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라고 보리만 쓰는 건 아니랍니다
맥주는 한자부터 보리 맥(麥)자를 사용하는 만큼 기본적으로 보리로 만들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굳이 보리뿐 아니라 발효를 위한 당을 공급해줄 수 있는 곡물이라면 어지간히 맥주에 사용이 가능하므로(심지어 곡물도 아닌 감자나 꿀, 설탕 등을 넣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맥주 양조에 사용되는 곡물은 꽤나 다양하다. 내가 맥주를 만드는 양조가도 아니고 그걸 알 필요가 있을까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맥주에서의 곡물의 특성을 이해하는 건 성분표만 읽어봐도 그 맥주의 특징을 대강 추리하는 것도 가능하게 해주고, 맥주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된다. 수확의 계절, 가을을 맞아 이번엔 맥주에 쓰이는 여러 곡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보리
일단 기본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 바로 보리다.
맥주에 사용되는 보리는 기본적으로 몰팅(Malting)이라는 과정을 거친 몰트(Malt)를 사용하거나, 혹은 몰팅을 거치지 않은 그냥 보리를 사용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로 사용된다. 몰팅은 간단히 말해 보리를 물에 불리고, 싹을 틔워 곡물 내 효소를 생성시킨 후, 열을 이용해 건조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때 마지막에 열을 가해 건조하는 과정에서 보리를 어떻게 건조하는가, 혹은 애초에 사용되는 보리가 어떠한가 등에 따라 몰트의 맛과 특성이 달라지므로 이에 따라 몰트를 세부적으로 구분한다(로스팅 방식과 원두 품종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커피 원두에 비유해 생각해보면 좀 더 이해하기 좋을 것이다). 가령 보리를 옅게 건조하면 우리가 흔히 아는 밝은 갈색 빛의 몰트가 나오나 보리를 강하게 구워내 거의 태우다시피 하면 검은색 몰트가 나오고, 이 검은색 몰트를 섞어 맥주를 만들면 스타우트와 같은 검은색 맥주가 나오게 되는, 이런 식의 차이를 보인다. 보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한 단락 안에 다 설명하기엔 너무 양이 많아 다음 호에 따로 자세하게 기재할 계획이므로 이번엔 일단 이 정도 선에서 넘어가도록 하겠다
밀
그다음으로 맥주와 친숙한 곡물은 바로 밀이다. 밀 역시 몰팅을 한 밀(Malted Wheat)과 그렇지 않은 밀(Unmalted Wheat)의 두 가지 경우로 사용되며 몰팅을 한 밀은 건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또 검은색 밀 몰트부터 밝은색 밀 몰트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대부분 사람은 아마 밀이 소위 말하는 ‘밀맥주’에서나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밀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러 맥주에 굉장히 흔하게 사용되는 곡물이다. 일단 밀은 보리에 비해 높은 단백질 함유량을 보여 맥주를 더 탁하게 만든다는 단점이 있지만 대신 입에 닿는 질감(Mouth Feel)을 더욱 부드럽게 해주고, 맥주 거품의 지속력(Head Retention)을 향상시켜주는 역할을 하므로 우리가 흔히 아는 IPA나 스타우트, 벨지안 에일 등 여러 맥주에서 소량(전체 곡물 사용량 중 5~20% 정도)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밀을 대량으로 쓰는 경우는 앞서 말한 1‘밀맥주’, 즉 저먼 바이젠(Weizen)이나 벨지안 윗(Witbier)의 경우나 아메리칸 윗 에일(Wheat Ale)이 대표적이며 의외로 사우어(Sour)계열의 맥주-대표적으로 람빅(Lambic)이나 베를리너 바이세(Berliner Weisse), 고제(Gose) 등-에도 상당량의 밀이 사용되곤 한다.
자세한 내용은 비어포스트 Batch 006(2016년 5월호)의 ‘Keep Calm &Learn Craft’에서 볼 수 있으니 참조하도록 하자.
옥수수와 쌀
옥수수와 쌀은 맥주에 사용됐을 때 특유의 맛이나 캐릭터가 눈에 크게 띄지 않는 곡물이다. 대신 당분은 엄연히 존재하므로 맥주 발효에 이용했을 때 알코올 도수를 높이는 역할은 한다. 그래서 도수에 비해 풍미는 엷은, 즉 가벼운 맥주를 만들고자 할 때 주로 사용되는 곡물이다. 게다가 비용도 보리나 밀에 비해 저렴하므로, 반복시음성이 뛰어난 가벼운 맥주를 원하면서 낮은 생산비용을 원하는 대기업들의 맥주 생산에 주로 사용되는 곡물이다. 시중의 대기업 맥주 중에 굳이 올 몰트(All Malt)를 언급하지 않은 맥주엔 대체로 쌀과 옥수수가 일정량 섞여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물론 크래프트 맥주도 가볍고 산뜻한 맛을 내기 위해, 혹은 맛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 알코올 도수를 높이기 위해 종종 옥수수와 쌀을 사용하곤 하니 옥수수와 쌀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에 나쁜 인상을 가지진 말도록 하자.
귀리
귀리는 단백질과 식이섬유가 풍부한 대신 당분은 적어 열량이 낮다는 점 덕분에 슈퍼 푸드로서 주목받는 곡물이다. 이런 특징 덕분에 귀리를 맥주에 사용했을 땐 바디감을 높여주고, 질감을 부드럽게 해주며, 더 크리미(Creamy)하고 단단한 맥주 거품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걸쭉하고 진득한 귀리 죽(Oatmeal)을 연상해보자). 그뿐만 아니라 귀리 특유의 고소하고, 견과류와 같은 맛도 더해주므로 맥주에 있어서 슈퍼한 곡물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 당분이 많지는 않아 풍미를 더 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량만 사용되곤 한다. 스타우트나 포터와 같이 진한 색을 띠는 맥주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곡물이나 잉글리시 에일이나 벨지안 트리펠 등에도 이따금 사용된다
호밀
호밀은 밀의 일종인 만큼 밀처럼 몰팅을 하지 않거나, 몰팅을 하거나, 또는 건조 정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소량(전체 곡물의 20% 이내)만 사용하지만, 간혹 50%에 가까운 다량의 호밀을 사용하여 만든 맥주도 존재하긴 한다. 호밀은 위의 여러 곡물 중 맥주에 사용됐을 때 가장 독특한 개성을 보이는 곡물인데, 익히 아는 호밀 빵의 고소한 맛과 끝을 잡아주는 드라이함과 더불어 꽤나 날카로운, 영어로 스파이시(Spicy)하다고 표현하는 특징적인 맛을 보여준다. 그래서 날카로운 비터가 공존하는 IPA에 주로 사용되며 포터나 세종과 같은 스타일에도 이따금씩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독자분들 중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곡물 좀 다르게 넣는다고 맥주가 그렇게 달라지나? 그렇다면 다음부턴 맥주의 성분표를 한 번쯤 살펴보고 사도록 하자. 그리고 직접 곡물의 차이를 경험해보자. 브루어들이 한 잔의 맛있는 맥주를 만들기 위해 곡물을 짜는 단계부터 얼마나 고심하는지, 그 노력을 조금은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EDITOR_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