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풍미 : 당신이 잘 몰랐던 내 코와 혀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평생 맛을 보며 살아간다. 코로나19의 증상 중 하나로 후각과 미각이 무뎌 진다는 얘기가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의한 고통보다 후각, 미각 상실에 더 큰 공포를 느끼곤 했을 정도로 인간에게 있어 ‘맛보는 것’이란 매우 중요한 행위이다. 하지만 되려 너무 익숙한 행위여서인지 우리는 ‘맛보는 것’에 대해 그다지 깊게 알지 못하고 살아가곤 한다. 물론 모르고 살아도 인생에 큰 불편함은 없겠지만, 어차피 평생 할 행위라면 보다 잘 알아 두는 것이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로 오늘은 ‘맛보는 것’에 대해 깊게 이해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물론 철저히 맥주 중심적인 관점에서 말이다.
‘맛보는 것’의 중심은 뇌다
맥주를 입에 넣고 삼켜서 즐기는 일련의 과정은 겉으로 보기엔 매우 간단하나, 그 짧은 순간 동안 신체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매우 복잡하다. 맥주에 존재하는 온갖 화학물질들이 우리의 후각세포나 미각세포 등의 감각신경에 닿으면 ‘자극’이라는 것이 발생하고, 이는 신경을 타고 뇌의 여러 공간을 휘젓고 다니다가 뇌의 위쪽 인지부위로 이동한다. 여러 처리기지를 통해 몇 가지 처리 단계를 거치게 된 이 신호는 복잡한 과정 끝에 사고, 기억, 때에 따라선 언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맛을 보는’ 시스템들은 매우 원시적인 생명단계에서부터 음식과 음료에 대한 영양, 독성, 숙성정도 등의 정보를 보다 잘 구분할 수 있도록 진화하는 과정에서 발달했다. 즉 화학물질에 의한 감각(미각과 후각)은 꽤 원시적인 감각이므로 시각, 청각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처리된다. 가령 미각의 경우, 맛의 신호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뇌줄기(뇌간)로 간다. 뇌줄기는 호흡과 소화, 혈액 순환 등 무의식적인 생명 유지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이며, 우리가 좋아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인지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기도 하다. 또한 후각 신호는 뇌의 다른 원시적 부위인 감정과 기억에 관여하는 편도체와 해마, 시상하부를 찾아간다. 반면 시각과 청각 신호는 근육의 긴장, 운동 조절 같은 보다 고등한 행동을 담당하는 중간뇌(중뇌)로 연결된다. 그래서인지 미, 후각적 호불호는 시각적, 청각적 호불호에 비해 좀 더 본능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니 말이다.
이처럼 ‘맛보는 것’은 단순히 혀와 코만이 아닌 뇌가 중추가 되는 행동이다. 고로 맛을 보는 행위는 입에 음식을 넣고 씹으며 맛을 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입안에서 의 냉기, 온기 등의 촉감이 동시에 수반되고 이 감각들이 뇌에서 한데 모여 그동안의 경험과 기억, 문화, 가치관, 선입견 등과 버무려져 좋냐 나쁘냐 등의 감정까지 이끌어내는 복잡한 행위가 ‘맛을 본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맛보는 것’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선 이들 각각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미각
미각은 혀에서 주로 느끼는 감각이다. ‘주로’라고 표현한 것은 맛을 느끼는 수용체가 혀뿐만 아니라 인체의 다양한 기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맛’이라 표현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현재로선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 지방 맛 만을 포함한다. 이외에 소위 ‘사과맛’, ‘딸기맛’ 같은 것은 사실 맛이 아니라 향이 중심이므로 혀가 아닌 코가 주로 감지한다. 고로 우리가 보통 ‘맛을 본다’고 말하는 행위는 사실 맛(Taste)이 아닌 맛과 향,마우스필과 뇌의 영향까지 포함한 용어인 풍미(Flavor)를 본다고 말하는 것이 엄밀히는 훨씬 정확한 표현이다. 입에 영 달라붙진 않지만 말이다.
맛은 생존과 직결되는 정보를 제공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단맛을 좋아하고 신맛과 쓴맛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맛이 본능적인 영역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미각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져서 3가지 다른 경로를 통해 뇌와 연결되어 있을 정도다. 이 중 하나가 손상되더라도 다른 2가지 경로가 미각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맛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생존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한층 더 재미있고, 맛을 이해하기 용이 해진다.
