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과 라거, 그리고 섬- 필리핀의 자라나는 크래프트 맥주 업계
모든 변화는 작은 반항에서 시작되고, 크래프트 맥주 혁명도 예외는 아니다. 크래프트 맥주는 대량생산되는 단조롭고 개성 없는 맥주에 대한 반항으로 태어났다. 양조사들은 국제적 대기업과 겨루며 장인정신과 지역의 특성을 뽐낸다. 크래프트 맥주 애호가에게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알코올의 섭취가 아니다. 그 경험 자체, 즉 마시는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크래프트 맥주는 항상 변화하는 맛, 재료, 그리고 이야기를 시장에 제공한다. 세계 각국에서 크래프트 맥주를 만드는 양조사들은 품질과 맛, 그리고 혁신을 통해 각자가 내재한 문화, 환경, 그리고 고객의 요구를 맥주에 담아내려 한다.
21세기에 들어서, 세계 맥주 섭취량은 개발도상국과 중저개발국의 맥주 섭취량 증가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미국 등 고소득 국가에서 나타나는 섭취 감소 현상과 대비된다. 특히 크래프트 맥주의 세계 섭취량은 그 다채로운 스타일과 맛으로 인해 국제적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차후 몇 년간 계속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일본, 한국 등 이미 크래프트 맥주가 성행하는 국가에서는 시장 증가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지만, 다수의 중저개발국에서도 크래프트 맥주는 미지의 지역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소득의 증가와 시장의 확대, 그리고 제품의 혁신 등이 크래프트 맥주의 수요 증가에 기여한다. 소비자는 더는 단조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으며, 자신이 속한 문화를 표현하고 특별한 경험을 주는, 완연한 자신만의 무언가를 원하게 되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중산층의 비율이 증가함에 따라 소비자 기대감의 기준치가 높아져 점점 더 많은 제조업체가 크래프트 맥주와 같이 차별화된 제품을 생산하는 추세다.
필리핀은 경제 규모에 있어 세계 36위, 아시아 13위, 그리고 동남아시아 6위의 국가이자, 1인당 GDP 약 3천 달러를 자랑하며 급격히 성장 중인 중-저소득국이다. 국제적인 크래프트 맥주 붐은 필리핀을 비껴가지 않았다. 물론 미국이나 이웃나라 베트남, 홍콩보다 많이 늦게 시작했고 그 규모도 아직은 훨씬 작지만, 필리핀의 크래프트 맥주 업계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휴가나 업무차 마닐라나 세부로 방문한 적이 있다면, 아마 필리핀 사람들의 맥주 사랑은 익히 잘 알 것이다. 다른 주류에 대한 선호 역시 꾸준하며 심지어 증가하는데도(필리핀의 럼과 브랜디 섭취량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들의 맥주 사랑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필리핀 사람들은 술을 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큰 영향을 준다. 지난 몇십 년간 이곳 사람들이 마시는 술은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그 맥주가 맞다) 90년대 들어 저칼로리 버전을 비롯해 가향 제품들이 나오기 전까지 혼자 제왕처럼 군림했다.
다른 브랜드는 이렇다 할 대체재를 선보이지 못했고, 필리핀 사람들에게 맥주의 선택지란 약한 것, 강한 것, 그리고 조금 더 강한 것 정도의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소수의 현지 양조장이 필리핀 전역에 생기며 품질이 뛰어난 크래프트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시장은 산미겔과 타이거, 그리고 하이네켄이 꽉 잡고 있지만 크래프트 맥주는 차근차근, 꾸준하게 맥주 애호가들의 문화에 자리 잡고 있다.
필리핀 크래프트 맥주 협회 (Craft Beer Association of Philippines)에 따르면, 필리핀의 크래프트 맥주 붐은 2015년 시작되었다. Southeast Asia Brew Convention은 2018년 필리핀 크래프트 맥주 업계가 200%의 성장세를 보였다고 보고했으며, 협회에 등록된 양조장은 현재 60개 이상으로 늘었고 이들은 약 300종 이상의 맥주를 출시하고 있다. 등록된 양조장의 과반수는 마카티, 파라냐케, 케손시티 등 메트로 마닐라 지역에서 영업하고 있다. 물론 이 수는 미국, 아니 한국보다도 훨씬 적은 수임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시장이 아직 매우 초기 단계인 점을 고려하면 필리핀 크래프트 맥주 업계는 매우 활발하고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에는 경쟁이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필리핀의 경우 그 경쟁은 항상 커뮤니티의 화합과 함께해왔다. 셰프 앤서니 부르뎅은 필리핀 사람들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잘 챙기는(Giving)” 사람들이라 표현했다. 필리핀 사람들의 이러한 특성은 이곳 크래프트 맥주 커뮤니티가 서로 소통하고 자라는 와중에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필리핀의 양조사들은 주로 다음의 단계를 거처 맥주를 완성한다: 먼저 친한 사람들과 직접 만든 맥주를 공유하며 레시피를 확립하고, 양조장을 설립한다. 이후 소규모로 생산한 맥주를 주변 양조사나 애호가들과 공유하거나 몇몇 양조장과 펍을 통해 제공한다. 이렇듯 작고, 얼핏 폐쇄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환경과 원칙은 양조 이후에도 쭉 유지된다. 물론 크래프트 맥주를 양조하는 사람의 정체성은 폐쇄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필리핀의 양조사들은 다양한 경로로 크래프트 맥주를 처음 알게 되는데, 많은 경우는 해외에서 이뤄진다. 곧 마닐라에 양조장 설립을 준비하는 홈브루어 데니스 조지프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항상 맥주를 좋아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자라면서 맥주라는 음료의 선택지가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을 항상 해 왔다. 홍콩에 갈때면 기네스나 보딩턴 등 다양한 맥주를 찾을 수 있었는데, 필리핀에선 왜 그런 맥주들을 찾을 수 없는지 의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싶었고, 캐나다에서 양조를 공부하여 다수의 홈브루잉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제 다시 귀국하여 나의 맥주를 필리핀 사람들에게 선보일 준비가 되어있다.”
