두 가지로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두 면허의 과세표준과 세율이 다르다 보니 이해 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맥주 제조자 면허는 장비 규모에 따라 일반 맥주 제조자 면허와 소규모 맥주 제조자 면허로 나뉜다. 소규모 맥주 제조자 면허는 75k리터까지(120k리터로 개정 진행중)로 생산 용량별로 과세표준 경감을 받을 수 있다. 현재 국내 크래프트 맥주 업계는 대부분 소규모 맥주 제조자 면허를 받아 맥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세븐브로이, 코리아크래프트브루어리, 제주맥주, 플래티넘, 장앤크래프트등이 일반 맥주 제조자 면허를 갖고 있다.
소규모 면허를 받은 브루어리들은 과세표준 감면을 받지만 일반 면허 브루어리들은 이런 혜택이 상대적으로 작다. 이런 현실 때문에 일반 면허를 받은 브루어리들이 추가로 소규모 면허를 취득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또 일반 면허의 경우 과세표준이 맥주 출고가로 돼 있고 소규모 면허는 생산 원가다.
이런 면허의 분리가 업계를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동시에 일반 면허를 갖고 있는 중형 브루어리에 과도한 세금이 매겨져 자리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한다. 소규모 브루어리가 중형 브루어리로 성장해 나가는 데도 걸림돌이 된다.
김재현 이사는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 시장은 우리나라의 중형 브루어리에 비유할 수 있는 시에라 네바다와 사무엘 아담스가 시동을 잘 걸어줘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며 “업계를 리드하는 업체들이 길을 만들어주고 작은 브루어리들이 따라가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중형 브루어리들도 주세의 벽에 막혀 있다 보니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정하 대표 역시 “국내 크래프트 맥주 산업이 발전하려면 중형 브루어리가 많이 생겨 시장이 커져야 한다”며 “지금 중형 브루어리들은 정부의 세금 폭탄을 피해 소규모 면허를 받고 있다. 중형 브루어리들도 상황이 빠듯하다 보니 궁여지책으로 소규모 면허를 받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이해 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소규모 면허 브루어리와 일반 면허 브루어리의 의견을 조율해 제도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협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브루어리 관계자가 아닌 제3자가 업계의 의견을 조율하고 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이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일본의 경우에도 브루어리 협회장을 업계 관계자가 아닌 중립적인 인사가 맡고 있다.
주세 부과 이렇게 할 수밖에 없나
윤정훈 부사장은 “대한민국 맥주 회사들의 자본을 고려할 때 하이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맥주는 수입 맥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트의 점유율이 35%라고 하면 나머지 65%는 외국에서 돈을 벌어간다. 로컬 크래프트 브루어리들은 아직은 점유율이 미미하지만 한국 맥주 시장을 지키는 중소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정부에서 규제보다는 진흥의 시각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층층이 쌓인 규제와 불평등의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희망이 녹아 있었다. 김재현 이사는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커지고 소비자들이 찾는 것을 보면서 규제가 많긴 해도 그 안에 희망이 있는 것 같다. 규제도 난공불락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면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3~4년 간 홉 수입 규제, 맥주 재료 사용 규제, 맥주 생산과 유통 관련 규제들이 풀렸던 것처럼 서서히 변화해갈 것이라는 진단이다
EDITOR_황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