1) 단맛
단맛은 모두가 잘 알다시피 당, 즉 탄수화물의 양을 알려주는 지표다. 뇌는 단맛에 지나치게 긍정적인 녀석이고, 덕분에 우리는 탄수화물 가득한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하며 과잉섭취를 하곤 한다. 따라서 어떤 음식이나 음료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단맛을 잘 사용해야 한다. 백종원이 괜히 설탕을 애용하는 것이 아니다. 맥주 역시 마찬가지긴 하나, 일부 스타일(페스츄리 스타우트, 스카치 에일, 도펠복 등)을 제외하곤 단맛이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는 잘 없다. 맥주는 반복 시음성이 굉장히 중요한 음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맥주는 쓴맛, 신맛과 조화를 이루게끔 적정량의 단맛만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진다.
2) 신맛
신맛은 수소 이온을 감지하면 느껴지는 맛이다. 신맛은 과일 숙성의 정도나 상한 음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척도이므로 생존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맛이다.
모든 맥주는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다. 일부 신맛이 강한 맥주(pH 3.0~3.8)를 제외하면 대부분 pH 3.8~4.5 정도의 신맛을 지니고 있다. 미각기관에서 신맛은 단맛, 쓴맛에 비해 굉장히 빠르고 예민하게 감지되는 맛이기에 어떤 풍미를 감추고 싶거나, 맥주 맛이 보다 직관적이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싶을 땐 신맛이 강하게 만든다. 반대로 단맛을 강조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드러내고 싶은 맥주는 신맛이 약하도록 만든다. 일례로 알코올 느낌은 신맛이 강할수록 더 많이 감춰진다. 덕분에 10도 가까이 되는 아메리칸 사워 에일에선 같은 도수의 임페리얼 스타우트에 비해 알코올 부즈 같은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3) 짠맛
짠맛은 나트륨 이온과 포타슘(칼륨) 이온을 감지하면 느껴지는 맛이다. 신맛과 마찬가지로 매우 빠르고 예민하게 감지되는 맛이 므로, 맥주에선 짠맛이 과할 경우 다른 맛을 방해하고 음용성을 굉장히 많이 떨어트린다. 때문에 맥주에서 짠맛이 거론되는 경우 는 많지 않으나, 단맛을 강조하기 위해 소량으로 종종 쓰이곤 한다. 가령 뉴 잉글랜드 IPA나 페스츄리 스타우트 같은 맥주는 단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소금이 자주 사용된다. 단짠단짠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일부 고제(Gose) 같은 스타일의 맥주에 소금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 경우엔 직접적으로 짠맛이 드러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딘가 좀 더 진하고 묵직하단 인상을 주곤 한다. 짠맛으로 인해 저해되는 반복 시음성은 신맛과 탄산을 통해 높여주고 말이다.
4) 쓴맛
쓴맛은 음식을 먹을 때 뭔가 독이 있거나 위험함을 알려주는 신호역할을 한다.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자연상에서 위험한 물질을 구분하는 능력이 보다 뛰어나야 했으며, 인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쓴맛을 구분하는 수용체가 무려 25가지에 달할 정도로 쓴맛을 다양하게 잘 감지할 수 있게끔 진화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맛 수용체가 40종 남짓이니 반 이상이 오직 쓴맛을 보기 위해 만들어졌단 것이 다. 이렇다 보니 쓴맛이 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감정이 들기 마련이며, 대부분의 음식에선 되도록 쓴맛을 배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맥주는 예외다. 맥주는 탄수화물 덩어리인 곡물로 만든 술이다 보니 단맛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반복 시음성이 좋지 않도록 만들었다. 적당량의 쓴맛이 존재하면 단맛을 저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과거의 양조사들은 쌉쌀한 맛을 내는 것들을 맥주에 넣어 보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쓰디 쓴 허브인 홉을 맥주에 넣는 방식에 안착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다양한 쓴맛 수용체를 지니고 있기에 여러 종류의 쓴맛을 구분할 수 있다. 홉은 식물들의 쓴맛 중 보다 부드럽고 달콤한(?) 쓴맛을 지니고 있었기에 맥주의 주 재료로 고정될 수 있었다.
