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하우스 에일은 세종이 다가 아니랍니다 팜하우스 에일의 역사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된 농사일을 잊기 위한 농주(農酒) 로서 막걸리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농사일이 우리나라에서 만 고됐을 리가 없지 않은가. 술로서 농업의 힘겨움을 이겨내는 전통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어져왔으며 이중엔 당연 맥주를 농주로 삼는 나라도 존재했다. 이 좁은 한반도에서도 막걸리 종류가 수백 종이 넘어가는데 지구상에 보리로 만든 농주가 어디 한 종류만 존재했겠는가. 이번엔 여러 다양한 전통적인 농가 맥주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팜하우스 에일의 역사
팜하우스 에일(Farmhouse Ale)은 말 그대로 농가에서 전통적으 로 만들어져 온 맥주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당연하게도 주로 유럽 지역, 그 중에서도 소위 비어 벨트라 칭해지는 맥주 종주국들(독 일, 벨기에, 프랑스 북부지역 등)과 북유럽 일대에서 주로 만들어 져 왔다. 농업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인 기원전과 기원후 1000년 정도의 시기, 다시 말해 곡물의 수확량이 풍족하진 않던 시절의 농 주는 곡물로만 만들기 보단 꿀이나 베리류의 과일 등을 섞어 만 드는 형태가 주를 이루었다. 당시의 농부는 최하층의 가난한 신분 이었기에 농주에 비싼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을 테니 말이 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맥주’라 불릴만한 형태를 가진 농주가 나온 것은 기원후 1000년쯤 무렵 수도원에선 맥주를 양조해대고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맥주를 대량으로 생산했던 그 시기쯤이었 다. 그렇게 발달된 농주는 현대까지 벨기에의 세종(Saison)과 람빅 (Lambic), 프랑스의 비에르 드 가르드(Bière de Garde), 핀란드의 사티(Sahti), 에스토니아의 코두루(koduõlu), 스웨덴의 고트란즈드 리커(Gotlandsdricke), 노르웨이의 말톨(Maltøl), 리투아니아의 카 이미스카스(Kaimiškas) 등으로 남아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그렇다면 맥주로 가장 유명한 국가들인 영국, 체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에선 농주로 유명한 맥주가 왜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도 맥주의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까 진 각자의 농가마다 전통적인 농주 양조 방식을 이어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맥주의 제조 방법이 맥아, 물, 홉만을 이용하는 획 일적인 방법으로 통일되어 버렸고, 현대에 들어선 대기업들이 만 들어낸 맥주(특히 라거)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기에 전통을 유지 할 여력도 없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계대 전을 겪은 것이 주된 문제였다. 이때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대표적 인 예시로 여러분도 다들 잘 알고 있는 호가든(Hoegaarden)과 관 련된 일화를 들 수 있다. 1900년대 초에만 해도 벨기에식 밀맥주 (벨지안 윗비어, Belgian Witbier)는 몇몇 농가에서 꾸준히 만들어 져 오던 대표적인 벨기에 농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기업 라거에 치이고 세계대전까지 겪으며 약 10년간 멸종돼버린 시기가 있었 다. 다행히 밀맥주 양조장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던 피에르 셀리스 (Pierre Celis)가 ‘호가든’이란 이름으로 벨기에식 밀맥주를 부활시 켰기에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누군 가가 부활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린 농가 맥주가 분명 굉장히 많았을 것이다. 하물며 세계대전의 주 무대였 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반면 맥주문 화가 비교적 덜 발달되고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북유럽 쪽 의 농가 맥주들은 무사히 잘 살아남아 이어져 올 수 있었다. 맥주 문화가 덜 발달한 탓에 살아남은 맥주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지 만 말이다.
벨기에의 세종과 람빅, 프랑스의 비에르 드 가르드
그렇게 나라별로 다양하게 이어져온 팜하우스 에일이지만 그중 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세종과 람빅, 그리고 비에르 드 가르드다. 가장 상업화된 팜하우스 에일이자 크래프트 맥주 문화를 주도하 는 미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맥주 스타일이기도 하니 말이 다. 헌데 이들은 사실상 분류만 팜하우스 에일일 뿐 실제로 농가에 서 세종이나 비에르 드 가르드를 만드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물론 흔히 ‘팜하우스 에일’이라 하면 주로 이들 셋을 지칭하곤 하 지만,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것은 좀 더 전통적이고 본질적인 의 미로서의 ‘팜하우스 에일’이니 굳이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듯하다.
