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로 가치를 이야기하다
맥주 업계에서 가장 선망받는 직업은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맥주를 만드는 장본인, 바로 양조사가 아닐까? 과학적 지식과 창의적 사고를 동반하여 섬세한 미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양조사는 이 여름날 가장 더운 곳에서 누구보다 땀 흘리며 일하는 육체노동자다. 크래프트 맥주에 푹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기만의 맛있고 특별한 맥주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어 마시는 상상을 해보았을 법하다. 우연히 마신 맥주 한 잔의 감동에서 막연히 양조사의 길을 생각해본 경우도, 취미로 시작한 홈브루잉에서 전문 양조사의 꿈을 품게 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해외 유명 브루어리의 창립 신화나 전설적인 맥주의 탄생 일화 속에 양조사라는 직업은 더욱 매력적으로 비친다.
그러나 양조사로 사는 것이 멋지기만 하진 않다.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이듯, 양조사가 감수해야 하는 고충은 만만치 않다. 상황에 따라 의도와는 다른 맥주를 만들게 될 수도 있고, 위험한 근무 환경에 장시간 노출될 가능성도 크다. 맥주 양조사의 다양한 이면을 알아보기 위해 브루독 코리아 양조사 민성준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양조하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각오를 강조하는 한편 맥주 양조가 갖는 의미를 이야기했다. 폭염이 절정에 달한 7월의 어느 날, 맥주 양조사 민성준 씨는 바이크를 타고 문래동에 나타났다.
민성준 씨는 여러 맥주 애호가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 이태원 펍 사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맥주 시음과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당시 몇 없는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 중 하나였던 히든트랙에서 주말 양조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1년 넘게 일하며 그는 ‘주말 양조사’ 이상의 역할을 했다. “주말 양조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맥주를 다 만들었어요. 일손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갈 때만 맥주를 만들었거든요.” 이후 충남 아산에 있는 브루어리 304에서 2년 넘게 일하며 입지를 다졌다. 특히 그가 만든 블론드 에일은 트렌디하고 산뜻한 맛으로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양조 업무와 별개로 홈브루잉 강좌나 시음회 등 교육 프로그램을 맡아서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밟아온 맥주 양조의 길은 지금 그에게 평생 이어갈 직업이 되었다. “‘어떻게든 맥주로 먹고 살겠지’라는 강한 믿음이 생기면서, 이 일은 평생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산다는 데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어요.” 민성준 씨는 최근 국내에 펑크 IPA로 잘 알려진 영국 브루어리 브루독(BrewDog)에서 일하게 됐다. 영국에서 두 달간 짧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앞으로 이태원에 새로 생기는 브루독 코리아 브루펍에서 맥주 양조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그는 크래프트 맥주 양조의 가장 큰 매력으로 맥주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꼽았다. 마치 드라마 속 인물을 만들어내듯, 맥주를 만들 때마다 스토리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가장 재미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색이 까맣고 도수가 높은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만든다면, 밝고 쾌활한 이미지보다도 어둡고 무거운 캐릭터를 투영해볼 수 있잖아요. 이 맥주가 어떻게 소비됐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전반적인 스토리를 디자인하고 맥주를 만드는 과정이 되게 재미있어요.” 그렇다면 가장 힘들거나 답답할 때는 언제일까? 그는 만들고 싶지 않은 맥주를 계속해서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대체로 양조사들이 가장 힘들어한다고 전했다.
“만들고 싶은 맥주만 만들 수는 없어요. 고용된 사람으로서 회사 내부 사정에 따라 만들어야 할 맥주가 있고, 만들 수 없는 맥주가 있으니까요.” 그가 말하는 것은 주로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의도치 않은 결과물을 내놓게 되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내가 만들고 싶은 맥주는 효모가 이렇게 컨트롤되고 홉은 이렇게 보관되는 상태에서 만들 수 있는데, 그런 환경을 보장해주겠다는 회사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거죠. 또는 직급이 높다는 이유로 양조사에게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잘만 해왔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러느냐’라며 훈수를 두는 경우도 있어요.” 특히 여기저기서 자신이 만든 맥주 맛을 평가받을 생각을 하면 양조사가 느끼는 부담은 배가 된다. “나는 이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말 못 할 사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만든 맥주로 욕을 먹기도 하죠.”
