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 잔이 사회를 바꾼다 - 맥주 업계에서 번지는 기부의 움직임
지금 우리가 마시는 맥주 한 잔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가끔은 맥주 한잔을 마시는 것이 단순히 즐거움을 주는 것을 넘어 세계적인 환경,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부나 지역 사회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주류회사의 기부는 예전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일환으로 실행되고 있다. 기업은 주변 환경과 수많은 이해 관계자에 의해 예민한 영향을 받는 조직이다. 이윤 추구만이 기업의 꾸준한 성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물건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심각하게 자원을 파괴한다든지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의사결정을 일삼는 기업이라면 소비자는 결국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특히, 주류의 경우 생활에 꼭 필요한 필요재가 아닌 사치재의 성격이 강하기에 소비자의 민감도에 더욱더 크게 반응한다. 그때문에 주류회사가 공공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것은 사회조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뿐만 아니라 기업의 이미지 재고와 재정적인 이익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자원과 생태계 보전을 위한 기부활동
2018년 최악의 산불로 손꼽히는 캘리포니아 산불은 무려 12만2,000ha의 산림을 파괴했다. 이에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시에라 네바다 브루어리는 산불 피해를 돕기 위해 전국적 규모의 모금 활동을 주도했다.
1,400개 이상의 미국 브루어리가 산불 피해를 돕기 위한 맥주 Resilience IPA를 양조했으며, 이 IPA는 전국 도소매점에서 17,000배럴이 팔렸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의 산불 피해 지역의 장기적인 재건 사업을 돕고자 수익금의 100%를 Sierra Nevada Camp Fire Relief Fund에 기부했다.
국토의 70%가 산인 한국에서도 2019년 속초와 고성 지역에서 큰 산불이 발생했다. 며칠간 잡히지 않는 불길에 수많은 이재민이 속출하고 큰 재산피해를 입었다. 속초에 있는 브루어리 크래프트 루트는 속초 및 고성 시민들을 위해서 자선기금 마련 행사를 열어 행사 당일의 수익 모두를 이재민에게 전달했다.
한편, 2019년 9월 발발해 6개월 간 지속된 호주 산불 피해를 돕기 위해 최근에 국내 크래프트 브루어리와 펍이 협력해 기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기부를 위해 2월 중순 뭉친 브루어리와 펍 관계자들은 제주도의 맥파이 양조장에 모여 기부금 모금에 쓰일 맥주를 양조했다. 직접 양조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팀도 펍에서 최소 세 케그 이상 판매하기로 약속해 기부에 동참했다. 맥주 원재료 수입업체인 브루소스인터네셔날은 이번 맥주 양조에 필요한 모든 몰트와 홉을 기부했다.
이 맥주를 판매한 수익금 전액은 산불 피해로 고통받는 호주의 야생동물들을 돕기 위해 스티브 어윈(Steve Irwin) 가족이 운영하는 호주 동물원에 기부할 예정이다. 스티브 어윈은 TV프로그램 <악어사냥꾼>으로 유명한 호주의 환경운동가 겸 방송인으로 그의 가족들도 동물보호를 위한 기부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는 맥파이, 서울브루어리, 고릴라, 칠홉스, 화이트크로우, 버드나무, 갈매기, 비어룸, 서울집시, 대도양조장, 캘리키친, 더랜치, 어메이징, 트레비어, 구스아일랜드, 핸드앤몰트, 사우스사이드팔러, 비어바나, 비어포스트바, 브루소스 인터네셔널이 참여했다. 양조가 진행된 맥파이 브루어리의 CEO인 에릭 모이니한(Erik Moynihan)은 “이번 캠페인은 한국 양조장들이 세계 맥주 산업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맥주는 알코올 도수 5도의 페일 에일로 기부에 참여한 브루어리펍에서 3월 6일에 ‘도움의 손길(Helping Hands)’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출시된다.
맥주 업계의 발전을 위한 기부
맥주의 원료인 홉을 통해 맥주 업계의 여성 인력을 위해 기부하는 방법도 있다. 글로벌 홉 기업인 Yakima Chief Hops는 맥주 양조업에 종사하는 전문직 여성을 위한 전 세계 비영리 단체인 Pink Boots Society와 협력하여 매년 ‘Pink Boots Blend’ 홉을 생산한다. 이 홉은 상업양조 및 홈브루잉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으며, 홉 판매 금액의 일부가 Pink Boots Society에 전달되어 맥주 업계의 여성들을 위한 장학 기금에 기부된다. 이러한 장학 프로그램으로 여성 맥주 전문가들이 교육을 통해 경력을 쌓아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국내 브루어리 중에서도 이 홉을 사용해 맥주를 생산한 브루어리들이 있다.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는 2019년 세계 여성의 날 111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맥주 '프루티 웨일(Fruity Whale)'에 Pink Boots Blend 홉을 사용했다. 특히 이 맥주의 양조에는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의 모든 여성 직원이레시피 개발 단계부터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또한 일산에 위치한 브루어리 플레이그라운드도 '대확행 더블 아이피에이'를 이 홉을 사용해 맥주를 양조했다.
