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에 특별한 옷을 입히는 마법, 배럴 에이징
일반적인 맥주 양조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맥즙을 만든 뒤 끓이며 홉을 첨가하고, 식힌 뒤 효모를 투여해서 발효를 시키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맥주는 케그나 병 혹은 캔에 담겨 맥주를 찾는 사람에게 전해진다. 이 과정을 수행하는데 있어 대부분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장비가 사용된다. 때때로 어떤 맥주 혹은 몇몇 양조장에서는 완성된 맥주에 어떤 특별한 맛을 입히기도 한다. 누군가 외출하기 전 몸에 향수를 뿌리듯이, 맥주가 마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옷을 갈아 입기 전에 특별한 맛과 향을 더한다. 어떤 때는 위스키, 또 다른 어떤 때는 와인의 풍미를 입히기도 하고, 때때로는 나무의 향긋함을 입히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맥주는 단순히 맛이 덧입혀지는 것을 넘어서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특징들이 다르게 변화하기도 한다. 이것이 맥주에 특별한 맛을 더하는 방법 중 하나인 배럴 에이징(Barrel Aging)이다.
오크 배럴
일반적으로 배럴이란 나무로 만든 통을 뜻한다. 석유 거래의 단위가 배럴(bbl)이 된 것 역시 초기 석유의 수송이 ‘나무통’에 담 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음료의 운반, 저장 또는 숙성을 위한 배 럴은 고대의 아르메니아 와인을 바빌론으로 운송하기 위해 사용 했으며, 13세기 경부터 켈트족이 현재의 오크 배럴과 유사한 배럴 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럴 제작에 사용되는 나 무는 참나무속(Quercus)에 속한 나무들이 주로 사용된다. 오크 배 럴(Oak Barre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참나무목 참나무 과 참나무속’에 속한 나무를 총칭하는 단어가 오크(Oak)이기 때 문이다. 이 중에서도 와인, 위스키, 맥주 등 주류의 숙성을 목적으 로 하는 경우 French Oak(Quercus Robur), White Oak(Quercus Petraea), American Oak(Quercus Alba)등이 주로 사용된다. 수많 은 목재 중에서 오크가 주류의 숙성용으로 사용되는 이유는 다른 나무에 비해 목질이 단단하고 아로마가 대단히 좋기 때문이다.
배럴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를 재단하여 안의 내용물이 새 지 않게 단단히 묶기 위한 철제 후프(Hoop)로 고정해서 모양을 만 드는데, 이때 내용물과 직접 닿는 내부를 불에 그을리는 과정을 거 치게 된다. 내부를 불로 처리하는 이유는 보관하는 액체가 스며들 거나 오크의 성분이 액체에 과도하게 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다. 동시에 오크가 가지고 있는 탄닌(Tannin)은 불로 많이 그을릴 수록 더 많이 분해되고, 나무의 화학적 조성이 바뀌며 이전에는 없 었던 아로마와 풍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맥주와 오크 배럴의 만남
맥주의 양조에는 다양한 오크 배럴이 사용된다. 여기서 다양 하다고 하는 것은 새 것인지, 어느 정도의 토스팅 과정을 거친 것 을 사용하는지와 함께 다른 주류를 숙성시키는 데 사용했던 적이 있느냐의 여부를 포함한다. 다른 주류를 숙성시키는데 사용한 오 크 배럴의 경우 나무에 이전 숙성 술이 배어 있어, 맥주를 숙성시 키는 경우 나무가 머금고 있던 술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기 때문 이다.
