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키마 치프의 홉 앤 브루 스쿨
전 세계 브루어를 위한 홉 수확 축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농업’은 흐릿한 단어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특히 자연과 떨어져 바쁜 일상에 파묻힌 도시민이라면 매일같이 섭취하는 음식물이 땅에서 절로 난 것인지, 우주에서 우연히 떨어진 것인지 알게 뭐랴. 먹거리의 형태는 갈수록 다양하며 간편해지고 있지만, 그 근간을 이루는 농업에는 깊은 관심을 쏟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농업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더없이 중요한 산업이라는 점에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당장 하루 끝에서 갈증을 풀려고 찾는 맥주 한 잔만 보더라도 곡물과 식물이 주요한 재료다. 인류의 역사와 꾸준히 함께해온 농업은 현대 사회로 오며 다양한 이슈와 과제를 대면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량 감소의 문제를 비롯해 농촌 인구 감소, IoT 등 신기술의 접목까지 위기와 기회를 두루 살피며 미래를 단단히 대비할 시점이다.
세계 최대 규모 홉 산지, 야키마 밸리
지난 8월 말 방문한 미국 워싱턴주의 야키마(Yakima)에서 농업, 경제, 교육과 문화의 훌륭한 융합을 목격했다. 야키마는 미 북서부 워싱턴주에 위치한 지역이다. 해안 도시 시애틀에서 차로 약 3시간 정도 달리면 하늘과 맞닿은 산자락과 농장으로 둘러싸인 야키마에 당도하게 된다. 야키마 밸리는 지중해성 기후와 드넓은 평야 덕에 포도와 사과를 비롯해 각종 과일 재배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활발히 자라는 또 다른 작물이 있었으니, 바로 맥주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들이 사랑하는 '홉'이다. 차를 몰고 드넓은 야키마를 달리다 보면 여기저기서 홉 덩굴이 줄줄이 늘어선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미국 내 홉 수확량의 33%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홉 산지의 한복판을 홉 수확철에 방문하는 기쁨을 비어포스트 편집진이 누렸다. 이곳에 우리를 초대한 야키마 치프(Yakima Chief) 사는 지역 홉 농장과 전 세계 양조장을 연결하는 회사로서, 홉종개발부터 품질 관리와 상품화까지 관할하며 전 세계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홉을 재배해온 가족 공동체가 100% 회사의 소유주이다. 야키마 치프가 주최하는 ‘홉 앤 브루 스쿨(Hop & Brew School)’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 다. 홉 앤 브루 스쿨은 매년 8월 말에서 9월 초쯤 홉 수확기에 야키마 치프에서 진행하는 축제이자 콘 퍼런스이다. 이 시기에 전 세계 브루어들은 홉을 체험하고 양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야키마를 방문한다. 홉 & 브루 스쿨 참가자들은 홉 농장을 걸어다니며 루플린의 진한 향내를 만끽할 수 있고, 홉을 가공하고 유통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둘러볼 수 있으며, 맥주를 원없이 마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열정적인 브루어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 전설적인 브루어나 저명한 맥주 전문가에게서 배움을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이 시기에 지역 호텔들이 방문객으로 붐비고, 시내 풍경이 활기를 띠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키마 치프의 CEO인 Mike Goettl는 한국에서 수확철을 축하하며 즐기는 것처럼, 야키마에서 보내는 이시기 역시 홉 수확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홉 앤 브루 스쿨: 재료를 알면 양조가 보인다
올해 홉 앤 브루 스쿨은 8월 30일부터 9월 2일까지 총 4일 간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풍부한 교육 프로그램, 홉 공정 견학, 그리고 끝없이 제공되는 맥주와 함께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교육 일정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인 8월 30일에는 지역 양조장인 베일브레이커 브루잉에서 참가자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앳된 사람부터 수염이 하얗게 센 사람까지, 참가자들의 폭넓은 나이대가 인상적이었다. 프로그램에 임하기 앞서 우리는 각종 안내자료와 굿즈, 다양한 음식과 베일브레이커의 맥주를 제공받으며 3일동안 함께 배우게 될 다른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지역 양조장과 홉 회사가 협업하여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맥주로 연결되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돋보였다.