사회 약자를 위한 기부
서울대입구역에 있는 크래프트 맥주 펍 서프파이어에서는 소방의 날을 기념해 서울브루어리와 함께 히어로 맥주 ‘소방차’를 선보였다. 이 맥주는 한잔이 팔릴 때마다
1,190원씩 화상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한림화상재단에 기부됐다.
2008년 설립된 사회복지법인 한림화상재단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생명이 위태롭거나 장애가 있는 화상 환자를 위해 의료비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국내뿐 아니라 개발도상 국가들에서 심한 화상을 입고도 현지 의료기술의 한계 및 장비의 낙후로 인해 치료 기회를 얻지 못하는 저소득층 아동 화상 환자를 대상으로도 무료 수술을 지원한다.
매년 기부 행사를 진행하는 종로의 서울집시 펍에서도 서프파이어에 이어 화상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한 기부행렬에 동참했다. 서울집시는 작년 겨울 < Seoul Gypsy Charity Week 2019> 행사를 통해 얻은 수익금 전액을 모두 한림화상재단에 기부했다. 이번 두 행사로 나타난 맥주 업계의 이례적인 기부행렬에 한림화상재단 측에서도 놀라워했다는 후문이다. 서프파이어의 정주화 대표는 “술이 건강에 좋지 않은 이미지지만, 수제맥주가 문화와 공감, 지역사회 나눔을 실천해나가 조금이나마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기부
지역 발전을 위한 기부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지방에 있는 양조장의 경우 지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으며, 기부 행사를 통해 양조장이 위치한 지역을 알리는 홍보 효과도 볼 수 있다. 외부 고객의 유입이 늘어난다면 매출 상승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잠재 고객인 지역민 고객들의 충성도도 높일 수 있다.
강릉에 있는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우리 동네 히어로’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민 헌정 맥주를 선보였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사회를 위해 꾸준히 봉사해온 인물을 선정해 그 인물을 주제 삼아 맥주를 양조하는 것이다. 제1대 헌정 맥주는 강릉시 홍제동에서 50여 년을 거주하며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해온 박영순 홍제동 3통장을 위해 만들어졌다. 박영순 씨의 이름을 따서 만든 ‘박영순 에일’은 그가 좋아하는 홍시에서 영감을 얻어 곶감을 넣은 에일로 만들었다. 헌정 맥주를 2개월간 판매해 얻은 수익금 234만 원은 홍제동 주민을 위한 마을 복지 사업인 ‘홍제 케어’에 기부됐다.
또한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1대 박영순 에일에 이어 얼마 전 2대 히어로 맥주 주재윤 라거를 출시했다. 주재윤 한약사는 홍제동사무소 앞 '소나무 한약국'를 운영하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로 한약을 지어주고 있다. 버드나무는 앞으로도 꾸준히 지역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동네 히어로’를 찾아 그들의 선행을 돕기 위한 기부를 계속해나갈 예정이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자영업자들이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크래프트 맥주 업계도 피해가지 못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전국의 많은 양조장이 임시휴업을 결정했으며, 크래프트 맥주 펍의 매출도 큰 폭으로 하락했다. 모두가 이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 잔의 맥주를 마시는 것은 크래프트 맥주 업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 같이 이겨내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사실 그들을 직접 돕는 방법은 어디에든 존재하며, 맥주 한잔을 마실 돈으로 기부를 실천하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한다면 그 말에 반박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기왕 맥주 한잔 마시러 나왔다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맥주를 찾아서 마시는 것도 꽤 의미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한잔이 모여 사회를 바꾸는 더욱 값진 힘이 될 수 있다.
김소영 Soyoung Kim
비어포스트 에디터이자 비어포스트 바의 서버이다.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술을 좋아하지만, 특히 크래프트 맥주의 새로움과 독창성이 가장 마음에 든다. 매일 마셔도 심심할틈이 없는 크래프트 맥주의 매력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