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맥주의 맛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얼마 전 백종원이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인 ‘골목식당’에서 어느 막걸리 가게에 대한 백종원의 솔루션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수돗물로 만든 막걸리는 맛이 없으며, 정수기 물을 추가로 넣은 막걸리가 더 맛있다고 한 것이다. 개인적으론 석연찮은 부분이 많긴 하지만, 어찌 됐건 이 방송은 술의 맛에 있어서 물이 중요하단 사실을 전국적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 뒤로 ‘물맛’에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도 늘었다. 물론 막걸리뿐 아니라 맥주에서도 물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럼 단순히 물맛만 좋으면 맥주 맛도 좋아지는 걸까? 맥주에서 물은 왜, 어떠한 면에서 중요할까. 이번 ‘Keep Calm & Learn Craft’에선 맥주의 기본이지만 이해하기는 정말 어려운, 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물은 왜 중요한가
많은 사람들이 양조사를 요리사와 비슷한 직업으로 이해하곤 한다. 맥주의 맛과 재료의 맛에 대해 이해하고, 레시피를 짠다거나 맥주에 따라 양조 방식을 바꾸는 등의 행위를 보면 요리의 일과 꽤 비슷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술은 음식과 달리 온갖 성분이 한꺼번에 섞여 있는 데다, 효모라는 생명체까지 들어있는 혼합물이다. 굉장히 다양한 화학반응이 장시간에 걸쳐 벌어진다는 점에서 요리와는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맥주의 레시피를 만들 땐 단순히 어떤 맛을 내는 성분을 얼마나 집어넣을지에 그치지 않고, 이 성분이 다른 성분과 어떻게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어떻게 변하는지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화학반응의 주된 무대가 물이기에, 물이 맥주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가 두 가지 있 는데, 바로 체코 플젠(Plzen) 지역의 필스너(Pilsner)와 영국 버튼-온-트렌트(Burton-on-Trent) 지역의 맥주들이다. 두 지역의 물은 상이한 성분을 지니며, 그로 인해 만들어진 맥주의 스타일과 맛도 아주 다르다. 맥주에서 물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면 두지역이 항상 등장하곤 하는데, 그곳 맥주들은 해당 지역의 물이 아니었으면 훌륭하게 만들어지지 못했을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얘기는 뒤에 가서 하도록 하자.
그럼 단순히 물맛만 좋으면 맥주 맛도 좋아질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앞서 설명한 대로 물 내부의 여러 성분들은 맥주의 다른 성분들과 화학작용을 한다. 그렇기에 완성된 맥주의 맛과 기존의 물맛과는 별 상관이 없게 된다. 정말 맛있는 물을 사용했다고 해도, 성분이 적절치 않다면 맥주는 얼마든지 맛없어질 수 있다. 핵심은 물의 맛이 아닌 성분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가 마시는 물은 순수한 H2O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지하수나 수돗물은 물론 정수기를 거쳐 나온 물에도 여러 다양한 물질들이 녹아있다. 물에 어떤 성분이 녹아 있느냐에 따라 수소이온지수(Potential of Hydrogen, 이하 pH)와 경도(Hardness)가 달라지며, 각 성분들은 맥주의 맛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관여를 한다. 그 때문에 맥주에 사용하는 물은 어떤 맥주를 만들 것인지에 따라 pH와 경도, 성분 등을 다르게 설정해줘야 한다
물의 pH
우선 pH에 관해 얘기해보자. pH는 수소 이온의 농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pH가 낮다는 것은 높은 농도의 수소이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상태일 때(pH 7 미만) 물은 산성을 띤다. 참고로 물에 산성 물질을 넣었을 때 생기는 수소이온(H+)과 하이드로늄이온(H3O+)이 혀에서 신맛을 느끼게 하는 원인 물질이므로, 산성인 음식과 액체를 먹으면 신맛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pH가 높으면(pH 7 초과) 수소 이온의 농도가 낮으며, 염기성을 띤다.
