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창작촌의 수제맥주 펍 인테리어
공간으로 이야기하는 크래프트 정신
어떤 가게를 방문할 때 단순히 그곳의 제품을 구매하는 데 그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간이 풍기는 메시지나 이야기를 전달받기도 하며 총체적인 경험으로서 소비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가게 창업을 고려한다면 인테리어 구상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공업단지로 시작하여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며 ‘문래창작촌’으로 불려온 문래동에 최근 크래프트 비어 펍을 비롯하여 다양한 공간이 들어서며 들썩이고 있다. 문래동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크래프트 비어 펍 네 군데를 소개한다.
올드문래
문래동 명소의 중심에 있는 올드문래는 이름에서부터 문래의 옛 자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평일에도 웨이팅이 필수일 정도로 이곳에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맛있는 맥주와 음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공간이 가진 힘이 클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빈티지한 느낌의 공구와 소품들이 시선을 끌며 맞이하고, 내부로 들어가면 높은 천장에 얽혀있는 나무 골조들이 일제시대 때부터 있었던 건물의 옛 모습을 상상해보게 한다.
올드문래의 공간을 직접 설계하고 시공한 최문정 대표는 친환경 건축을 공부하다가 ‘나무’라는 소재의 매력에 빠져 집을 짓는 목수가 되었다. 문래동에서 나무 공방을 7년째 하며 지내던 중 우연히 방치되어있던 허름한 공장 건물을 발견했고,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 건물을 되살리고 싶다는 생각에 당시 예약해놓았던 비행기 표도 취소하고 지금의 올드문래로 재탄생시키게 되었다.
음식, 브랜드 디자인, 내부 공사 등 올드문래의 상당 부분은 문래동 사람들이 함께한 결과다. 최문정 대표는 문래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로 올드문래를 채우는 일이 큰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문래동이 예술촌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그런 이미지를 기대하고 외부에서 문래동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예술가를 직접 만나거나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에요. 그래서 문래동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문래 예술촌을 이루는 사람들 사이의 접점이 되고 싶었습니다.”
올드문래의 첫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는 계속해서 버려지는 물건들을 구해와 가공하고 재탄생시켜 가게에 채워 넣고 있다. “재화가 범람하고 있어요. 귀한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물건을 쉽게 쓰다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새로 만들어낼 수 있어도, 오래된 것은 절대 만들어낼 수 없어요.”
문래동에서 지내며 그가 새로이 발견한 소재는 바로 ‘철’이다. “철이 아주 친환경적인 소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원하는 대로 녹이고 용접하면 나무로 구현하지 못하는 것을 만들어내 또 다른 방식으로 재활용할 수 있거든요. 나무든, 철이든 버릴 건 하나도 없어요.”
최문정 대표는 누군가 수제맥주 펍을 차리는 일을 두고 '종합예술'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그만큼 다방면으로 신경 쓸 것이 많다는 이야기다. 또한 단순히 트렌드를 따라가기보다는 아이덴티티(identity)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집이나 다른 공간에서 느끼지 못한 것을 경험하길 기대해요. 한 번 온 사람이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진정성은 언젠가 통한다는 생각으로 걸어왔는데, ‘진정성’이라고 하는 걸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시대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웨이브스
80년 된 철공소를 개조하여 만든 웨이브스는 2011년부터 문래동에서 조각가이자 설치미술 작가로 활동해온 이대석 대표가 직접 인테리어했다. 하와이 휴양지 컨셉으로 재구성한 이곳에는 모래사장의 곡선과 높낮이, 물결의 반짝임, 채광이 들어오는 낡은 해변 같은 느낌이 표현되어 있다.
“옛날에는 창작촌이었는데 상권이 생기면서 작업실을 옮겨야 하나, 쫓겨나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혼을 하면서 인테리어 디자인 일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컨셉, 메뉴, 공간을 고민하며 창작의 관점으로 인테리어에 접근했죠.”
이대석 대표는 딸의 이름도 하와이 인사말 ‘알로하’에서 따왔을 정도로 하와이에 큰 애착이 있다. 하와이 맥주도 워낙 좋아해서 처음부터 염두에 뒀고, 밀맥주나 골든 에일 등 가볍고 청량한 맥주 스타일이 이 공간에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문래동이라는 동네 자체가 소재와 재료의 측면에서 차갑고 무거운 느낌이 있잖아요. 동네가 무게감이 있는 편인데, ‘이런 곳에 왜 이런 곳이?’라는 느낌을 공간을 통해 주고자 했습니다.”
또한 지역 예술가로 활동했던 만큼 공간 자체가 문화적인 역할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 좌석을 관객석처럼 보이도록 구상하였고, 기회가 될 때면 공연도 진행하고 있다.
그의 인테리어 과정은 돈으로 단시간 내 완성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기 힘든 것을 어떻게 시간을 써서 잘 만들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자본을 가지고 스타일을 고민한 게 아니라, 공간 자체와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한 것이다. “저의 노동력으로 승부를 봐야 했기 때문에, 5개월 반 동안 세를 엄청나게 까먹으면서도 주변의 흔한 풍경과는 차이점을 두려고 했어요. 결과적으로 공간에 값어치도 있고, 정도 들었고, 자부심도 있죠.”
그는 직접 가게 시공을 하진 않더라도 특별한 공간을 만들길 원한다면 가게에 대한 자신의 주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원래 인테리어 관련 일을 하던 분이 아니라면 직접 다 시공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공간에 어떤 의미를 담고 싶은지 고민해야 그런 걸 실현해줄 수 있는 사람도 찾을 수 있겠죠. 그냥 예산을 정해서 적당히 예쁜 걸 골라 진행하는 게 아니라,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충분히 고민해야 일을 진행할 때도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어요.”