데니스의 경험은 아주 특이한 것이 아니다. Elias Wicked Ales and Spirits의 양조사이자 사장인 라울은 싱가포르에서 DJ 생활을 하며 크래프트 맥주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효모의 역할과 발효의 과학적 원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5년간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맥주를 더 배우고 BJCP, 시서론 등의 자격증을 취득하기에 이른다(그는 현재 필리핀 유일의 BJCP 심사위원이자 Certified Cicerone이다). 필리핀으로 귀국한 그는 사이더와 맥주 양조장을 설립해 외국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크래프트 맥주의 매력을 전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물론 모든 양조사가 외국에서 양조 경험을 쌓은 것은 아니다. 초소규모 양조장 Banayad Craft Brew의 사장 마크는 2010년 친구의 소개로 Stone Brewing의 Arrogant Bastard를 처음 마신 후 크래프트 맥주의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답했다. 이후 순전히 애호가로서 크래프트 맥주를 즐겨오던 그는 지난 2016년 친하게 지내던 애호가들과 양조사의 권유에 따라 홈브루잉을 시작했고, 이제는 마닐라의 몇몇 펍에 자신의 맥주를 납품하는 프로 양조사가 되었다.
필리핀 크래프트 맥주 업계의 성장은 순조롭지만은 않다. 여러 문제가 내재해 있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꼽는 문제는 바로 홉,몰트, 이스트 등 양질의 재료 확보에 대한 것이다. Elias의 라울은 자신도 심슨즈 몰트, 화이트랩스의 효모 등을 사용하고 싶지만 부족한 수요와 불편한 유통과정으로 인해 다량의 재료가 국내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후 및 지리적 여건(필리핀은 약 7,000개의 섬으로 이뤄진 열대 국가이다)은 맥주의 저장과 유통에 큰 지장을 준다고 답했다. 크래프트 맥주의 가격 역시 문제인데, 산미겔 한잔과 비교했을 때 두 배에서 다섯 배 정도로 가격이 형성되어있는 지금의 시장은 소비자의 선택을 결정지을 만한 요인이 될 수 있다.
필리핀 맥주 업계는 아직 초창기에 머물러 있지만, 이곳의 인구와 맥주 선호도를 생각한다면 아주 큰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다수가 예상한다. 특히 이후 5년간의 성장에 대해선 필자가 만난 모든 양조사들이 긍정적인 의견을 밝혔고, 라울의 경우에는 세부, 보홀 등 관광지에 여러 양조장이 생길 것이며 일반 마트 등에 납품하길 원할 것이라고 했다. 마크는 약 100~150개의 양조장이 필리핀 전역에 세워질 것이라 조심스레 답했다. 또한 데니스는 외국 양조사들이 미국, 유럽 등 레드오션을 떠나 필리핀으로 올 것으로 예측했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크래프트 맥주가 정말 이렇듯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그 수요가 여태 충족되지 못했던 틈새시장을 공략한다면, 과연 크래프트 맥주 시장은 언젠가는 필리핀의 대형 맥주 시장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것 인가?
놀랍게도 이 질문에 모든 양조사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물론 소비자층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히 환영할 일이지만, 크래프트 맥주는 대량 생산되는 맥주의 대체재가 아니며 완전히 다른 개념과 철학, 그리고 목표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특히 라울은 자신의 목표는 라거가 아닌 에일이며, 가장 저렴한 에일로 승부하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쳤다(실제로 그의 블론드 에일은 현재 필리핀에서 가장 저렴한 크래프트 맥주이다). 또한 인터뷰를 진행한 모든 양조사는 소비자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에게 맥주의 차이를 알리고, 맛의 차이와 그 중요성을 알려주어야만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라거 시장과는 독립된 객체로 성장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크래프트 맥주 협회가 더욱더 조직적이고 전략적인 활동과 홍보를 해야 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필리핀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나라의 대기업 맥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 맥주들은 7천 개의 섬 전역에서 약 천 원이면 살 수 있으므로, 설령 크래프트 맥주가 소비자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라거는 지난 수백 년간 필리핀의 정체성과 문화에 각인되었으며 그 사슬은 적어도 단시간 내에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이 신생 양조장들 역시 그 정도로 가정과 문화에 깊게 각인되는 맥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필리핀은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로 맥주의 원료뿐만 아니라 유통에도 어려움이 많다.
EDITOR
이종혁 Jonghyuk Lee
인류학과 보건학을 공부한다. 맥주 덕후이며, 크래프트 맥주가 지속가능한 발전에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한 나라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관해 비어포스트에 기고한다. 또한 세계를 여행하며 각 나라의 문화와 주류를 체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