야키마 치프의 CEO인 Mike Goettl과 이전 CEO인 Steve Carpenter의 인사로 프로그램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미국 크래프트 맥주 양조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러시안 리버 브루잉의 오너 Vinnie Cilurzo가 기조연설을 했다. 그는 홉이 자신의 커리어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하며, 2018년 새로이 개발된 사브로(Sabro) 홉을 시작으로 홉종 개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지난 양조의 세월을 되돌아봤다. 또한 홉 앤 브루 스쿨에서 홉을 직접 경험하는 일도 무척 좋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이곳의 가족 공동체와 우정이 만들어내는 시너지야 말로 자신에겐 가장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홉 농장과 가공 시설 견학
둘째 날에는 모두가 기다려온 홉 농장을 본격적으로 견학했다. 야키마 캠퍼스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이동한 끝에 홉 브리더 Jason Perrault가 운영하는 홉 농장에 다다랐다. 조용하고 푸르른 농장을 자유로이 거닐며 아주 다양한 형태로 자라는 수많은 홉 덩굴을 관찰할 수 있었다.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홉 콘을 따서 반으로 가른 뒤, 노란 루풀린을 서로 맞대 비비며 향을 비교해볼 수도 있었다. 단순히 홉의 생김새로 그 쓸모를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평소 양조할 때 사용되는 홉 제품을 뜯어볼 때와, 땅 속에서 올라와 생생히 물기를 머금은 홉을 마주할 때의 감흥은 결코 비교할 수 없었다.
홉 농장 여기저기선 이미 수확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수확된 홉이 제품으로 재탄생 하기까지 어떤 모험을 겪는지 따라가봤다. 덩굴 째로 수확된 어마어마한 양의 홉은 줄줄이 자동화 기계로 옮겨지고, 정교한 분리 과정을 여러 번 거친다. 그 과정에서 줄기나 자잘한 잎사귀 등 불필요한 요소는 최대한 분리되는데, 이는 제품에 사용되는 콘(Cone)만 최종적으로 걸러내기 위한 것이다. 홉 줄기는 이 기계에서 저 기계를 오가는 동안 마구 날뛰고 이동하며 점차 해체된다.
그렇게 해서 모인 말끔한 홉 콘들은 건조 과정을 거친 뒤 포대에 담겨 제품화 시설로 옮겨진다. 그곳에서 펠릿이나 오일 등의 형태로 가공되어 최종적인 제품 형태로 포장되는 것이다. 세계 각지의 양조장으로 출동하기 전까지 홉 제품들은 무척이나 커다란 냉장 창고 안에 신선한 상태로 보관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단연 홉의 신선도이다. 수확된 그 순간부터 제품화를 지나 냉장 창고에 보관되기까지, 신속하고도 체계적인 단계를 거치며 홉은 양조사의 손에 다다른다. 양조사들에게 직접 그 과정을 따라가보는 것을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움의 한복판: 감각 훈련과 전문가 강연
이번 홉 앤 브루 스쿨의 교육 프로그램은 아주 체계적으로 짜여있었으며, 양조사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홉 제품과 맥주를 감각적으로 느끼고 상태를 평가해보는 감각(Sensory) 훈련과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강연 프로그램이 골자였다.
감각 훈련에서는 맥주의 이취를 파악하고 구별하는 연습, 그리고 홉 제품의 특성과 상태를 파악하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맥주를 시음하고 이취를 가려내는 일은 이미 여러 교육을 통해 맥주업 종사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있는데, 홉 제품을 그런 식으로 파악하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홉에는 여러 특징적인 향이 있는데, 그중 홉에서 나서는 안 되는 ‘이취’는 탄 고무 냄새, 치즈나 땀에 젖은 양말 냄새, 곰팡내, 양파나 마늘 냄새, 암내, 풀냄새 등이다. 양조사들이 원재료를 받아보고 사용하는 주체인 만큼, 이는 스스로 홉의 품질과 상태를 확인해볼 수 있는 유용한 척도라고 볼 수 있겠다. 야키마 치프는 실제로 브루어리들에게 홉 아로마를 평가할 수 있는 센서리 프로그램(Sensory Program)을 제공하고 있다.