홉을 쓰기 시작한 초창기 맥주들은 아마 그렇게 쓴맛이 강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쓴맛에 노출되며 쓴맛 나는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뇌가 학습하고 나면 쓴맛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많이 줄어들고, 쓴맛을 즐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자 이내 잉글리시 비터, 이를 넘어선 IPA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질색을 할 법한 쓴맛을 지닌 맥주들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는 맥주의 다양성을 넓히는 것에 한몫을 하게 된다. 물론 맥주의 쓴맛이 홉에서만 오진 않는다. 스타우트 등에 사용되는 검게 태우다시피 만든 맥아는 가열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락톤(Lactone)이란 화학물질을 지니고 있고, 이는 커피와 같은 쓴맛을 내게 된다. 하지만 홉이 주는 쓴맛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기에 맥주에선 홉의 쓴맛을 제외한 다른 쓴맛은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쓴맛은 신맛, 짠맛을 먼저 느끼고 난 후 단맛과 함께 가장 느리게 느껴지는 맛이다. 가령 아주 쓴 맥주와 조금 덜 쓴 맥주를 비교 시음해보면 둘 다 첫 10초정도는 쓴맛에서 그리 큰 차이를 느끼지못하곤 한다. 다소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존재감의 차이가 드러난다. 이렇다 보니 쓴맛은 단맛, 그리고 늦게 작용하는 마우스 필인 떫은 느낌과 상호작용을 주로 한다. 떫음과 쓴맛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다소 어려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쓴맛은 사람마다 감지하는 정도가 천차만별이다. 앞서 말했듯 쓴맛이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맛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애초에 쓴맛에 민감하도록 태어난 사람과 둔감하도록 태어난 사람도 있다. 전자는 인류의 약 20%(여성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에 해당하며 후자는 인류의 40%에 해당할 정도로 분포가 다양하다. 보통에 해당하는 사람이 40%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나이에 따라서도 쓴맛에 대한 민감도가 달라진다. 보통 어린 아이들은 어른보다 7배나 더 쓴맛에 민감하다고 한다. 과거엔 써서 먹지 못했던음식이나 약이 나이가 들어서는 먹을 만해졌던 경험은 다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과거엔 쓴맛에 민감하여 씁쓸한 와인 등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을 경멸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맥주에서도 가장 의견이 많이 갈리는 부분이 이 맥주가 너무 쓰다, 혹은 너무 안 쓰다, 단맛과의 밸런스가 좋다, 나쁘다 하는 부분이다. 쓴맛만 해도 이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미식을 취미로 삼고 사는 사람이라면 내 혀와 코, 그리고 뇌가 다른 사람과는 분명히 다름을 인지하고 상호 존중해 주어야만 한다.
이외에도 인간의 혀는 감칠맛, 코쿠미(Kokumi), 기름 맛을 감지할 수 있으며 추가로 칼슘과 일부 금속, 탄산, 물, 알코올까지 감지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 이들 모두 맥주와 연관이 깊은 성분들이니 연구가 진행될수록 맥주에 관해 추가로 밝혀지는 사실들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후각
후각은 주로 코에서 공기중의 분자를 광범위하게 감지하는 것을 말한다. 후각은 미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다만 인간은 여타 동물들과 달리 언어 및 시각적인 학습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생물이다. 1000가지 이상의 후각 수용체를 가지고 1조가지 정도의 아로마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이를 집어내고 구분하는 능력은 비교적 좋지 않다. 명확하게 언어화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후각을 발달시키기 위해선 개개인의 후각 자체에 대한 민감도도 중요하지만 충분한 경험, 기억,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향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인지한다. 첫째는 콧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냄새를 맡는 것으로 전비향(Orthonasal Olfaction, 전비강성 후각)이라고도 한다. 두번째는 입 안과 목 뒤 부분에서 코를 통해 인지되는 향으로 후비향(Retronasal Olfaction, 후비강성 후각)이라고 부른다. 전비향은 단순히 음식 또는 음료에서 휘발되는 분자를 코가 들이마심으로써 인지한다. 하지만 후비향은 조금 다르다. 입안에 들어온 음식이나 음료는 씹거나 입안을 휘젓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온도가 올라 휘발성 물질이 보다 많이 휘발되어 입 안에 향기 성분이 풍부해진다. 또한 침 효소와 입안의 박테리아에 의해 입안 물질이 분해된다. 이들은 많은 화학 성분을 분해하지만 여기에선 글리코사이드(Glycoside)라는 물질이 중요하다. 글리코사이드는 당이 비탄수화물 성분과 결합하여 생성되는 분자로, 글리코사이드가 분해되면 당이 붙들고 있는 향기성분이 결합에서 풀려나 입안에 배출된다. 이것이 주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홉의 아로마다. 홉의 향기성분은 휘발성이 매우 강해 보통 발효과정에서 이산화탄소와 함께 많이 손실되지만, 홉의 글리코사이드는 우리 입안에 들어갈 때까지 맥주에 온전히 남아있다. 기나긴 발효기간을 거치고도 어느 정도의 홉 향이 온존해 있는 건 글리코사이드 덕분인 것이다. 이렇게 생긴 입 안의 풍성한 향기물질들은 목 뒤로 넘어가 다시 코로 향한다. 이때 느낀 후비향과 혀에서 느낀 맛, 마우스 필이 더해져 뇌에서 풍미를 느끼는 것이다.
