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맥주의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는가? 맥주에 담긴 가치를 소비하다
현대 주류산업에서 맥주는 당당히 한 축을 차지하는 것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알코올 음료다. 전체 알코올 음료 소비의 3/4을 차지하는 맥주를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소비한다. 맥주라는 핵심 제품뿐만 아니라 몰트와 효모 등 가공된 원재료 제품을 소비하기도 하며, 맥주와 관련된 콘텐츠를 소비하기도 한다. 그리고 ‘맥주’라는 핵심 제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파생상품이 만들어지고 시장이 형성되며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소비된다. 이러한 소비는 다양한 형태를 보이는데, 이 모든 것이 ‘맥주’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맥주 소비의 변화: 알코올에 다양성과 가치를 불어넣다
대중들의 맥주 소비 행태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크래프트 맥주’라는 말의 출현이다. 오늘날 크래프트 맥주로 분류되는 맥주 스타일에는 특별할 것이 없다. 다만, 전 세계 맥주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 맥주’ 중에서 IPA나 페일 에일과 같은 크래프트 맥주의 대표적인 스타일을 찾아보기 힘들 뿐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난 20세기 산업 발전사를 요약하면 효율화와 대량생산을 중심으로 한 팽창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획일적이라고 할지라도 보다 값싸게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함으로써 더 큰 생산 규모를 만들어내는 구조였다. 이러한 산업의 발전 형태는 맥주 산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기업이 자동화된 시설을 통해 맥주를 생산하고, 많은 이익을 바탕으로 더 큰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해 가기도 하며,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려갔다. 더 쉽게, 더 많이 소비될 수 있어 대량생산에 적합한 맥주 스타일이 선택되어 전 세계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이때 선택을 받게 된 것이 라거, 그중에서도 밝은 색을 띤 페일 라거였다. 라거가 지배한 맥주 세계에서 나머지 맥주 스타일은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맥주 세계에 변화가 시작된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 있다. 1971년 영국에서 리얼 에일(Real Ale)의 부흥을 위해 시작된 소비자운동인 CAMRA(Campaign for Real Ale)와 1978년 미국에서 등장한 ‘크래프트 맥주’다. 공교롭게도 맥주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두 사건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호황기 끝에 찾아온 불황의 시기였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크래프트 맥주는 향후 맥주시장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단순히 취하기 위한 알코올 공급원 혹은 물 대신 마시는 낮은 알코올 도수의 음료로 기능하던 맥주를 미각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들이 시장에 선보여지며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해 왔으며, 이와 더불어 유럽 지역 전통 스타일의 맥주가 주목받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유럽의 전통 스타일 역시 대기업 맥주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나, 다양한 맥주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며 위기의 순간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래프트 맥주에서 강조하는 도전과 혁신의 정신은 새롭고 다양한 맥주를 등장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크래프트 브루어’라는 사람을 정의하고, 이들이 가져야 할 지향점을 정의함으로써 ‘크래프트 맥주’를 단순한 제품이 아닌 철학이 담긴 제품으로 바꾸어 놓았다. 결과적으로 맥주 산업 자체가 소비재 산업으로서 기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크래프트 맥주를 주로 소비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맥주 맛을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만의 고유의 문화를 공유하고 소비한다.
맥주 재료의 변신: 다른 산업과 손을 잡다
다양한 맥주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맥아, 홉 그리고 효모의 품종개발도 같이 발전하면서 농업을 비롯한 원재료 산업이 같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홉 산업의 성장이 매우 두드러졌다. 크래프트 맥주의 대명사인 IPA는 홉의 특성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다양한 홉 빌드를 통해 다채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홉을 다루는 기술만이 아니라 품종개량 기술, 홉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 등도 함께 발전하게 된다. 홉 품종의 숫자는 증가하게 되었으며, 현재 전 세계에 300여종 이상의 홉 품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이 흐르며 의료, 뷰티 등 다른 산업에서도 홉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홉이 가진 특정 성분을 이용한 화장품, 샴푸, 비누 등과 같은 미용 제품, 건강식품 등이 등장한다. 효모 역시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맥주 스타일별로 적합한 효모 제품이 시장에 선보여지고 있다. 탈모치료제, 피부미용 제품, 건강보조식품 등의 재료로도 활용된다.
이처럼 맥주 산업 발전으로 인해 재료 산업이 함께 발전하면서 맥주의 재료는 맥주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생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크래프트 맥주에 담긴 가치와 소비의 의미
도시농부들이 홉을 재배하는가 하면 과거 홉 경작지였던 강원도 홍천군에서는 당시 재배하던 홉 품종을 발견해서 토종 홉의 맥을 이으려 하고 있다. 또한 드라마 속 주인공이 크래프트 브루어리에서 일하는 것으로 설정될 만큼 대중에게 크래프트 맥주가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유럽의 어느 국가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설정이 생긴다는 것은 맥주가 단순한 알코올 음료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이자 흐름이라는 점을 내포한다고도 볼 수 있다. 맥주가 다양성을 갖추며 발전해가면서 ‘맥주 산업’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제품과 철학이 결합하고 문화가 형성되면서 단순한 생산과 소비의 반복을 벗어나 가치 있는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나라의 크래프트 맥주 산업과 수입 맥주 시장의 성장을 설명할 때 소비 경향이 가성비(價性比)에서 가심비(價心比)로 옮겨가고 있다고도 한다. 결국 소비문화의 중심이 양적인 측면에서 질적인 측면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단순한 제품을 넘어 무형의 요소인 ‘가치’가 소비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핵심 산업의 성장은 주변 산업의 성장을 도우며 또 다른 산업들과 연결되고 있다.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세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차별화된 가치를 담았다는 것이다. ‘크래프트’의 가치와 ‘맥주’를 만드는 사람 각자의 철학이 합쳐져 차별성을 만들어냈다. 소비자들 역시 맥주와 함께 가치와 철학을 함께 공유하고 소비한다.
우리는 맥주에 어떤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크래프트 맥주 역사는 10년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짧다. 그런데도 브루어리가 속속 문을 열어 현재 130개 이상의 브루어리가 성업하고 있다. 변화하는 소비 트렌드와 크래프트 맥주는 합을 잘 맞추어 성장해가고 있다. 그 속에서 브루어리뿐 아니라 전후방 산업에서도 새로운 비즈니스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향후 몇 년간 크래프트 맥주 비즈니스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소비자들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가 높은 데다 맥주 품질의 면에서도 빠른 성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크래프트 맥주는 맥주의 기본 재료인 맥아, 홉, 효모, 물에 철학과 가치를 더해 완성된다. 향후 몇 년을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 맥주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EDITOR_장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