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화이트가 알려주는 ‘좋은 발효’의 비밀
‘화이트 랩스(White Labs)’는 맥주 양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봤다면 누구라도 알만한 회사다. 1995년 창립 이후 23년의 세월 동안 백여 종의 품질 좋은 효모 상품을 개발하며 미국 크래프트 맥주 문화와 홈브루잉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크게 기여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CEO인 크리스 화이트(Chris White)가 5월에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그를 인터뷰하여 효모에 관한 이야기를 진하게 나눴다. 인터뷰에서 나눈 대화와 그가 발제한 효모 세미나를 통해 화이트 랩스를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효모는 맥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효모가 없으면 알코올도 생기지 않으니, 맥주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효모는 단순히 알코올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풍미를 만들어내는 데 크게 관여한다. 산뜻한 과일 향이나 알싸한 후추 같은 기분 좋은 풍미를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불쾌한 이취(Off-Flavor)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좋은 맥주를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은 건강하고 품질 좋은 효모를 사용하는 것이다. 회사를 세우기 전 친구와 함께 홈브루잉을 하던 크리스 화이트는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전공이 생화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홈브루잉 시장을 관찰하며 많은 사람이 품질 좋고 다양하며 새로운 효모 제품을 원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에 1995년, 미국 샌디에이고에 화이트 랩스를 설립하고 효모 제품 개발에 나선다. 참고로 함께 홈브루잉을 하던 친구는 그 유명한 ‘밸러스트 포인트(Ballast Point)’를 세우게되었다.
그가 한창 홈브루잉을 하던 당시만 해도 액상 효모(Liquid Yeast)는 거의 상용화되지 않았다. 생물이라는 특성상 보존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에도 크리스 화이트는 액상 효모 제품을 개발하기로 맘먹는다. 결코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액상 효모가 건조 효모보다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액상 효모를 선택한 이유는 그게 훌륭한(Great) 맥주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홈브루어로 지내며 저는 항상 최고의 맥주를 만들고 싶었고, 상태 좋은 액상 효모가 최고의 맥주를 만든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액상 효모는 굉장히 신선하며 (다른 균이 섞이지 않아) 순수하기 때문이죠. 이는 건조 효모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직접 투여할 수 있는(Pitchable) 홈브루잉 규모의 액상 효모 제품을 최초로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건조 효모는 재수화(Rehydration)를 하더라도 액상 효모보다 세포벽이 많이 손상되어 있다. 이는 효모의 응집(Flocculation)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또한 효모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세포 내부의 소기관이 유출되거나 손상되기도 한다. 이는 세포의번식과 활성을 저해한다. 게다가 건조 효모는 탄소 수가 많은 알코올(Fusel Alcohol)이나 아세트알데히드(Acetaldehyde), 페놀(Phenol)과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풍미를 더 많이 생성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반해 액상 효모는 순수도와 응집력, 에스테르(Ester) 생성 능력이 높다는 장점이 있으며 발효 후에도 높은 활성을 유지하는 덕에 재사용 또한 용이하다. 그리고 액상 효모의 최대 장점은 굉장히 다양한 종의 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화이트 랩스에는 현재 효모 상품이 100여 종 이상 있다).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크래프트 맥주의 경향으로 미루어볼 때 이는 아주 매력적인 장점이다. 그래서 크리스 화이트는 액상 효모를 주력 상품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액상 효모의 짧은 보존 기간을 어떻게 늘릴 것인지가 문제였다. 꾸준한 연구 끝에 화이트 랩스는 FlexCell™과 PurePitch®라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여 효모의 보존 기간을 늘릴 수 있었다. FlexCell™은 화이트 랩스만의 효모 배양 시스템을, PurePitch®는 특허 받은 효모 패키징 방법을 말한다. 화이트 랩스의 효모는 맥아로만 만들어진 맥즙(Wort) 안에서 번식한다. 이때 효모의 영양, 세포 안에 저장되는 글리코겐의 양, 세포막의 건강 상태등 모든 것이 FlexCell™ 시스템을 통해 최적의 상태로 조절된다. 전체 배양 과정은 효모의 신선도를 위해 17일간 이루어지며, 이 기간에 61가지 항목을 검사하여 효모의 상태를 확인하고, 적절치 못한 것은 버린다.