세종과 람빅, 비에르 드 가르드를 제외한 다른 나라의 팜하우스 에 일은 아직까지도 전통 그대로 가정에서 만드는 경우가 많으며 때 문에 수출은커녕 자국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별도로 효모를 구입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효모를 이용 하여 양조하는 경우도 많기에 가정별로 독특한 맥주 맛을 내기도 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틀에서 굉장히 많이 벗어난 양조법을 사용 하는 농가들도 많다. 이처럼 상업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어 지간히 맥주 좀 마셨다 싶은 마니아들마저 존재조차도 잘 모를 정 도로 벨기에와 프랑스 이외의 팜하우스 에일은 거의 알려지지 않 았다.
핀란드의 팜하우스 에일, 사티
핀란드의 팜하우스 에일인 사티(Sahti)는 그 중 그나마 가장 유명 한 맥주 스타일이다. BJCP 2015년 버전을 보면 다른 팜하우스 에 일은 이름 한번 언급되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사티만이 역사적 맥 주(Historical Beer)라는 명목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즉 어느 정도의 상업화가 이루어졌단 뜻인데, 실제로 이전엔 가정 에서 사티를 만들 때 집안별로 전해져 내려오는 효모를 사용했으 나 최근엔 그저 빵을 만들 때 사용하는 효모를 이용하여 만든다고 한다. 사티의 특징으로는 주니퍼 베리(Juniper Berry)를 이용하여 맥주를 만든다는 것과 축제용으로 주로 사용됐기에 7~11%의 높은 알코올 도수를 가진단 점이 있으며 정말로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 티를 만들 땐 매슁(Mashing)과정에서 뜨거운 돌을 이용한다고 알 려져 있다. 거기다가 매슁을 하고 남은 보리를 걸러낼 때(라우터 링) 주니퍼 베리 나무의 잔가지들을 이용하여 걸러낸다는 점이 재 미있는 점이다. 주로 달달한 맥아 맛과 주니퍼 베리의 향을 지니며 효모에서 기인한 바나나향도 풍부하다고 한다
스웨덴의 고트란즈드리커와 에스토니아의 코두루
고트란즈드리커(Gotlandsdricke)와 코두루(koduõlu)는 사티 다음 으로 유명한 팜하우스 에일일 것이다. 실제로 유명한 맥주 평가 사 이트인 레이트비어(Ratebeer.com)에선 사티와 고트란즈드리커, 코두루를 모아둔 스타일 카테고리를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들 정도 까진 짚고 넘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고트란즈드리커와 코두루는 모두 주니퍼 베리를 이용한다는 것과 주니퍼 베리의 잔가지를 이용해서 라우터링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사티와 공통점을 보인다. 그 중 고트란즈드리커는 스웨덴의 팜하 우스 에일로 사티보다 더 많은 양의 주니퍼 베리를 이용한다는 점 과 구운 몰트를 사용하여 스모키 한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사티 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코두루는 에스토니아의 팜하우스 에일로 그 중에서도 사레마(Saaremaa)섬에만 남아있는 맥주라고 한다. 섬에서 이용되는 지하수의 특성 때문에 나는 철분의 맛이 특징적 이라고 한다.
그 외의 팜하우스 에일들
이외의 팜하우스 에일은 말 그대로 농가에서 자기 멋대로 만들어 먹은 맥주이기 때문에 양조법이나 맛이 정말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덴마크 푸넨(Funen) 섬에 남아있는 팜하우스 에일은 설탕 등 을 이용해 끓이지 않은 맥즙을 사용하여 맥주를 만들며 홉은 따로 홉 차로 끓여서 넣는 방식으로 맥주를 만든다고 한다. 또 조지아 (Georgia)에서 만들어져 오던 팜하우스 에일은 밀과 보리를 이용 해 만든 맥즙을 무려 며칠 동안이나 끓여서 만들어 낸다고 하며 사 실상 곡물 스프와 같은 맛을 낸다고 한다. 이쯤 되니 이제는 사라 져버린 여러 팜하우스 에일들은 대체 어떤 식으로 맥주를 만들었 었는지가 굉장히 궁금해지지만, 알아볼 방법이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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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프트 맥주와 팜하우스 에일
온갖 맥주를 재해석해내는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들이 이러한 팜하우스 에일을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다. 구스 아일랜드(Goose Island)나 뇌그너(Nøgne Ø), 뉴 벨지움(New Belgium), 도그피시 헤드(Dogfish Head)와 같은 미국의 유명 양조장들도 저마다의 해 석으로 사티를 만든 이력이 있으며 팜하우스 에일 전문 양조장으 로 유명한 몇몇 브루어리들-대표적으로 제스터 킹(Jester King)과 국내에도 수입된 졸리 펌킨(Jolly Pumpkin) 등-은 고트란즈드리커 와 같은 마니악 한 팜하우스 에일까지도 만들어 냈다. 물론 이들이 주력으로 삼는 팜하우스 에일은 앞서 언급한대로 세종이나 람빅 과 같은 와일드 에일이지만 이러한 비주류 팜하우스 에일마저도 놓치지 않는 모습은 참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EDITOR_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