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을 품은 펍, 탭하우스숲 서정일 대표 인터뷰
나는 그저 성수동 맥주집 사장이다
평생 직장이 아닌 평생 직업인의 시대다. 많 은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하며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잘 하는 일’의 경계선을 파악한다. 스스로 세 가지 등고선 을 하나씩 그리면서 이를 ‘돈’과 연결 짓는 다. 자연스레 전문성이 생기고 몸 담고 있던 안정적인 조직으로부터 탈출을 꿈꾼다. 이 렇게 시작하는 새로운 도전의 이유는 “~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 좋아서”가 되어야 한다. 생산성과 기능적인 삶의 잣대를 따질 필요는 없다. 그저 생각만으로 가슴을 두근 거리게 하면 그만이다.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진 서울숲을 지나 한 적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녹색 숲을 닮은 간 판이 나타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앤티크 한 그림과 소품, 알싸한 수제 향초가 풍기는 내음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짓게 하는 단아한 실내가 나온다. 바로 이 곳에서 20여년 전, 우연히 접한 크래프트 맥주를 잊지 못하고 마침내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로 연결시킨 크래프트 맥주 게스트로펍 ‘탭하 우스숲’의 서정일 대표를 만났다
그저 마음이 향하는 건 오직 맥주였다. “이유는 없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보고 싶었고, 자연스레 맥주가 떠올랐습니다.” 탭하우스숲의 서정일 대표는 창업 전 10여년 간 잘 나가는 외국계 기업에서 승승장구했다. 업무 성과도 꽤 좋았고, 인정도 받았다. 그러다가 문득 미래 자신의 모습을 고민했는데 적어도 회사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유럽 출장길에 수 없이 맛 본 크래프트 맥주가 떠올랐다. 그 때 느꼈던 즐거 운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처음 펍을 열겠다고 결심하고 대학시절부터 뻔질나게 다닌 종각의 크래프트 맥주 펍 산타페를 찾아갔다. 서정 일 대표는 그 곳에서 “펍은 음식이든, 음악이든 반드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조언을 얻 었다. 그 길로 어떤 즐거움을 주고 싶은지 끊임 없는 고민을 시작했다.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마치 내 집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70~80년대 로큰롤, 블루스 음악을 틀고, 색감이 소박한 유화를 여럿 걸어두었다. 작은 소품 하나하나에 서정일 대표의 취향이 반 영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공간이 주는 유쾌한 경험. 바로 그것이 서정일 대표가 찾은 답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탭하우스숲은 이색적이지만 편안한 공간을 즐기려는 단골손님의 비중이 유독 높다. 배경도 출신도 다양한 손님들이 밤마다 찾아와서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 중에는 영화 ‘타짜’, ‘도둑들’의 최동훈 감독, 안수현 PD, 배우 고준희, 김의성 등 문화계 인사들이 많다. 특히 최동훈 감독은 느지막한 밤이면 탭하우스숲을 사랑방 드나들 듯 꽤나 자주 방문한다. 다른 손님들과 함께 어울리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왕왕 볼 수 있다고 한다.
브루어리와 상생하는 펍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한다 지난 3월, 서정일 대표는 페이스북 내 크래프트 맥주 모임인 비어마스터클럽에 한 편의 글을 올렸다.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펍 협동조합(Exclusive pub group)의 시작이었다. 서정일 대표가 제안하는 펍 협동조합은 상권이 겹치지 않는 동네 펍들이 모여 협동조합의 형태로 멤버십 그룹을 만들고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소규모 브루어 리의 고유한 맥주를 함께 공유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를 통해 멤버십 그룹 내 펍은 다른 일반 펍에 서는 판매되지 않는 독점적 맥주(Exclusive beer)를 판매할 수 있어 차별점을 가질 수 있다. 대기업 자본에 속 하지 않은 소규모 브루어리는 안정된 수입구조를 얻는다. 향후에 펍 그룹과 관계를 맺고 있는 브루어리에 투 자하여 지분을 공유하고 상생하는 모델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서정일 대표가 펍 협동조합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최근 크래프트 맥주 업계에 불어 닥치고 있는 자본 의 유입 때문이었다. IT스타트업에 투자했던 자본이 한국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세에 눈 길을 돌려 거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투자금을 유치한 브루어리는 벌써부터 인수합병(M&A)과 주식공 개상장(IPO)의 핑크빛 전망을 내놓는다. 그러나 3년여간 현장에서 맞부딪힌 크래프트 맥주는 여전히 소수의 취향이며 대중성이 검증되지 않은 시장이었다. 탭하우스숲과 같이 작은 펍 오너들에게 대규모 자본의 유입은 먼 나라 이야기이지만 장차 생업을 위협할 수 있는 불안요소이다. “소규모 브루어리와 지역 기반의 펍은 반드시 공생해야 합니다. 대규모 자본이 깨뜨릴 수 없는 끈끈한 전우애를 구축해나가야 합니다(웃음).” 이를 실현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브루어리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동반자적 관계 를 쌓은 브루어리는 경기도 안산의 크래머리와 서울 안암의 히든트랙이었다. 서정일 대표는 세일즈 엔 지니어로서 직장생활을 하며 배운 것이 있다면 재료는 바꿀 수 있지만 사람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라 고 했다. 오래도록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관계를 갖길 원했다. 크래머리와 히든트랙의 브루어들을 만나고 난 뒤 직감적으로 ‘이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펍 협동 조합의 첫 번째 조건은 크래머리와 히든트랙의 맥주로 탭을 운영해야 하며, 여분을 수입맥주나 게스트 맥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인기 있는 브루어리가 생겨난다면 크래머리, 히든트랙과 함께 그 곳을 방문하여 더 맛있는 맥주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만큼 양조 실력에도 자신 있는 브루어리를 선별했다는 것이다. 자신감이 물씬 풍겨났다. 펍 협동조합 아이디어를 내놓고 나서 이미 몇몇 펍 오너들로부터 멤버십에 합류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 았다. 앞으로 서정일 대표는 그들과 함께 식자재 공동구매를 통한 원가 절감, 숙련된 인력의 품앗이, 펍 운영 노하우 공유 등을 진행해 자본이 휘몰아치는 한국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 독립된 주체로서 역할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기본에 충실하자. 나는 그저 동네 맥주집 주인이다. 크래프트 맥주 펍을 시작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티켓을 얻은 것과 같이 하루하루가 기쁘다는 서정일 대표에게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바로 ‘늘 기본에 충실한 펍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이는 질 좋은 맥주와 개성 넘치는 음식, 그리고 탭하우스숲을 사랑해서 매번 찾아주는 손님들로 완성된다고 했 다. 작은 꿈이 있다면 웅장한 인테리어와 화려한 라인업의 맥주가 아닌 소소하지만 생기 있고 활기찬 매력이 넘치는 ‘동네 맥주집’을 운영하는 주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홀로 고군분투하지 않고 펍 협동조합과 함께 성장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 받는 모델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서정일 대표의 포부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앞으로도 탭하우스숲이 많은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어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공간으로 남아있길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