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맥주 대회 한국인 비어 저지(Beer Judge)를 만나다
지난 9월 13일과 14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비어 컵(International Beer Cup) 2018. 세계 4대 맥주 대회로 불리며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이 대회에는 총 7명의 한국인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지금까지 한 국제 맥주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한국인 수로 사상 최대였다. 우리나라에서 국제 맥주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재작년까지만 해도 단 두 명뿐이었다.
국제 맥주 대회 심사위원(Beer Judge)은 대회에 출품된 맥주들을 스타일별로 맛보고 가이드라인에 따라 평가해 우열을 가리는 일을 한다. 브루어를 비롯해 맥주 마케터, 펍 운영자, 맥주 저술가 등 맥주 업계에서 오랜 기간 경력을 쌓고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일정 관문을 통과해 심사위원이 될 수 있다. 내로라하는 세계의 맥주들이 모여드는 국제 맥주 대회의 심사위원이 된다는 것은 국제무대에서 겨룰 만큼 전문성을 인정받는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국내 최초의 국제 맥주 대회 심사위원이자 일본, 호주, 브라질, 홍콩, 대만 등 전 세계 주요 맥주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윤정훈 플래티넘 부사장과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국제 대회 심사위원이 됐던 김정하 바네하임 대표를 만나 최근 한국 맥주의 위상과 맥주 심사의 세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한국 맥주 사상 최대 기록을 만들다
“과거 대회에서 찍은 사진과 이번에 찍은 사진 속 제 표정을 비교해 보시면 압니다. 한국 동료들 여럿이 같이 있으니 힘이 나고 우리 맥주에 대해 세계 각국 전문가들과 얘기할 수 있으니 더 신이났죠.”
윤정훈 플래티넘 부사장은 이번 인터내셔널 비어 컵에 한국인 심사위원들이 크게 늘어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새로 한국인 심사위원들이 국제 대회에 데뷔하게 된 데는 윤 부사장의 숨은 조력이 있었다. 지난 4월 코엑스에서 열린 ‘바앤펍쇼’에 일본 수제맥주협회(CBA) 관계자들이 윤정훈 부사장의 초청으로 방문한 것을 계기로 국내 맥주 전문가들이 협회가 주최하는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 한국 비어 소믈리에 협회 내부의 선발을 거쳐 김운선 씨, 최훈진 씨, 황승호 씨 세 명이 처음으로 국제 대회 심사위원으로 나서게 됐다. 작년부터 활동했던 김무경 씨, 이충원 씨와 함께였다.
이번 인터내셔널 비어 컵에는 사상 최대의 한국인 심사위원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맥주의 수상도 사상 최대였다. 작년 같은 대회에서는 국내 브루어리 3곳의 맥주 4종이 상을 받았는데 올해는 4배 이상 늘어난 11개 브루어리1), 17개 맥주가 메달의 영예를 안았다. 특히 화수브루어리의 ‘유자 페일 에일’과 구스아일랜드 브루하우스서울의 ‘덕덕 구스’는 스타일별 최고 맥주에게 주어지는 금메달을 받아 큰 주목을 받았다. 23개국 193개 브루어리에서 총754종의 맥주가 출품된 국제 대회에서 월드클래스 맥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윤정훈 부사장은 “특히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종량세라는 세금 제도하에서 이렇게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며 “한국 맥주는 분명히 큰 발전을 하고 있고 세금 문제가 해결된다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출신 심사위원이 늘어 상을 많이 받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심사위원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된 맥주가 출품되면 모두 주최 측에 알리게 돼 있어 해당 카테고리 심사에서 제외된다”며 ”추후 이해관계가 있는 맥주를 심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심사위원 자격을 영구적으로 박탈당한다”고 강조했다.