또한 맥주를 만드는 문제에 있어 회사와 양조사의 입장에 마찰이 생길 때, 맥주 지식이 부족한 운영진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 역시 큰 난제라고 말했다. “보통 회사 운영진은 맥주 관련 지식이 별로 없는데, 맥주 하나를 만들기 위해 그들을 설득하고 얘기해서 풀어나가는 과정이 정말 힘들어요.” 운영진과의 마찰을 피하기는 어렵다. 양조사는 단지 맥주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높은 품질의 맥주를 만들고자 이 일을 선택한 데 비해 회사 측에서는 숫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의 차이로 인해 항상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분들은 무형의 것을 안 믿어요. 그런데 크래프트 맥주는 무형을 엄청 믿어야 하는 가치 산업이에요. 물론 숫자도 경시하면안 되겠지만, 상황에 따라 가치와 숫자 사이에서 경중을 따질 줄 알아야 하거든요. 일반 기업 논리로 접근하는 경우에는 견디기가 힘들더라고요.”
양조사로 일하기 위해서는 맥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당연히 많은 맥주를 마셔봐야 한다. 하지만 무작정 많이 마시다 보면 통장이 ‘텅장'이 된다는 부작용이 있다. 민성준 씨는 양조사가 되면서 점차 변화한 자신의 맥주 시음 방식을 공유했다. 그에 따르면, 어느 정도 시음 경험이 쌓인 뒤부터는 ‘시음을 위한 시음’ 보다는 ‘양조를 위한 시음’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맥주 스타일을 아직 잘 파악하지 못할 때라면 많이 마셔보는 게 도움이 돼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마시고 시음기에 ‘망고’나 ‘파파야’ 같은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는 맥주가 ‘무슨 맛’인지 알기 위해 시음하기보다는 ‘왜 이런 맛’이 나는지 원인을 추측하는 습관을 들였다. “느껴지는 맛이 이취(Off-flavor)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왜 아닌지, 단지 낯선 맛이라면 어디서 오는 맛인지를 생각하는 게 훨씬 재미있어요.” 또한 그는 홈브루잉과 상업양조의 핵심적인 차이를 짚었다. “홈브루잉 과정은 단순하지만, 양조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건 맞아요. 근데 그게 양조의 전부는 절대 아니에요.”
큰 배치로 진행하는 상업양조는 유통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내 맥주를 선보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매번 새로운 맥주를 만드는 홈브루잉의 경우 결과물이 일정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맥주의 품질 관리(QC)를 냉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양조장에서는 꾸준히 만드는 맥주 라인업을 보유하고 있고, 배치마다 품질의 차이가 발생했을 때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는 일의 연속이다. 그리고 홈브루잉에 필요한 작은 단위의 맥주 재료는 국내에서 구하기가 쉽지만, 상업양조 규모의 재료 수급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액상 효모는 워낙 예민해서 취급이 어렵고 값도 비싼데, 수입하는 입장에서 순익이 얼마 남지도 않고 수요는 충분치 않아서 수입되는 품목 자체가 적어요.” 한정적인 재료로 일정 수준 이상의 퍼포먼스를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끝으로 소심하거나 말수가 적은 성격이라고 해서 양조사로 일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업계에 잘 알려지는 것이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자기 PR 및 브랜딩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전했다.
맥주를 만들 때 스타일을 먼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맥주를 왜 만들 것이고 무슨 의미를 담을 것인가를 먼저 떠올리고 싶다는게 요즘 그의 생각이다. 물론, 최종 결과물의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가장 본받고 싶은 양조사로는 영국 커널 양조장의 에빈 오라이어던을 언급하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인생을 쓰고 몰두하는 자세야말로 가장 멋지다고 했다.
또한 향후 다양한 단체와의 협업을 추진함으로써 맥주가 단순히 즐기는 ‘음료'를 넘어 ‘의미’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요식업계 안에서만 컬래버레이션을 할 게 아니라,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뜬금없는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서 그들의 철학을 이해하고, 그걸 맥주로 담아내는 작업을 이제는 해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자신을 맥주 스타일로 표현한다면 무엇인지 묻자, 역시나 양조사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세종(Saison)’이 되게 특이해요. ‘세종 이스트(Saison Yeast)’라고 하는 그 효모가 안을 들여다보면 ‘믹스트 컬쳐 이스트(Mixed-Culture Yeast)’, 즉 여러 세대가 섞여 있는 모습이에요. 한 가지 종류가 아니라, 여러 가지 균과 효모가 섞여 있는 형태거든요. 상업적으로 반듯하게 출시되어있어서 모든 게 확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서 ‘와일드 비어(Wild Beer)’와 같은 여러 다른 특성이 나타날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확신이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안 그럼 재미가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