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지식 플러스 맥덕기자의 맥주, 어디까지 마셔봤니?
나를 위한 지식 플러스 맥덕기자의 맥주, 어디까지 마셔봤니?
계절에 어울리는 맥주 맥주가 ‘여름용 술’이라고요?
“우리요? 한철 장사죠, 뭐. 여름이 1년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펍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애로사항을 들어보면 거의 비슷하다. 1년 중 맥주가 가장 잘 팔리는 계절은 당연히(?) 여름. 그러니까 이들은 여름 매출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맥주 특유의 시원하고 청량한 이미지와 맛 때문일 수도 있지만 1년 내내 맥주를 소비하는 서양인에 비해 한국인에게 맥주는 유독 ‘여름에 마시는 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다양한 맥주 스타일을 접해보지 못하고, 차갑게 마시는 500ml 페일 라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주는 매우 다양한 특징을 지닌 술이다. 차디찬 페일 라거 한 잔이 우리의 무더운 여름 나기를 피처링(fearing)해 준다면, 가을과 겨울에 더 적합한 맥주들도 있다. 자, 여기 가을과 겨울에 어울리는 맥주들을 소개한다.
가을에는 가을 맥주
술꾼들에게 술 한 잔 생각나지 않는 날씨가 있겠느냐만 포근한 가을 햇볕 아래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대낮에 맥주 한잔 걸치는 일은 1년 중 이맘때가 아니면 즐길 수 없는 사치다. 가을에 맥주를 마셔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특별한 시즈널(Seasonal) 맥주가 기다리고 있어서다. ‘수확의 계절’답게 다양하고 신선한 가을용 맥주들이 쏟아져 나와 전 세계 ‘맥주덕후’ 들을 설레게 한다. 이번 가을에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마실 수 없는, 맛있고 특별한 맥주들을 놓치지 않기를!
유럽 전통의 가을 맥주, 메르첸
메르첸 맥주는 빼놓을 수 없는 가을 맥주다. 메르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독일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를 겨냥해 출시되는 ‘축제용 맥주’로 잘 알려져 있다. 가을 맥주답게 불그스름한 단풍색을 띠고 맥아에서 오는 캐러멜류의 달콤함, 고소한 견과, 비스킷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인 비엔나 라거(엠버 라거) 계열 맥주다.
메르첸이 ‘가을 맥주’가 된 사연은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인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여름은 더위 때문에 맥주를 양조하기가 매우 힘든 시기였다. 온도가 높으면 부패에 관여하는 효모의 활동이 활발해져, 맥주가 금방 상해버리기 때문이다. 특히나 10도 이하의 저온에서 발효되는 ‘라거 맥주’ 양조는 날씨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에일보다는 라거 맥주 양조가 발달했던 독일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기 전인 3월에 맥주를 만들어 동굴 속과 같이 서늘한 장소에 보관했다가 가을에 마셨다. 메르첸은 독일어로 3월이라는 뜻이다. 오랜 세월 독일인들은 메르첸을 마시고 비로소 가을이 온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냉장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은 계절과 상관없이 원하는 맥주를 만들 수 있지만 오늘날에도 유럽과 미국의 많은 양조장들은 매년 가을, 메르첸 맥주를 출시하고 있다. ‘보스턴 라거’로 유명한 미국의 사무엘 아담스가 가을마다 내놓는 ‘옥토버페스트 비어’도 독일의 전통을 미국식으로 재해석한 메르첸 맥주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갈증이 줄어들기 때문에 여름에 마시는 가벼운 맥주보다 좀 더 묵직하고 몰트의 특성이 살아나는 고소한 메르첸 맥주가 잘 어울린다.
할로윈데이와 호박 맥주
10월의 마지막 날인 할로윈데이에는 호박이 들어간 ‘펌킨 에일’(Pumpkin Ale)을 마셔야 한다. 미국에서는 가을에 호박이 넘쳐나 도로 한켠에 쌓여 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추수감사절 음식으로 꼭 호박파이를 만들어 먹는 미국인들은 맥주에도 호박을 넣어 마신다. 펌킨 에일은 할로윈데이를 겨냥해 집중적으로 출시되는 완벽한 가을 맥주다.
펌킨 에일은 미국 크래프트맥주계 메이저급 양조장들이 가을마다 빼놓지 않고 출시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호박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펌킨 에일이 나오는 가을만 손꼽아 기다리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유독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맥주이기도 하다. 이는 펌킨 에일에 호박퓨레와 함께 정향, 계피, 생강 등의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호박에서 나오는 달콤함과 향신료 특유의 향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낸다.
펌킨 에일은 가장 미국스러운 맥주이기도 하다. 영국 식민지 초기 시절, 미국에선 양조에 쓰이는 주요 원료인 몰트가 아주 귀했다. 그 대신 쉽게 얻을 수 있는 옥수수나 호박, 사과 등을 맥주에 넣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호박 맥주의 기원이다. 1771년 미국 철학회(American Philoshophical Society)가 펌킨 에일 레시피를 처음 기록한 것만 봐도 호박 맥주의 역사가 꽤 오래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800년대까지 호박이 들어간 맥주는 미국에서 흔한 술이었다. 1920년대 금주령 이후로 자취를 감춘 호박 맥주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80년대 크래프트맥주 열풍이 시작된 이후다. 창의적이고 개성이 강한 맥주를 만들고자 했던 소규모 양조장의 양조사들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이 담긴 이 오래된 맥주의 레시피를 변주해 세상에 내놓았고, ‘할로윈에 마시는 맥주’라는 마케팅에도 성공하면서 펌킨 에일은 미국의 대표적인 시즈널 맥주의 하나로 굳어졌다.
