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맥주가 따라져 나오기까지
흔히 떠올리는 ‘맥주’의 이미지는 유리잔 가득 거품과 함께 채 워져 있는 한 잔의 드래프트 맥주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드 래프트 맥주 한 잔의 모습은 어느 가게를 가나 비슷하겠으나 그 한 잔에 들어가 있는 노력과 정성은 가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고, 당연히 맥주의 맛 또한 그에 따라 달라진다. 과연 한 잔의 맥주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따라져 나오는가. 그리고 어 떠한 노력이 그 뒤에 숨겨져 있을까.
맥주 한잔은 케그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맥주는 생산과 동시에 맛이 변하기 시작한다. 제아무리 어마 어마하게 맛있던 맥주라 할지라도 유통과정이 잘못되면 변질되 버려서 이취(Off-flavor)가 생기거나 심하면 맛이 달라져 버리기도 한다. 이때 맥주에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대표적으로 빛과 산소, 다른 미생물로 인한 오염, 온도가 있으며 이들에 의한 변질을 막기 위해 맥주는 케그(Keg), 병, 캔 등에 담겨서 이동하게 된다.
이중 케그는 쉽게 말해 맥주를 담고 있는 큰 통을 의미한다. 플라 스틱, 스테인리스 등 재질이나 형태에 따라 여러 종류의 케그가 존 재하며 맥주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산소와 빛, 미생물을 차단하 기 위해 밀봉되어 있는 상태로 유통된다. 이때 케그로도 어쩌지 못 하는, 맥주의 품질에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요소가 바로 온도이고 더 좋은 맥주를 손님에게 공급하고자 하는 노력은 케그의 온도를 얼마나 꾸준히 저온으로 유지해 주는가에서부터 갈리게 된다.
장비 하나에서도 차이를 볼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맥주 보관법은 당연히 배송과 동시에 냉장시설에 넣는 것이다. 더 좋은 맥주, 더 맛있는 맥주를 손님에게 제공하는 것이 목적인 크래프트 맥주 펍들은 대부분 맥주의 관리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므로 냉장고나 워크인(Walk-In, 사람이 직접 출입 하여 물품을 꺼내거나 보관할 수 있는 창고) 형태 등의 확실한 냉 장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맥주 품질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낮 거나 비용의 문제, 공간의 문제 등으로 제약이 있는 가게는 상온 에 맥주를 보관해두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 따라 어떤 맥주 서브 (Serve) 장비를 사용하는지가 달라지며 대표적으로 냉각기와 케 그레이터(Kegerators)를 많이 사용한다.
냉각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상온에 보관중인 케그의 맥주를 차 갑게 따를 때 쓰는 장비다. 내부엔 자체적인 냉각장치와 굉장히 길 고 구불구불하게 꼬인 코일 형태의 관이 존재한다. 상온에 있던 맥 주가 이 관을 지나는 동안 냉각되어 나오게 된다. 문제는 맥주 자 체를 상온에 보관하므로 맥주의 맛이 변질될 가능성이 높을 뿐 아 니라 냉각기는 다른 맥주 서브 장비들에 비해 청소가 어려우므로 내부가 청결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곳을 지나서 나온 맥주라면 맛이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맥주를 순 간적으로 냉각시키는 것이 전부인 기계인지라 디테일한 온도 관 리도 어렵다. 때문에 맥주의 품질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크래프 트 맥주 펍에선 냉각기 사용을 꺼리는 편이다. 냉각기를 사용하는 곳 중에는 대기업 맥주를 취급하는 곳이 많으며, ‘우리나라 대기업 맥주는 맛없다’라고 하는 말에 한몫을 하는 주된 요인이 되기도 한 다. 다만 맥주 소비량이 많고 맥주 순환이 빨라 신선한 맥주를 제 공해주는 인기 있는 가게나 내부 청소를 꾸준히 해주는 곳이라면 냉각기를 사용함에도 맥주가 맛있을 수 있다. 손님 많은 호프집의 맥주가 유독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케그레이터는 냉각기의 단점을 보완하는 맥주 서브 장비이다. 