후각 역시도 사람에 따라 민감도가 각양각색이다. 어떤 사람에게 구역질이 날 정도로 버터향이 느끼하게 느껴지는 맥주가 다른 사람한텐 달달한 캐러멜 향이 나는 맥주로 다가올 수 있다. ‘페놀’이라는 물질은 바이젠, 벨지안 에일, 람빅 등에 있어서 고유의 독창적인 풍미를 제공하지만 최대 20%의 사람은 페놀이란 존재에 무감각하다. 이들이 페놀이 주된 역할을 하는 맥주를 마실 땐 어떻게 느끼는지가 굉장히 궁금할 따름이다. 또 인구의 약 10%는 디아세틸(Diacetyl) 또는 DMS 같은 한가지 이상의 맥주 이취를 맡지 못하는 반면, 이런 냄새에 상당히 민감한 부류도 있다.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으면 이러한 약점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는 있다. 맥주 심사자나 양조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떠한 면에서 둔감하고 예민한지를 경험과 훈련을 통해 잘 파악해둬야 한다.
마우스 필
마우스 필은 맛이나 향이 아니면서 입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3차감각이라고도 부르며 단순한 촉감, 뜨겁고 차가운 감각이나 질감, 민트의 화함, 고추의 매움, 떫음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알게 모르게 풍미에 매우 중요하게 관여하므로 같은 향과 맛을 지닌 음식이라도 마우스 필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홈 브루잉을 해본 사람이라면 같은 맥주라도 탄산화가 얼마나 됐느냐에 따라 맥주의 풍미가 달라지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맥주에서 눈여겨봐야 할 마우스 필은 몇 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는 바디(Body)다. 주로 맥주의 무게감, 밀도가 어느 정도 인지를 뜻하는 말이다. 꿀이나 설탕 등이 끈적한 느낌을 줘서인지 바디는 당에서 유래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맥주의 바디에 주로 기여하는 성분은 다름 아닌 단백질이다. 액체 속에 분산되어 있는 단백질은 서로 엉겨 붙어 일종의 망을 형성하고, 여기에 물 분자를 잡아둠으로써 점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바디를 형성하게 된다. 이를 두고 콜로이드 상태라고 한다. 이런 단백질의 함유량에 따라 바디가 무거운지(Full Body), 가벼운지(Light Body)가 나뉘게 된다.
또 하나는 크리미함(Creaminess)이다. 오일리(Oily)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밀, 귀리, 호밀을 사용하는 맥주에서 드러나는 질감으로 ‘바디’와는 달리 글루칸과 펜토산이라는 점착성의 복합탄수화물로 인해 나타난다. 일례로 호밀을 굉장히 많이 사용한 맥주를 만들어보면 크리미 함이 지나치기에 과장 좀 보태서 가래침(!)과 비슷한 정도의 질감을 주기도 한다. 때문에 부드러운 인상의 맥주를 만들고 싶을 때 주로 밀과 호밀, 귀리를 맥주에 소량 넣곤 한다.