맥주 심사는 엄청난 기회
윤정훈 플래티넘 부사장은 지난 2007년 처음으로 세계 최대 맥주 대회인 월드 비어 컵(World Beer Cup) 심사위원으로 국제무대에 나섰다. 미국 캔사스에서 헤드 브루어를 역임한 뒤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였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자 여러 브루어리에 이력서를 내고 있던 차에 맥주 심사위원으로 활동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국제 대회에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아시아 출신조차 드물었다. 한국 맥주가 상을 타는 것은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이어 2013년부터 국제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김정하 바네하임 대표는 국제 맥주 대회에서 알게 된 일본 수제맥주 협회장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아시아 비어 컵 심사에 참여하게 됐다. 심사위원으로서 경력이 쌓이면서 더 큰 대회에 가게 됐고 심사위원들의 토론을 이끄는 ‘캡틴’ 역할까지도 하고 있다. 김정하 대표는 “브루어에게 맥주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며 강력히 추천했다. 김 대표는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비교하면서 맛보다 보니 테이스팅 스킬이 크게 향상된다”며 “또 전 세계 맥주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고 외국 브루어들로부터 최신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윤 부사장 역시 “업계 트렌드를 읽고 신기술을 확보하고 브루어로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는 데에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라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살아있는 정보들이 대회에서 심사위원들 사이에 공유된다”고 설명했다. 실제 플래티넘의 커피 복 맥주도 국제 대회에서 친분을 쌓은 브루어들과 협력해 완성됐다.
국제 대회 심사위원이 되려면
국제 맥주 대회의 심사위원이 되는 공식적인 통로는 대회 주최 측에 이력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대회에 따라서는 추천인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월드 비어컵의 경우 현재 이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세 명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 김정하 대표는 “이런 네트워크를 쌓으려면 업계의 오랜 경력과 좋은 평가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조건도 있다. 인터내셔널 비어컵의 경우 맥주 업계 종사 경력 5년 이상, 타 대회 심사위원 경력등의 자격을 요구한다.
맥주 심사위원에게 필요한 역량에 대해 윤 부사장은 ‘테이스팅 능력’과 ‘영어 소통 능력’ 두 가지를 꼽았다. 이에 대해 김정하 대표는 “테이스팅 능력을 개발하려면 많이 마셔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맥주에 대해 영어로 소통하는 것은 비영어권 국가의 브루어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나 역시 지금도 공부를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대회에서 많으면 수백 가지의 맥주를 맛봐야 하지만 주량에 대한 부담은 크지 않다. 테이스팅에 확신이 없을 때는 평가를 위해 많이 마시게 되지만 테이스팅에 익숙해지게 되면 조금만 마셔보고 맥주를 평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맥주를 심사하는 날 몸 상태를 조절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적지 않은 심사위원들이 대회 전날 과음을 하거나 감기몸살 등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심사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동안 국제 맥주 대회들이 미국, 유럽 중심으로 돌아갔던 것에 비해 최근에는 아시아 맥주들이 약진하고 심사위원도 많이 배출하면서 아시아 문화 친화적으로 가고 있는 것은 유리한 점이다. 윤정훈 부사장은 “내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던 초기에는 맥주에서 ‘간장 맛’이 난다고 표현하면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국가의 심사위원들이 이해를 못 했지만 이제는 아시아의 맛도 세계화되는 추세”라며 “이번 인터내셔널 비어 컵에서 유자를 넣은 맥주들이 수상한 것을 보면 확실히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직도 배울 게 많다
윤정훈 부사장과 김정하 대표는 한국인으로서 국제 맥주 대회의 심사위원이라는 자리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맥주로 메달을 개척하기도 했다. 플래티넘은 지금까지 여러 맥주 대회에서 총 33개의 메달을 받았고 2015년 세계 3대 맥주 대회인 유러피언 비어스타에서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바네하임 역시 여러 세계 대회에서 10여 개의 메달을 받은 바 있다.
윤 부사장은 10년 넘게 해마다 10여 회 맥주 심사를 하고 있지만, 매번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배운다. 그는 “이번 인터내셔널 비어 컵에서 한국 맥주들이 약진했는데 수상한 카테고리를 보면 정통 스타일이 아닌 하이브리드 부분이 많았다”며 “유행에 민감한 하이브리드 부문에서 메달을 많이 땄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또 “사실 플래티넘 역시 대중의 취향에 맞춰 페일 에일의 레시피를 바꿔 이번에 수상했다”며 “시대를 불문하고 통하는 레시피를 아직 못 만들었다는 면에서 아직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 한다”고 덧붙였다.
김정하 대표도 “진짜 좋은 맥주는 대회 때마다 일관되게 좋은 성적을 거둔다”며 “브루어로서 나 역시 아직은 미완성이라고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맥주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EDITOR_황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