일반적인 맥주의 pH는 4~4.5쯤 되나, 신맛이 강한 사워 맥주의 경우는 3 정도 까지도 내려간다. 하지만 처음 양조를 시작할 때 물과 맥즙(Wort)의 pH는 그보다 높아야 한다. 당화(Mashing) 과정에서 사용되는 효소인 아밀레이스(Amylase)가 활동하기 좋은 적정 pH가 5.4~5.8이기 때문이다. 이중 베타 아밀레이스는 pH 5.4~5.6, 알파 아밀레이스는 pH 5.6~5.8에서 좋은 활성을 보이므로 맥즙의 pH가 낮으면 베타 아밀레이스가 활발히 작용하여 발효 가능한 당의 추출이 높아지고 더 가벼운 바디감을 지니게 된다. 물론 아밀레이스 이외에 다른 효소를 사용할 계획이라면 그 효소에 맞는 pH로 또 물을 조절해줘야 하지만, pH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으면 아밀레이스가 변성되어버리므로 보통은 5.3~5.5 사이를 유지해주곤 한다. 이 정도의 pH는 맥아에 들어있는 효모의 필수 영양 성분인 아연(Zinc)이 물에 녹아드는 데도 도움이 되니 일석이조다. 행여 맥즙의 pH나 스파징에 사용하는 물의 pH가 6 이상이 되면 맥아에 있던 타닌(Tannin)을 비롯한 폴리페놀과 규산염(Silicates)이 용출되어 맥주가 떫어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참고로 pH는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여태까지 언급한 pH 수치들은 상온(20°C~25°C)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
물의 경도
물은 들어있는 성분에 따라 경수(Hard Water)와 연수(Soft Water)로 구분할 수 있다. 아마 중학교 과학 시간에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경수는 경도(Hardness)가 높은 물을 뜻하며, 이때 경도는 칼슘과 마그네슘 이온이 높을수록 높아진다. 반대로 연수는 경도가 낮은, 즉 칼슘과 마그네슘 이온이 적은 물이다. 일반적으로 경수는 식수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기에 맥주를 양조할 때도 연수를 많이 사용하겠거니 싶지만, 실제론 경수와 연수 모두 양조에 사용된다. 어떤 스타일과 맛을 지닌 맥주를 만들 것인지에 따라 적절한 경도가 달라지며,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시는 앞서 언급한 영국의 버튼-온-트렌트의 맥주와 체코 플젠의 필스너이다. 버튼-온-트렌트 지역의 물은 경도가 매우 높은 경수, 플젠 지역의 물은 연수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경수는 민랄이 풍부하므로 수도관을 막히게 만들기도 한다)
버튼-온-트렌트 지역은 풍부한 석고(Gypsum) 퇴적층에 의해 물 자체에 석고의 성분인 황산칼슘(Calcium Sulfate)이 많이 녹아 있었으며, 덕분에 물의 경도가 매우 높았다. 이중 칼슘 성분은 맥주를 만들 때 pH를 낮추고, 당화에서 알파 아밀레이스를 안정시켜주고, 당 추출 수율을 높여주고, 효모의 성장과 응집(Flocculation)도를 높여주며, 옥살산(Oxalate)을 제거해줌으로써 맥주의 탁도를 낮추는 데다 홉의 풍미를 더욱 살려주는 등 많은 역할을 했다. 거기에 황산염은 특유의 드라이하고 기분 좋은 쓴맛을 주는 데에 일조하였다. 덕분에 버튼-온-트렌트는 ‘페일 에일’을 필두로 독창적인 맥주 맛을 지닐 수 있었으며, 영국에서 맥주로 가장 유명한 도시가 되기에 이른다. 물에 석고를 넣어서 이 지역의 물과 비슷하게 만드는 과정을 두고 ‘버튼화(Burtonization)’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반면 플젠 지역에는 모래가 뭉쳐져 생긴 사암(Sandstone)이 많았다. 사암은 조그마한 구멍이 많은 돌로, 지하수를 거르는 일종의 필터 역할을 했다. 그래서 플젠 지역의 물은 경도가 매우 낮은 연수였다. 플젠 지역에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황금색 라거 ‘필스너 우르켈’은 덕분에 연수 특유의 부드럽고 거슬림 없는 깔끔한 느낌을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곧 전 세게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결론적으로 어떤 맥주를 만들 것이냐에 따라 물의 경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기타 물의 성분들
pH와 경도 외에도 물에 들어있는 성분은 그 자체로 맥주의 맛과 품질에 영향을 미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짚어보도록 하자.
