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마시면 두 배로 즐거운 동남아시아의 국민 맥주
동남아시아 맥주 시장은 높은 경제 성장률과 인구 증가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 평균 알코올 섭취량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동남아시아 맥주 소비량의 증가는 주목할 만하다. 베트남의 경우 10년 전 연간 맥주 소비량으로 아시아 8위를 기록했으나, 현재는 중국과 일본에 이어 아시아의 3번째 맥주 소비국으로 발전해 동남아시아 맥주 시장의 빠른 성장을 실감케 한다.
.동남아시아 맥주 시장에서는 현재 하이네켄, 칼스버그, 타이거와 같은 다국적 대기업 맥주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각국에서 점유율이 높은 로컬 맥주 회사들은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태국의 경우를 제외하면 지배국의 영향을 받아 성장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인도네시아,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필리핀, 그리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베트남이 대표적이다.
주로 소비되는 맥주 스타일은 덥고 습한 열대 기후에 물처럼 마실 수 있는 페일 라거다. 페일 라거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스타일로, 향신료의 성격이 강한 동남아시아 음식과 궁합이 좋아 동남 아시아에서도 오래도록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원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소규모 양조장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의 국민 맥주로 불리는 빙탕(Bintang)은 현지어로 ‘별’을 뜻한다. 큼지막한 빨간 별이 그려진 로고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이네켄의 로고와 상당히유사하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빙탕이 하이네켄을 따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오해는 네덜란드 기업 하이네켄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역사를 살펴보면 풀릴 것이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 통치하던 1929년, 하이네켄이 인도네시아에 네덜란드령 양조장을 설립하며 빙탕의 역사가 시작됐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됐고, 4년여간 무력항쟁을 거친 끝에 1949년 인도네시아는 완전히 독립했다.
독립 이후 하이네켄은 정부 공사에 의해 국유화되었다가 1967년 소유권을 되찾아 빙탕이라는 이름으로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하이네켄이라는 이름의 맥주 판매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에서 하이네켄의 상징인 빨간 별이 빙탕 로고에도 들어가게 됐다.
필리핀
동남아시아에서 대기업 맥주의 시장점유 율이 높지만, 그중에서도 산미구엘은 필리핀 맥주 시장 점유율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인다.
산미구엘의 어원은 라틴어로, 산(San)이 St.(세인트, 성스러운)을 가리키며 Miguel은 천사 미카엘(Michael)을 뜻한다. 이름에서부터 스페인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산미구엘은 120년 전 필리핀을 통치했던 스페인이 설립했다. 스페인 보조금을 지원받아 1890년부터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20여년간 계속 보조금을 받아 양조장을 운영하며 라거 맥주를 연간 3,600 헥토리터 생산할 정도로 규모를 키웠다. 19세기 말 필리핀 혁명 이후엔 생산량이 더욱 늘어나 1910년에 양조장의 장비를 현대화하게 됐고, 1914년부터는 상하이, 홍콩, 괌에 맥주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스페인과 맺은 협약으로 스페인 현지에서도 산미구엘을 생산하고 있다.
자국 내 맥주 시장을 이미 포화시킨 산미구엘의 경우, 타 회사들보다 성장률과 ROE(자기자본이익률)가 크게 낮다. 이는 필리핀 내에서 산미구엘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 수출을 제외하면 성장하기 힘든 자본 구조를 시사한다. 최근 산미구엘은 맥주 외 산업에도 눈을 돌려 부동산 및 에너지 사업으로 돌파를 꾀하고 있다.
베트남
베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주 333과 Saigon은 SABECO(Saigon Alcohol Beer and Beverages Corporation)사에서 생산한다. 베트남 맥주 시장에서 가장 큰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SABECO는 1875년 프랑스인이 사이공(현 호찌민시)에 작은 양조장을 만들면서 출발했다. 1910년에는 맥주를 비롯한 청량음료 및 얼음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발전했으며, 2000년대에 SABECO로 회사명을 바꾸고 맥주뿐 아니라 위스키, 럼, 와인 등을 생산하는 종합 주류 회사로 성장했다.
