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보틀숍, 생존을 위해 변신하라”
가격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2018년 들어 서울 연남동의 비어투고, 왕십리의 랭크비어 등 맥주 전문 보틀숍이 잇달아 문을 닫았다. 지난해에도 경리단길 더바틀샵, 인천 송도의 비샵 등이 폐업 소식을 알렸다.
보틀숍은 주류 소매 면허를 받아 최종 상품으로 포장돼 나온 캔이나 병맥주를 판매하는 곳이다. 일부는 일반음식점으로 등록해 매장에서 맥주를 마실 수도 있다.
병과 캔 맥주는 마트와 슈퍼, 그리고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취향에 맞는 다양한 맥주를 찾거나 브루어리, 맥주, 시장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서 소소한 일상에 대한 대화까지 나눌 수 있는 곳은 보틀숍뿐이다. 보틀숍마다 맥주 라인업은 천차만별이지만 대부분 맥주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소비자에게 설명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보틀숍은 다양한 맥주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맥주 애호가들에게는 사랑방 역할을 한다. 크래프트 맥주를 구하기 어려운 곳에서 공급의 거점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한 유통 통로인 보틀숍이 ‘폐업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보틀숍이 국내에 하나의 비즈니스로 자리잡는 것은 불가능할까?
공격적인 대형 마트, 오르는 임대료에 ‘휘청’
현재 전국의 보틀숍은 50여개로 추산된다. 그 중 70~80%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이들 보틀숍 숫자는 몇 년 째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많은 보틀숍들이 사라지지만 그와 비슷한 숫자의 보틀숍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는 그만큼 진입장벽이 낮은 업종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설비를 갖추지 않아도, 매장이 넓지 않아도 된다. 병이나 캔을 수입회사, 도매상으로부터 공급받아 판매하는 단순한 사업이다.
문을 여는 것은 쉽지만 보틀숍이 지속 가능한 수익을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대형 마트들의 가격, 물량 공세가 보틀숍들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이다.
구매력이 큰 대형 마트들은 수입사나 도매사로부터 맥주를 저렴하게 공급 받고 마진도 최소화하면서 소규모 보틀숍들이 따라갈 수 없는 가격으로 맥주를 판매한다. 현재 이마트의 대부분 지점에서는 크래프트 맥주에 대해 상시 10% 할인을 한다. 다른 대형 마트들도 수시로 ‘2병 1만원’ ‘3병 1만원’과 같은 행사를 진행한다. 임대료, 인건비 등에 시달리는 보틀숍이 경쟁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은 대형 마트로 향하게 된다. 이는 지난해말 비어포스트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2015년과 2016년 조사에서 맥주 구입처를 묻는 질문에 보틀숍이라고 답한 비중은 60%를 넘었지만 2017년에는 41.9%로 급락했다.
2015~2016년까지는 대형 마트에서 구하기 어려운 맥주들도 있었지만 지난해부터는 소규모 보틀숍보다 오히려 라인업이 낫다고 평가 받는 대형 마트 지점들이 다수 생겨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보틀숍은 다른 자영업 업종들과 마찬가지로 임대료 상승에도 직격탄을 맞는다. 특히 소위 뜨는 지역에 있던 보틀숍들은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문을 닫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크래프트 맥주 저변이 얕은 지방에서는 매달 사업의 존폐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구의 한 보틀숍 대표는 “대구와 경북지역은 소비자들의 성향이 보수적이어서 새로운 맥주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라며 “소수의 마니아나 호기심에 한번 마셔보는 소비자들이 대부분이고 지속적으로 다양한 맥주를 접하려고 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과도한 주세로 인한 높은 맥주 가격도 큰 장벽이라고 보틀숍들은 입을 모은다. 대기업 맥주에 비해 보통 2~3배 비싸기 때문에 저변 확대가 안 되고, 소비자들은 조금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마트를 찾는 악순환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한 보틀숍 대표는 “사람들이 취향을 찾아 맥주를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구조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맥주 가격이 비싸다 보니 새로운 맥주를 경험해본다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고 지적했다.
보틀숍에도 ‘색깔’이 필요하다
보틀숍이 크래프트 맥주 업계의 한 축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간단하다. 대형 마트에 비해 차별화된 가치를 소비자들에게 줘야 한다.
이에 업계 전문가들은 보틀숍도 색깔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실제 3년 이상 자리를 잡고 운영되고 있는 보틀숍들은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 구로의 맥주미학은 사워 맥주와 임페리얼 스타우트에 특화해 라인업을 구성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배럴 숙성맥주들도 갖추고 있다. 일반 보틀숍에서 판매하는 맥주 중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 맥주 라인업을 강화해 차별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크래프트 맥주를 접하기 쉽지 않은 구로 지역에서 맥주미학은 대체 불가한 보틀숍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망원동의 위트위트는 책이나 영화 같은 다른 콘텐츠와 맥주를 결합하는 이벤트로 눈길을 모은다. ‘위트앤필름’이라는 이벤트에서는 단골 손님이 쓴 영화 관련 글에 맥주를 페어링해 소개하고 있고 ‘위트앤센텐스’에서는 책에서 뽑은 한 문장과 맥주를 매칭한다. 이를 테면 하얀 눈의 느낌이 도드라지는 소설 ‘설국’과 라벨에 눈의 결정이 그려져 있는 맑은 밀맥주인 ‘슈나이더 바이세 탭2’를 페어링하는 식이다.
맥주를 ‘맥주 이상의 것’으로 가치를 더하려는 노력 덕분에 열악한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수원, 대전에서 망원동까지 찾아오는 단골들이 생겨났다. 전준구 위트위트 대표는 “크래프트 맥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손님들 취향에 맞는 이벤트들을 제안하고 있다”며 “맥주 판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로열티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 천호동의 유미마트와 잠실동의 투고비어스는 맥주와 음식의 페어링으로 고객들을 사로잡는다. 정육점을 겸하고 있는 유미마트는 맥주 안주로 신선한 육회를 제공한다. 투고비어스는 옆 멕시칸 식당에서 공수한 타코, 퀘사디아, 브리또와 같은 안주가 특징이다.
공릉동의 비어셀러는 큰 매장에서 다양한 맥주 라인업을 갖춘 데다가 열정적인 맥주 설명으로 손님들을 감동하게 한다. 또 바틀사우나 문배점의 경우 매주 시음회를 개최해 맥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이와 함께 보틀숍이 지속적으로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맥주 관리도 중요한 덕목이다. 강주연 투고비어스 대표는 “냉장배송으로 받은 맥주를 냉장고에 보관하면서 판매해 철저한 콜드체인을 구축했다”며 “맥주 본연의 맛을 지켜 판매하는 것이 마트와 차별화되는 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한 업계 전문가는 “크래프트 맥주만큼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콘텐츠는 흔하지 않다”며 “이 많은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끄집어 내 보틀숍에 찾아올 수 있는 매력 포인트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DITOR_황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