비어바나
문래동 우체국 옆 골목에는 수제맥주 양조장이자 펍인 비어바나가 있다. 멋진 루프탑 경관을 자랑하는 이 건물은 원래 1층 철공소, 2층 가정집, 지하는 다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어(Beer)’와 ‘너바나(Nirvana)의 합성어인 비어바나, 즉 맥주를 통해 열반에 다다른다는 의미를 담은 이곳에는 원래 있던 쇠기둥과 호이스트(hoist) 등 건물의 옛 흔적 위에 고산홍 작가의 작품이 어우러져 있다. 건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작품에는 맥주와 빛, 원형, 재생 등 그가 해석한 열반의 이미지가 녹아 들어있다.
공간의 전체적인 설계를 맡은 전혜림 디자이너는 건물이 지닌 고유의 구조를 되도록 남겨두고, 덮어버리는 것은 최소화하고자 했다. 또한 ‘채움’과 ‘비움’이라는 키워드로 공간을 재해석하여 문래동 전경이 보이는 옥상을 비워진 공간으로, 1층 공간을 채워진 공간으로 생각하고 작업을 진행했다.
두 사람은 공간의 흔적을 남겨두는 일이 멋져 보이거나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측면에 더해 최소한 이 공간의 시간성을 인정하는 제스처라고 여겼다.
“작업할 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곳의 시간이 쌓여있는데 내가 감히 손을 대도 되는 걸까? 그래서 최대한 공간이 지닌 가치를 존중하려고 해요. 내가 새로 만든다는 느낌보다는, 시간 속에 점을 얹는다는 느낌으로요.” 지역과 장소에 쌓여온 레이어를 인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해석을 가미하는 태도가 창작활동에서는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인테리어를 진행하다 보면 기능이나 예산에만 치우쳐서 만들기가 쉽기 때문에, 공간을 찾는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주고 싶은지 핵심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창업자가 가진 일관된 맥락을 주장하고 진행해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몫이다.
“그냥 ‘빨간색을 좋아하니까 빨간색으로 칠해야지’ 내지는 ‘여기는 커피집이니까 흰색으로 할 거야’가 아니라, 문고리 하나를 하더라도 이미지와 컨셉에 맞도록 해야죠.”
고산홍 작가는 창작자들과 철공소들이 함께 만들어온 문래동의 이미지는 마을의 공동 자산임을 언급했다. “문래동의 예술가들이 닦아놓은 바탕이 있었고, 그런 이미지를 소비하러 오기 시작한 게 지금의 문래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에서 자본이 들어오면 그 맥락을 인정해야 하고, 서로 이익을 공유할 방법을 고민해봐야겠죠. 단순히 장사하는 게 아니라, 동네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산홍 작가와 전혜림 디자이너가 함께 만든 독특한 공간은 문래동에 비어바나 말고도 ‘문 라운지펍’과 ‘비어포스트 바’가 있다. 비어바나와는 또 다른 느낌의 공간들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브루스카
펍과 홈브루잉 공방을 한 공간 안에서 운영하는 브루스카 이석하 대표는 두 가지 용도로 분리된 구조의 공간을 찾고 있었다. 때마침 발견한 이곳은 예전에 방이 여러 개 딸린 짜장면집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ㄱ’자 구조였고, 마침 주방으로 쓰이던 안쪽을 홈브루잉 공간으로 사용하게 되었어요.”
전체적으로 두꺼운 나무의 재질이 무게감과 안정감을 준다. 문래동의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오래된 물건들을 구하러 다니고 목공을 거친 결과다. 인천에 있는 목재 수입 회사에서 직접 통나무를 실어오고, 영등포 청과물 시장에 쌓여있는 오래된 나무 팔레트를 가져오고, 문래동 여기저기에서 쓰던 물건들을 구해오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이 옛날 것을 많이 찾기도 하잖아요. 워낙 세련된 것들은 흔하니까요. 예를 들어 이 건물의 구조처럼 기둥이 통째로 안에 들어와 있는 형태는 요즘 건물에서는 절대 볼 수 없거든요.”
시공을 직접 진행하면서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인테리어 전문가도 아니거니와, 문래동의 느낌을 살리고자 공을 들이는 과정에서 시간도 6개월이나 소요됐기 때문이다. 인테리어 업체에서 견적을 열 군데 넘게 받아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전형적인 ‘요즘 펍’들의 예시밖에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처가 다 공장 단지인데 그런 컨셉으로 하면 너무 이질감이 들 것 같더라고요. 가격대가 너무 높았던 것도 직접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목공을 잘 알고 있는 올드문래의 최문정 대표를 비롯해 주위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그의 옆에 붙어 도움을 줬다. 문래동에서 그림 그리는 예술가들을 소개받아 건물 외벽에 그라피티 형태의 그림을 의뢰하기도 했다.
이석하 대표는 인테리어 전공자가 아니기에, 해외 사이트에서 펍 이미지를 많이 찾아보고 참고하며 한국에서 실현할 수 있는 부분과 접목하려 애썼다. 또한 건물을 계약하고 나서 다녀온 2주간의 미국 브루어리 투어도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인테리어 업자에게 일괄적으로 맡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족도가 높아요. 특히 공방과 펍을 같이 하기도 하고, 워크인 냉장고와 발효실이 붙어있는 구조라서 동선이 중요하거든요.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었던 게 큰 장점이었어요.”
문래창작촌은 거리에 전시된 철제 작품과 벽화, 그리고 오래된 철공소의 풍경 등으로 유명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한 곳이다. 이웃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스스럼없이 손 내밀고, 즉흥적으로 모여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문래동 안에서 크래프트 맥주가 발현할 새로운 형태의 창작 역시 기대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