세 번째는 떫음이다. 레드 와인의 경우 맥주에서 쓴맛의 역할을 탄닌의 떫음이 대체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떫음이 필수적이며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맥주에서 떫음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 음용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떫은 질감은 주로 폴리페놀이란 성분에서 기인한다. 많은 식물성 재료는 폴리페놀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 유명한 탄닌 또한 폴리페놀의 일종이다. 맥주에선 주로 보리의 껍질과 홉에서 폴리페놀이 기인한다. 그래서 양조과정 중에 최대한 폴리페놀이 맥주 내부로 용출되지 않도록 pH와 온도 등에 신경 써서 맥주를 만들곤 한다. 다만 홉의 특성이 굉장히 강조된 맥주에선 어쩔 수 없이 홉에서 기인한 폴리페놀에 의해 떫은 질감이 존재하기도 하며, 오크 통에 숙성시킨 맥주 또한 와인처럼 떨떠름한 탄닌감이 느껴 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탄산이다. 탄산은 단순히 입안을 다소 따끔거리게 만드는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정도에 따라 맥주의 인상을 상당히 좌우하곤 한다. 탄산이 많은 맥주는 상대적으로 맥주의 풍미를 단순하고 드라이하게 느껴지게끔 만든다. 이를 통해 음용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페일 라거가 탄산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많은 벨지안 에일들 또한 드라이한 느낌과 풍성한 아로마를 위해 탄산이 강하게 만들어지곤 한다. 반대로 탄산이 적은 맥주는 맥주가 부드럽고, 복합적이며 섬세하게 끔 느껴지도록 만든다. 대부분의 임페리얼 스타우트나 발리와인이 탄산이 적은 것이 이 때문이다.
다감각적 풍미 인식(Multisensory Flavor Perception)
맥주의 풍미를 다양하게 감각하고 서술하는 것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고 나면 스스로 꽤나 객관적이고 정밀한 입과 혀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현실은 쉽지 않다. 우리의 혀와 코, 그리고 뇌는 정말 미세한 화학적 변화에도 많은 것이 바뀌기 때문이다. 실제로 똑같은 화학물질임에도 농도나 주변 물질에 따라 다르게 인지되고 다른 풍미에 영향을 주는 사례가 굉장히 많다.
일례로 오 아미노 아세토페논(O-Amino-Acetophenone)이라는 물질은 10억분의 1 농도에서는 맥아의 향이, 100만분의 1 농도에서는 타코 냄새가, 수천 분의 1 농도에서는 포도 향이 난다. 이 성분은 실제로 포도 맛 음료에 사용되기도 한다. 맥주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세트산 에틸(Ethyl Acetate)이다. 이 물질은 효모가 만드는 흔한 에스테르(Ester)로 적은 양이 존재할 땐 에일 특유의 기분 좋은 과일의 풍미를 낸다. 하지만 다량 존재할 경우 매니큐어 제거제 같은 화학약품 냄새가 난다. 실제로 아세트산 에틸은 매니큐어 제거제의 한 성분이기도 하다.
또 ‘매트릭스 효과’라는 것도 있다. 풍미끼리 상호작용을 일으켜 서로 변화를 주거나 완전히 새로운 풍미를 일으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시는 커피다. 커피에서 확인된 풍미 물질만 900가지가 넘어가는데 이 중 그 어느 것도 ‘커피스러운 풍미’를 내지 않는다고 하며 어떤 물질이 ‘커피다움’에 기여하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맥주에서의 예시로는 베타 다마세논(ß Damascenone)을 들 수 있다. 이는 커피, 향수 업계에선 장미향을 내는 분자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장미꽃에도 들어있는 물질이다. 하지만 IPA와 같이 홉의 성향이 강한 맥주가 산화되었을 때 또한 베타 다마세논이 형성되며 이때 베타 다마세논의 풍미는 마치 블랙커런트같은 어두운 인상의 풍미로 표현되곤 한다. 또 DMS의 경우 보통 삶은 야채, 옥수수와 같은 풍미로 표현되나 어두운 색 맥주에서는 마치 토마토 주스 같은 풍미를 낸다고 표현된다.
이 외에도 한 화학물질의 존재가 다른 화학물질의 풍미를 가리는 현상, 반대로 한 화학물질이 추가되어 다른 풍미를 돋보이게 만드는 현상도 존재한다. 전자의 경우는 탄산이 풍부한 맥주가 풍미를 단순하게 만든다는 점, 후자의 경우는 단맛을 강조하기 위한 약간의 소금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우리나라도 맥주 씬이 커지다 보니 맥주를 깊게 즐기는 맥덕들의 수 또한 정말 많이 늘어났다. 좋은 일이다. 다만 맥주 커뮤니티를 보다 보면 간혹 자기 입맛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남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풍미의 세계란 너무나도 복잡하고 난해하므로 이 글도 맛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에 비하면 고작 겉핥기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제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맥주의 풍미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만이 옳고 남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되려 맥주를 잘 모르는 사람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건강하게 맥주에 대해 토론하고, 즐기는 문화가 보다 발전했으면 좋겠다. 거기에 이 글이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욱 좋겠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