주로 셋째 날에 진행된 전문가들의 강연 프로그램은 양조에 관한 진지하고 기술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다. 양조사의 입장에서 어떤 홉을 사용하는 것이 좋으며, 자신의 양조 의도를 충족하려면 홉을 어떤 방법으로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핵심이었다. 비단 홉 뿐만 아니라 효모, 맥아, 물 등 다른 원재료에 관한 내용도 여러 연사의 강연을 통해 부수적으로 다루어졌다. 홉 앤 브루 스쿨의 참가자들 중에는 상업 양조사들도 있었지만, 취미로 맥주를 만드는 홈브루어들도 상당했다. 따라서 연사들의 강연 역시 상업양조에 초점을 맞춘 강의와 홈브루잉에 중점을 둔 강의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이로써 참가자들은 배움의 목적을 두루 충족할 수 있었다. 그중 몇몇 강연의 내용을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상업 양조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자 중에는 양조 이론서 『How To Brew』와 『Water』를 집필한 존 팔머(John Palmer)도 있었다. 그는 IBU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바로잡고 홉의 구체적인 성분을 낱낱이 파헤치며, 홉을 사용함에 따라 쓴맛을 내는 이소알파산과 아로마가 발현되는 방식과 원리를 화학적 측면에서 설명했다. 홉의 쓴맛과 아로마를 강조한 IPA는 현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스타일이기도 하거니와,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뉴잉글랜드 스타일 IPA’ 등 홉 캐릭터를 더욱더 극대화한 맥주가 유행하고 있다. 본 강연은 양조 시 홉을 어떻게 사용하여 원하는 특성을 만들어내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특히 IPA 류를 완성도 있게 만들고자 하는 양조사들에게 유용한 강연이었다.
생명과학자인 Ann Van Holle가 ‘홉의 테루아르’를 주제로 진행한 발표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가 속한 벨기에의 De Proef 브루어리는 주로 집시 브루어리들의 맥주를 과학적이고 품질 높게 만들기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Ann은 동일한 홉종이 서로 다른 지방 즉 환경에서 자랐을 때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것이 양조 및 맥주 맛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연구하고 있다. 그는 본 발표에서 아마릴로(Amarillo) 홉과 케스케이드(Cascade) 홉으로 만든 뉴잉글랜드 스타일 싱글홉 맥주의 사례를 들며 의미있는 결론을 공유했다.
예를 들어 같은 아마릴로 홉이라도 야키마가 속한 미국 워싱턴 주에서 자란 경우에는 열대과일, 자몽, 오렌지, 레몬 등 과일 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데 비해, 아이다호 주나 독일에서 자란 경우에는 과일 캐릭터가 크게 떨어지고 대신 ‘Spicy’, ‘Woody’ 등의 특징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세 가지 싱글홉 맥주를 맥주 평가 온라인 플랫폼인 레이트비어(RateBeer)에서 비교 평가하도록 하자, 워싱턴 주에서 자란 홉으로 만든 맥주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워싱턴 주에서 재배한 홉이 맥주 소비자들의 기호를 충족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홈브루잉 강연 중에도 다양한 주제가 있었지만, 그중 브루어 Annie Johnson은 야키마 홉 제품인 아메리칸 노블 홉(American Noble Hop)에 초점을 맞춰 주로 라거 스타일 맥주를 만드는 양조 기법에 대해 발표하기도 했다.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을 위한 노력
이번 홉 앤 브루 스쿨에서는 ‘레드 컵 프로젝트’(Red Cup Project)가 진행되었다. 모든 참가자들이 처음에 붉은 플라스틱 컵을 1개 씩 제공받는데, 그 위에 각자의 이름을 써서 일정이 끝날 때까지 쭉 사용하자는 내용의 캠페인이었다. 이는 환경을 오염시키는 플라스틱 사용을 자제하자는 취지였으며, 평소 일회용 플라스틱 컵으로 맥주나 커피 등 음료를 자주 마시던 일상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예 처음부터 플라스틱 컵을 사용하지 않고 개인 텀블러에 맥주를 마시는 참가자들도 여럿 보였다. 지역 농업을 기반으로 한 야키마 치프는 기후 변화와 숲의 파괴 등 위기에 처한 지구 환경을 돌보고,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기업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
수확철에 경험한 야키마 치프의 ‘홉 앤 브루 스쿨’은 배움과 열정과 공동체 정신의 총집합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농업과 아름다운 야키마의 자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마치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축복하듯, 풍요로운 야키마의 홉 수확철은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맥주를 마시는 나날로 우리에게 채워졌다. 수확철은 매년 돌아온다. 가슴 속에 열정을 품은 양조사라면, 그리고 그 열정을 잃고싶지 않은 양조사라면 내년 홉 수확철에 야키마 치프가 주최하는 홉 앤 브루 스쿨에 가기 위한 비행기표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