마그네슘 이온(Mg2+)은 칼슘과 함께 물의 경도를 결정한다. 효모의 영양 성분이자 효소의 활성을 돕는 조효소의 역할을 하고, 마그네슘 특유의 쓴맛과 신맛을 통해 맥주의 맛을 좀 더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과도할 경우 (40ppm 이상)엔 떫은 느낌을 내니 주의해야 한다. 흔히 나트륨으로 알려진 소듐 이온(Na+)은 소금의 구성 성분으로, 짠맛을 내는 이온이다. 맥주의 풍미를 좀 더 풍부하고 둥글둥글하게 만들어주지만, 효모에게는 독성으로 작용하니 적당한 양 (60ppm 이하)이 들어있는 물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고제같이 나트륨 농도가 높은 맥주(250ppm 정도)의 경우엔 발효 후에 소금을 넣어주곤 한다.
염화물(Chloride)은 맥주의 맛을 좀 더 풍부하게 느껴지도록 하여 단맛과 맥아의 풍미를 강조하고, 맥주의 안정성에 기여한다. 보통 10~100ppm 정도의 농도를 권장하나, 황산염의 농도가 높은 물이라면(100ppm 이상) 맥주가 지나치게 거칠어지거나 광물 같은 풍미를 낼 수도 있으므로 50ppm 이하의 농도를 권장한다. 흔히들 염화물이 있으면 염소로 인해 생기는 수돗물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강할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염소(Chlorine)는 염소 이온 두 개가 붙어있는 분자이므로 이온인 염화물과는 성질이 다르다.
황산염(Sulfate, SO4-)은 앞서 말했듯 맥주의 끝 맛을 드라이하게 해줌으로써 홉의 쓴맛을 강조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대기업 라거의 경우엔 30ppm 이하로 황산염이 적게 함유된 물을 사용하나, IPA처럼 홉의 특성을 강조하고 드라이한 마무리를 짓고자하는 맥주에선 150~300ppm 정도로 황산염의 농도가 높은 을 사용한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염소 이온과의 비율을 신경써야 한다. 양조사들은 염화물을 통해 단맛과 몰티함을 강조할 것인가, 황산염을 통해 쓴맛을 강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둘의 비율을 생각하여 물을 조절하곤 한다. 중탄산염(Bicarbonate, CHO3)은 양조 용수의 pH를 낮추는 칼슘이나 마그네슘과는 달리, 양조 용수의 pH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그로 인해 맥아로부터 타닌, 규산염 등을 더 많이 용출시키거나 몇몇 효소의 작용을 저해하거나 홉 풍미를 거칠게 만드는 등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다만 어두운색 맥주를 만들 때, 적정량의 중탄산염이 있다면 어두운색 맥아가 지니는 산성과 어느 정도 중화되어 맥즙의 pH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외에 철과 망간, 질산염, 황화물(Sulfide, 황산염과는 다르다) 등 맥주에 해로운 성분과 인산, 구연산, 젖산 등의 산 성분, 칼륨과 아연, 구리 등의 마이너한 성분이 물에 녹아 맥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물이 왜 중요한지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조사들이 원하는 성분의 물을 찾기 위해 방방곡곡을 헤매야 하나 싶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럴 필요는 없다. 좋지 않은 성분은 필터를 통해 걸러내거나 다른 성분을 추가하여 침전시키고, 필요한 성분은 추가로 넣음으로써 원하는 형태의 물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힐 팜스테드(Hill Farmstead)’처럼 자신이 원하는 좋은 물을 위해 산골짜기에 들어가 맥주를 만드는 곳도 있다. 다만 도심에서 상수도 물을 이용하더라도 처리만 잘한다면 맥주를 만드는 데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당장 서울만 해도 영등포의 ‘비어바나’를 비롯하여 ‘미스터리 브루잉 컴퍼니’,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 ‘서울 브루어리’등 다양한 맥주 양조장이 존재하니 말이다. 그러니 어디의 어떤 물을 써서 맥주를 만들었는가에 지나치게 얽매이진 않아도 된다. 결과물만 맛있으면 된 것 아닌가.
EDITOR_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