1986년 베트남이 세계 시장에 문호를 개방한 뒤에도 현지 맥주 시장에서는 늘 자국 기업(Sabeco, Habeco)이 우위를 점해왔다. 그중에서도 Sabeco는 맥주 시장 점유율을 40%대로 기록해 여전히 베트남 최대 맥주 회사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꾸준히 50%를 웃돌던 점유율이 최근 몇년 이 40%대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변화에는 하이네켄이나 타이거등 글로벌 맥주 기업들의 공격적인 판촉활동과 현지기업 지분 인수가 영향을 미쳤다. Sabeco, Habeco 등 현지 맥주 기업들이 베트남 내에서 높은 점유율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간 외국 기업과 경쟁 없이 브랜드 입지를 탄탄히 다져오며 형성한 브랜드 충성도에 있다. 자국 맥주에 입맛이 길든 기성세대는 여전히 Sabeco 맥주를 선호하지만, 청년 세대가 글로벌 맥주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시장이 점점 다각화되는 양상을 띤다. 또한, 최근 빠른 경제 성장과 함께 부를 축적한 베트남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 대기업 맥주보다 소규모 양조장의 맥주로 서서히 눈을 돌리고 있는 것도 베트남 시장의 맥주 점유율을 분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영국 주류 전문 조사기관 Canadean의 2016년 조사 및 Euromonitor의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의 전체 주류 소비량 중 맥주의 비율은 94%를 차지한다. 현재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베트남의 맥주 연 매출은 연평균 5.6%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며, 1인당 연평균 소비량은 47.6L로 예측된다.
태국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식민지 경험을 하지 않은 태국에는 자국 회사인 분 로드브루어리(Boon Rawd Brewery)가 있다. 맥주 양조 기술을 배우려 독일과 덴마크를 다녀온 태국인이 1933년에 설립한 맥주 회사로, 태국에 최초로 생긴 맥주 양조장이다. 분 로드는 맥주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려고 1933년에 독일과 기술 제휴를 맺고 독일식 필스너 양조법으로 첫 맥주를 선보였다. 또한 원료 처리, 냉장 설비, CO2 장비 등의 설치 및 운용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할 목적으로 독일에 있는 여러 대학및 양조장에서 양조사들을 양성했다. 분로드는 1994년 두 개의 독일 양조장을 사들여 독일에서도 맥주를 생산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그리고 2013년부터는 자사 브랜드인 싱하(Singha) 맥주 일부를 칼스버그 러시아 공장에서 생산하기 시작해 아시아 8개 칼스버그 공장의 생산 설비를 사용해서 맥주를 생산, 유통하고 있다.
태국 정부는 수입 맥주에만 수입 관세를 60%까지 부과해 국산 양조장을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래서 칼스버그나 아사히와 같은 해외 양조장들은 태국 양조장들과 파트너십을 체결해 맥주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세금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과거 태국 맥주 시장은 Singha corporation 및 Chang beer와 같은 대기업 맥주 회사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대기업 맥주 외에 수입 맥주 시장과 크래프트 맥주 시장도 크게 성장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맥주 시장의 전망은?
유럽 맥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시아 맥주들은 긴 역사 속에서 발전한 유럽 맥주보다 역사가 짧아 독자적인 스타일로 발전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맥주 역사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GDP(Gross Domestic Product) 성장과 인구 증가율 덕에 해당 지역의 맥주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대기업 맥주가 주를 이루던 동남아시아의 맥주 시장에서 소규모 양조장들의 상승세가 눈에 띈다. Southeast Asia Microbreweries Insight Report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동남아시아에서 소규모 양조장의 숫자는 주목할 만큼 증가했다. 특히 2015년에서 2017년 사이에는 소규모 양조장이 46개 에서 154개로 늘며 3년 사이 세배의 성장을 보였다.
소규모 양조장의 증가는 맥주 시장의 성장요인과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 국가의 GDP 성장과 함께 소비 여력이 늘어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맥주를 소비하는 젊은 세대가 늘어난 것에 기인한다. 기존의 대기업 라거 맥주만 주로 소비하던 기성 세대와는 달리 개성이 강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젊은 층의 의사가 반영되면서,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찾는 소비자 수가 증가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동남아시아 맥주 시장에도 넘어야 할 산은 있다. 정부의 세금 정책과 규제는 동남아시아 맥주 시장의 확대를 막는 큰 걸림돌이다. 특히, 맥주 특별소비세(The special consumption tax, SCT)의 증가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전반적인 추세로 자리 잡았다. 이외에도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 등 이슬람 국가의 알코올 규제는 동남아시아 맥주 시장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 시장은 매력적인 시장임이 분명하다. 현재 크래프트 맥주 시장을 선도하는 미국에서도 1919년 선포된 금주령이 끝나고 나서 40여 년 동안 대기업 맥주가 시장을 장악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1978년 홈브루잉 금지법이 폐지되면서 크래프트 맥주 문화와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5년 사이 크래프트 맥주가 눈에 띄는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남아시아도 몇 년 내에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크게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동남아시아가 전 세계 맥주 애호가들의 새롭고도 매력적인 맥주 관광지가 되길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