할로윈이 미국 축제이다 보니 국내에선 펌킨 에일이 생소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매해 가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쉬운 이들이라면 꼭 맛봐야겠다. 맥주 맛에 반해 매년 호박 맥주가 나오는 가을만을 기다리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윈터 워머, 겨울 맥주
“날씨야,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
바람이 부쩍 불어 추워지는 초겨울, 주당이라면 쌀쌀한 출근길, 외투 단추를 잠그며 이런 생각을 한번쯤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갈증 해소 역할을 한다면, 겨울에 마시는 술은 우리 몸을 따뜻하게 데워 추위를 이겨내도록 도와준다.
겨울 맥주의 클래식, 스타우트(Stout)와 굴
가장 널리 알려진 ‘겨울 맥주’는 스타우트(또는 포터)다. 색깔은 석탄처럼 검고 커피, 다크초콜릿, 바닐라 등의 향이 나며 묵직한 바디감이 특징인 스타우트는 탄산이 강하지 않은 편이고 서빙 온도도 13도일 때 최상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어 겨울에 제격이다.
스타우트는 특히 겨울이 제철인 ‘굴’과 환상의 궁합을 자랑한다. 굴 알맹이를 입으로 쏙 빨아들이고 나면 굴 특유의 바닷내음이 밀려오면서 달큰한 짭잘함,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 퍼지는데 구운 보리에서 얻어지는 쌉쌀한 스타우트가 짭잘한 굴맛을 한층 살려주고, 비릿함은 잘 잡아준다.
‘스타우트+굴’ 조합의 원조는 영국이다. 과거 저소득층 영국 노동자들이 겨울철 일을 마친 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굴을 스타우트와 함께 먹었다고 한다. 아일랜드 서쪽 골웨이에서는 1954년부터 매년 성대한 ‘굴 축제’가 열리는데 이 이벤트의 메인 후원사가 세계적인 스타우트 맥주회사인 ‘기네스’(Guiness)다. 이쪽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스타우트와 굴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스타우트와 굴을 함께 먹는 문화는 전 세계로 퍼져 오늘날 ‘겨울 맥주’의 상징이 됐다. 미국에서는 ‘오이스터(Oyster, 굴) 스타우트’라는 이름의 크래프트 맥주도 나올 정도다.
우리에게 알이 꽉 찬 굴은 겨울철 최고의 술안주다. 익히지 않은 해산물 요리가 비교적 덜 발달한 서양에서도 오래전부터 생굴만큼은 즐겨온 것을 보면, 굴이야말로 일찍이 ‘글로벌 주당’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최고의 안주 아닐까. 우리가 굴에 초장을 찍어 소주를 곁들인다면, 스타우트를 먹을 때는 굴 위에 레몬을 살짝 짜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발리 와인 Barley Wine
또 다른 겨울 맥주는 발리 와인이다. 직역하면 보리와인이라는 뜻이다. 이름에 ‘와인’이 들어가 정체성에 의심을 받을 수 있겠지만 발리 와인은 포도를 사용하지 않은 완벽한 에일 맥주다.
그럼에도 와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알코올 도수가 와인(12~14%)과 비슷하고, 발효 숙성 과정이 보통 맥주보다 길어 와인 못지않게 복잡하고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 와인은 ‘스트롱 에일’(Strong Ale)이라고도 하는데, 이 역시 높은 알코올 도수를 뜻한다.
발리 와인은 1800년대 후반 영국의 브루어리들이 맥주의 부패를 막기 위해 많은 양의 맥아를 쓰는 방식으로 알코올 함량을 높여 만든 데서 유래했다. 1903년 최초로 발리 와인을 상업화한 영국의 배스(Bass) 브루어리는 당시 의학잡지에 “소화불량, 불면증, 빈혈로 고생한다면 발리 와인을 마셔보라”는 광고를 냈는데 ‘겨울철 특효약’으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브루어리들은 높은 알코올 도수를 내기 위한 맥아 원료비와 세금을 지속적으로 감당하지 못했고, 점차 발리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도 사라져 갔다.
발리 와인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도 역시 미국에서 크래프트맥주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영국의 발리 와인도 이때 되살아나 오늘날 최고의 ‘겨울 맥주’가 됐다.
발리 와인은 한두 모금만 마셔도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 겨울철 몸을 녹여주는 ‘윈터 워머’(Winter Warmer) 용으로 가장 적합하다. 발리 와인은 주로 호박색이나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색을 띠고, 수개월의 숙성 과정을 거치지만 미국과 영국 스타일은 약간 다르다. 영국 발리 와인은 홉과 맥아 맛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알코올 함량이 다소 낮은 편(8~10%)이다. 반면 미국식 발리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더 높고, 영국 발리 와인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홉이 들어간 것이 특징이지만, 이 또한 양조장마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발리 와인은 겨울에 출시된다. 발리 와인의 장점은 구입 후 길게는 몇 년 동안 보관해도 무방하다는 점이다.
바로 마셔도 좋지만, 병 안에서 숙성되면서 더 깊은 풍미와 의외의 맛을 보여줄 수도 있으니 발리 와인을 구입할 때는 ‘라거’처럼 제조일자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평소 “맥주는 많이 먹어야 취한다”며 맥주를 멀리해왔다면 올 겨울, 발리와인에 도전해보기를 바란다. 소량의 맥주로도 충분히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맥주 첫 한 모금의 맛을 당할 만한 것은 없다.”_존 스타인벡
EDITOR_심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