생산된 효모는 PurePitch® 기술을 적용해 포장한다. 효모는 산소와 만나면 다시 번식을 시작하므로, 제품화가 이루어진 효모는 산소가 공급되지 않도록 밀폐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효모가 생산한 이산화탄소는 배출해야 한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화이트 랩스는 통기성이 있는 필름을 이용한 포장법을 개발했다. 놀랍게도 이 필름은 내부에서 생성된 이산화탄소는 밖으로 내보내지만, 바깥의 산소는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한다. 이외에도 여러 기술을 종합한 덕분에 며칠 단위였던 액상 효모 상품의 보존 기간이 몇 달 단위로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미국 내 판매뿐만 아니라 수출까지 염두에 두었기에 효모의 보존 기간을 연장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자체 기술을 통해 홈브루잉 효모는 6개월, 상업용 효모는 4개월까지 보존 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죠. 홈브루잉용 효모를 취급하는 소매점 등은 더 긴 보존 기간을 원했고, 상업용 효모를 사용하는 브루어리들은 유도기(Lag Phase)가 짧고 활성도가 높은 효모를 원했기에 이러한 차이를 두었습니다. 보통 효모의 품질유지기한(Best Before)은 효모 활성도가 50% 이상인 시점까지 잡습니다. 하지만 저희 효모의 경우엔 6개월 가까이 되어도 활성도가 90% 이상이기 때문에 품질 유지기한이 넉넉합니다.”
그럼 신선하고 품질 좋은 효모만 있으면 좋은 맥주를 만들 수있을까.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올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효모 자체보다도 발효와 위생의 관점에서 좋은 맥주를 판별해야 한다고 답했다. “’좋은 효모’도 중요하지만, ‘좋은 발효’가 더 중요합니다. 좋은 효모를 쓴다고 해서 발효도 좋아지진 않죠. 그리고 좋은 발효는 좋은 위생에서 비롯됩니다. 브루어리는 기본적으로 청결을 강조하긴 하지만, 많은 브루어리들이 미생물학적으로 청결 (Microbiological Clean)하진 않습니다. 미생물학적으로 청결하다는 것은 기본적인 청결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미생물은 매우 작아서 육안으로 볼 수가 없고, 더러워도 티가 안 나기 때문이죠. 맥주에 문제가 발생하면 어떤 브루어리는 장비에서 문제를 찾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대부분의 문제는 위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살균 시간, 적절한 온도, 세척 방법으로 양조장을 청소해야 하며 큰 통부터 조그마한 양조 장비까지 전부 깨끗한지 확인해야 합니다. 양조 장비들은 닫힌 시스템이 아니라 열린 시스템이란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오염과 청결에 신경 써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맥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화이트 랩스는 단순히 효모를 생산하는 것 외에도 효모와 관련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단연 ‘화이트 랩스 브루잉 컴퍼니(White Labs Brewing Co.)’일 것 이다. 이 소규모 브루어리는 2012년 설립되어 현재 캘리포니아 주의 샌디에이고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애슈빌,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다. 다른 상업 브루어리와는 달리 화이트 랩스 브루잉 컴퍼니는 같은 맥아즙에 효모만 다르게 넣고, 어떤 식으로 맥주가 달라지는지 직접 체험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다. 탭 리스트를 보면 맥주 이름은 없고, 맥주 스타일과 사용한 효모의 종류만 적혀있다. 덕분에 ‘~효모로 만든 ~스타일의 맥주를 달라’는 식으로 맥주를 주문해야 하는 시스템이라 굉장히 이색적인 공간이다. 크리스 화이트는 “우리 사업에 있어선 작은 부분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고 강조했으며 실제로 브루어들도 화이트 랩스 브루잉 컴퍼니의 맥주를 참고한다며 뿌듯해했다. 이외에도 화이트 랩스는 브루어를 대상으로 분석 실험실을 제공하고 효모 관련 교육 프로그램과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크래프트 맥주 업계를 향해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이어가고있다.
앞으로의 행보를 묻자 그는 새 상품, 새 효모 균주, 새로운 PurePitch® 등 계속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할 것이라고 답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브루잉 트렌드를 관찰하고 있습니다.”라며 사람들의 흥미에 따라 상품을 개발한다고 밝혔다. 최근 크래프트 맥주 업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노르웨이 크바익(Kveik) 효모도 곧 출시할 계획이며, 아직도 열기가 지속 중인 브룻 IPA를 위한 제품도 출시할 예정이다. 또한 맥주 효모뿐 아니라 무알코올 음료를 위한 효모까지도 상품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효모는 맥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질 좋은 효모를 만드는 회사가 없다면 질 좋은 맥주가 나오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홈브루어 시절부터 이어진 열정 그대로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 혁신을 통해 품질 좋은 효모를 개발해온 화이트 랩스. 이러한 회사가 있었기에 그동안 우리가 맛있는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크래프트 정신’을 추구하는 열정적인 회사로 우리 곁에 남아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