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시장에 바틀샵이 없다면
직장인 김세정 씨(32, 가명)은 마트에 맥주를 사러 갈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애주가로서 수십, 수백 종의 맥주가 매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장면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지만, 막상 사려고 하면 어떤 맥주를 골라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국산부터미국, 일본, 유럽, 동남아 맥주까지, 또 1000원대 맥주부터 5만원이 훌쩍 넘는 맥주까지…. 선택의 폭이 너무 넓다 보니 맥주코너 앞에서 인터넷 검색을 해가며 고르는 것도 큰일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하고 선택한 맥주들이 기대만큼 만족스럽지않은 적도 많다. 김 씨는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결국 입에 맞지 않는 맥주를 마시게 될 때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그냥 먹던 맥주 사 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 시장에 맥주의 다양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같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이는 크래프트 맥주 시장으로 신규 소비자 유입에 속도가 붙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맥주 업계에 필요한 유통 채널이 바틀샵이다. 바틀샵은 주류 소매 면허를 받아 최종 상품으로 포장돼 나온 가정용 캔이나 병맥주를 판매하는 곳이다. 일부는 일반음식점으로 등록해 매장에서 맥주를 마실 수도 있다. 크래프트 맥주는 맛과 품질을 기본 토대로 재료와 양조 과정, 브루어리의 철학, 디자인 등을 고려해 즐기는 하나의 문화 콘텐츠다. 매장에 쌓여있는 제품을 카트에 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반 문화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소통하는 것이 크래프트 맥주의 진정한 의미이자 매력이다.
맥주 문화 ‘사랑방’이자 전파의 거점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바틀샵이다. 바틀샵은 크래프트 맥주의 저변을 넓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바틀샵에서는 맥주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직원들이 먼저 맥주를 접하고 정보를 소비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신규 소비자를 유입시키고 정착시킨다. 맥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아예 접근조차 어려운 마트 맥주 코너와 다른 점이다. 맥주 업계 관계자는 “현재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문제는 기존에 관심 있던 사람들이 그들만의 문화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라며 “공급은 계속 늘고 있지만 소비가 그만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소비자들의 유입을 위해 바틀샵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바틀샵은 크래프트 맥주의 정체성인 품질과 다양성 유지를 위해서도 존재 의미가 분명하다. 대형마트의 경우 맥주 품질 관리에 소홀한 경우가 많다. 겨울에 마트에서 뜨거운 히터 바람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맥주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를 통해 맥주 본연의 맛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브루어리, 수입사, 도매사가 아무리 품질 관리에 온 힘을 쏟더라도 결국 소비자들이 맛이 변한 맥주를 마시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크래프트 맥주는 트럭위에서, 야적장에서 햇볕을 가감 없이 받아 본연의 맛을 잃게 되는 대기업 맥주와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일부 수입사들은 대형마트가 요구하는 낮은 납품 단가를 맞추기 위해 수입할 때부터 냉장 컨테이너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함께 바틀샵은 맥주 시장 다양성 유지에 기여를 한다. 대형 마트에서는 수익성을 우선으로 하는 만큼 많은 종류의 맥주를 다루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맥주를 위주로 유통하게 된다. 실제 지난해 크래프트 맥주 라인업을 크게 늘렸던 한 대형마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상품을 정리했다. 이렇기 때문에 신생 브루어리나 신규 수입 맥주, 고가 맥주들의 경우 마트라는 유통 채널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대형마트 외 바틀샵과 같은 유통 채널이 없다면 아예 가정용 시장에 선보일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바틀샵은 맥주 시장에 꼭 필요하지만, 바틀샵 운영을 통해 지속가능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소규모로 운영되는 바틀샵의 특성상 다른 대형 채널과의 가격, 마케팅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형 마트는 애초에 브루어리, 수입사 등으로부터 낮은 단가에 제품을 소싱하는 경우가 많다. 또 대량 판매를 하기 때문에 마진 폭도 낮게 설정할 수 있다. 기본 판매 가격이 바틀샵과 비슷하거나 낮은 데다가 ‘크래프트 맥주 6개 구매 시 10% 할인’ 등의 마케팅을 연중 지속한다. 여기에 포인트 적립까지 고려하면 소규모 바틀샵이 가격으로 대형마트를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많은 바틀샵들이 영업을 포기했다. 바틀샵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이태원의 ‘더바틀샵’과 ‘한스스토어’가 문을 닫았고 서울 사당동 ‘테이크식스’, 연남동 ‘비어투고’, 부산의 ‘아울앤푸시캣’도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폐업했다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 소비자 입장에서든 생산자 입장에서든 바틀샵의 존재 의미는 분명하다. 바틀샵은 대형 마트와의 가격 경쟁에서 항상 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형마트 대신 인근 바틀샵에서 맥주를 사야 할 이유는 있다. 맥주시장이 커져 더 다양하고 맛있는 맥주를 즐겼으면 우리의 바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