전통적인 스타일의 맥주 중에는 양조 과정에 배럴 에이징 을 거치는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자연발효 맥주로 불리는 람빅 (Lambic), 플랜더스 레드 에일(Flanders Red Ale), 우드 브륀(Oud Bruin) 등이 있다. 이외에는 맥주를 양조한 뒤 의도적으로 오크 배 럴의 풍미를 입히거나 이미 다른 주류를 숙성시켰던 오크 배럴을 사용해서 이전에 숙성시켰던 주류의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다. 이 러한 시도는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에서 많이 하고 있는데, 버번 위스키를 숙성시켰던 배럴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배럴은 스테인리스 장비에 비해서 품질 관리가 어렵다. 오크 에는 자연적으로 많은 종류의 박테리아와 미생물이 서식하고 있 는데, 이들이 만들어내는 맛의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데다 맛의 변화가 오크통마다 다르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관 된 맛을 유지하기 위한 블랜딩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도 있으며, 때 때로는 특정 오크 또는 특정 년도에 생산된 맥주를 한정판으로 출 시하기도 한다. 한편 생산 과정에 있어서 관리의 용이함이나 여러 오크의 맛을 복합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오크 배럴이 아닌 오크 칩 (Oak Chip)이라는 나무 조각을 맥주에 넣어서 맥주를 만들기도 한 다.
크래프트 맥주와 배럴
1992년 미국 시카고의 구스 아일랜드(Goose Island)는 처음 으로 버번 배럴(Bourbon Barrel)에 숙성시킨 맥주를 선보였다. 버 번은 미국 켄터키주 동북부에 위치한 곳의 지명이다. 이 지역에 정 착한 개척민들은 옥수수와 호밀을 주 재료로 위스키를 제조했는 데 이것이 버번 위스키다. 버번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배럴은 내부 를 숯에 가깝게 까맣게 태운(charred) 것을 사용한다. 이 배럴에서 숙성시킨 위스키는 특유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나타내며, 이렇게 위스키를 머금은 배럴은 맥주에 또 다른 풍미를 입혀준다.
구스 아일랜드의 시도를 시작으로 미국의 많은 크래프트 맥 주 양조장들은 배럴을 이용한 맥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임페리얼 스타우트, 팜하우스 에일, 사워 계열의 맥주를 배럴 에이 징에 이용했다. 이런 스타일에 배럴 에이징 버전이 많은 이유는 배 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 즉 각각의 맥주가 가지는 고유의 풍 미와 배럴 에이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풍미 간의 조화가 뛰어나 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주로 다크초콜릿, 커피, 구운 곡물의 풍미를 보이는데, 버번 배럴에서 숙성시킬 경우 바닐라, 카라멜, 코코아를 연상시키는 풍미가 더해져 더 풍부하고 강렬한 맛을 이끌어낸다.
버번 배럴 외에도 스페인 남부에서 생산되는 셰리 와인 (Sherry Wine)을 숙성시켰던 셰리 오크나 피노 누아(Pinot Noir) 와인을 숙성 시켰던 배럴 등과 같이 와인을 숙성시켰던 배럴 역시 맥주 숙성에 사용된다. 이들과 같은 와인을 숙성시켰던 배럴은 맥 주 이전에는 위스키의 숙성에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버번 배럴 에 비해 강렬하지는 않지만 복잡하고 섬세한 풍미를 보여주므로 세종, 미국식 팜하우스 에일이나 사워 계열의 맥주를 숙성시키는 데 많이 쓰이고 있다.
맥주의 배럴 에이징은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수 년간 이 루어지며, 이로 인해 희소성과 가격 역시 높은 편이다. 맥주의 성 공과 실패를 배럴 에이징이 끝날 때까지 장담할 수 없는 데다 오크 가 목질이 단단하다고 할지라도 스테인리스 장비를 사용하는 것 에 비해 휘발분도 많아 대량 생산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 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에서 배럴 에이징을 거친 맥주를 출시하는 이유는 더 새롭고 맛있는 맥주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배럴 에이징 과정을 거친 맥주를 많이 만나볼 수 있다.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뿐만 아니라 람빅, 플랜더스 레드 에일 등 유럽 전통방식의 맥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다양 한 스타일이 있는 만큼 다양한 맛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위스키 나 와인에서 느낄 수 있었던 오크의 향을 맥주에서도 찾아보자
EDITOR_장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