자 체적인 냉장고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 케그를 보관함으로써 맥주 를 신선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때문에 별도의 냉각과정도 필요 가 없고 짧은 관을 통해 바로 맥주를 따라낼 수 있어 내부 청소 또 한 용이하다. 맥주의 종류에 따라 세세한 온도조절도 가능한 케그 레이터도 있.으므로 비용과 공간의 문제만 없다면 가장 이상적인 맥주 서브 장비이다. 다만 취급하는 맥주의 가짓수가 많은 크래프 트 맥주 펍들은 맥주마다 일일이 케그레이터를 마련하는 것이 비 효율적인지라 워크인에서 직접 맥주를 끌어오거나 큰 냉장고를 개조하여 탭(맥주를 따르는 꼭지)을 다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곤 한다. 이 경우 각 맥주별로 섬세한 온도 조절은 힘들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한 잔의 맥주는 따름으로써 완성된다
맥주를 따르는 것(일명 푸어링, Pouring)은 단순히 얼마만큼 맥주 를 따르고, 거품을 얼마나 내는지 등 맥주의 외견을 만들어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맛과 향에도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하이네켄, 기네 스 등 여러 브랜드가 맥주 따르는 방식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 고 있는 것이다.
맥주를 따르는 방식에 따라 맛과 향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맥 주에 풍미를 주는 물질들 중엔 휘발성을 가진 물질들이 많이 존 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IPA나 미국식 페일 에일에 서 주로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홉의 향이다. 홉의 향은 홉 내부의 에센셜 오일(Essential Oil)을 맥주 속에 녹여낸 것으로 가만히 놔 둬도 알아서 향이 조금씩 빠져나갈 정도로 휘발성이 강하다. 때 문에 맥주를 격렬하게 따르게 되면 맥주 안에 녹아 있던 향기 성 분이 탄산과 함께 맥주로부터 휘발되어서 코에서 느껴지는 향은 풍부하지만 입안에서의 풍미는 다소 부족한 맥주가 되어버린다. 반대로 맥주를 차분히 따르게 되면 향은 좀 덜 느껴지지만 입 안 에서의 풍미는 풍부한 맥주로 만들 수 있다. 믿기지 않는다면 IPA 한 병을 사서 절반은 거품이 많이 일 정도로 낙차를 굉장히 크게 두고 따르고, 나머지 절반은 다른 잔에 대고 천천히 따라본 뒤 비 교해서 마셔보도록 하자. 생각보다 명확하게 차이가 느껴질 것이 다. 여담이지만 사실 맥주를 따를 때 적당한 양의 거품이 존재해 야 한다는 것도 이러한 이유가 크다. 거 품이 산소와의 접촉을 막아서 산화를 방 지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긴 하나 맥주 한잔 마시는 시간동안 산화가 되어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그보다도 거 품이 맥주가 입에 닿을 때의 촉감을 부 드럽게 해주고, 거품이 형성되는 과정에 서 맥주 안에 녹아 있던 향이 풍부하게 올라오기 때문에 적절한 양의 거품을 형 성시키며 따르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이다. 어찌됐건 실력 있는 맥주 서버 는 이러한 향과 풍미의 밸런스를 의식하 며 맥주를 따라 내고 잔을 기울이는 정 도, 잔의 청결도, 맥주와 어울리는 잔의 형태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여 한 잔의 맥주를 따라 낸다.
여기까지만 해도 생맥주 한잔 마시기 참 복잡하네 라는 생각이 들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저 겉만 핥은 정도이며 깊숙이 들어 가면 가스나 청소, 장비 및 케그 관리, 잔 관리 등 펍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숙지하고 신경 써야할 요소들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여 러분들이 그걸 모두 다 알아야할 필요는 없으나 펍에 종사하는 사 람들이 이러한 노고를 거쳐 가며 맥주를 따라 내는 건 그저 여러분 이 맥주를 마시고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쯤 은 알아 주시길 바란다. 질 좋은 맥주에 대해 제대로 된 찬사를 보 내는 것, 그것 하나면 보답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EDITOR_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