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후추, 젖은 이끼… 효모가 만들어내는 맥주의 풍미
1516년 독일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공포한 맥주 순수령에 따르면 맥주의 원료는 보리, 홉, 물이었다.
당시는 효모가 관찰되기 전으로, 발효가 진행되어 술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무엇이 술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300여년의 시간이 흘러 술을 만드는데 효모가 작용한다는 것이 밝혀지며 맥주의 주 재료는 맥아, 홉, 효모, 물이 되었다
당분을 분해하고 부산물을 만들어내는 효모
맥주의 재료들은 각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에 따라 맥주의 풍미를 만들어 낸다. 맥아의 경우에는 곡물을 기반으로 한 맛을 만든다. 예를 들어 식빵이나 비스킷 등을 연상시키는 맛을 내기도 하며 볶거나 구운 곡물의 맛, 곡물을 태운 맛 또는 커피를 연상 시키는 맛 등을 만들어 낸다. 홉의 경우에는 맥주에 쌉쌀한 홉의 쓴 맛과 함께 열대 과일, 시트러스, 핵 과일 등을 연상 시키는 풍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맛은 맥주에 사용된 맥아의 가공 정도나 홉의 품종 등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효모의 경우에도 맥주의 맛을 만들어내는데, 맥아나 홉과 구별되는 점은 발효의 부산물로써 나타나는 맛이라는 점이다. 또한 효모의 종에 따라서 만들어내는 부산물의 비율과 양이 달라지며, 여기에 발효가 일어나는 온도에 따라서도 맥주 맛에 다른 영향을 미친다.
맥주의 효모는 맥즙 속의 당분을 분해하여 알코올과 이산화탄소 및 기타 부산물을 생성하게 된다. 이와 같이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효모가 당분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분해하는 것을 알코올 발효라고 하는데, 맥주의 효모는 맥즙의 당분을 알코올 발효하는 과정에서 알코올, 이산화탄소와 함께 과일향을 연상시키는 에스테르, 향신료를 연상시키는 페놀 등의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특정 과일이나 향신료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에스테르와 페놀이 단일한 맛을 내는 화합물이 아니라 화학적 조성에 따라 세부적으로 다른 맛을 연상시키는 여러 가지 화합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합물로 인해 우리는 ‘효모의 맛’ 또는 ‘효모의 풍미’로 칭하는 ‘맛’을 맥주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된다.
맥주 맛의 한 축인 효모
맥주를 구분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드러나는 색이나 맛으로도 구분할 수 있고, 기원이 된 지역이나 역사적 맥락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또 도드라지는 재료의 특성을 가지고 맥주를 구분 할 수도 있다. 효모의 특성이 드러나는 맥주의 테이스팅 노트 또는 양조장의 맥주 맛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이스티(yeasty)’라는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이 이스티라는 표현에서는 맥주에서 효모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효모가 만드는 어떤 맛이 도드라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부가적인 설명으로 맛에 대한 서술은 있지만 이것이 효모에서 오는 것인지에 대해서 확신을 하기에는 한 단계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효모의 특성이 드러나는 맥주를 마셔보며 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효모의 특성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맥주이자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스타일은 밀맥주다. 밀맥주라고 하면 크게 독일식 밀맥주와 벨기에식 밀맥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두 스타일 모두 효모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도드라지는 맛의 종류는 차이가 있다.
밀맥주와 효모의 특성
독일식 밀맥주 중에서 헤페바이젠(Hefeweizen)은 효모(Hefe)를 거르지 않은 밀맥주로 독일식 밀맥주 중에서도 특히 효모의 특성이 도드라진다. 효모의 알코올 발효 부산물로 생성되는 물질 중에서 바나나를 연상시키는 향을 내는 에스테르, 정향을 연상시키는 향을 만들어내는 페놀이 도드라진다. 미국식 에일 효모가 에스테르나 페놀의 생성이 적어서 깨끗하고 깔끔하며 효모의 특성이 옅게 나타나는데 반해 바이젠용 효모는 에스테르와 페놀의 생성이 많아 풍성하고 강한 효모의 맛을 가진다. 만약 홉향과 쓴맛이 강렬한 IPA의 레시피에서 효모만 바이젠 효모로 바꾼다면 홉의 쓴 맛 향과 함께 효모의 특성도 강하게 나타난다.
벨기에식 밀맥주에 사용되는 효모는 바이젠 효모와는 달리 복잡한 과일 맛과 약간의 신맛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특성은 벨기에식 밀맥주에 주로 첨가되는 재료인 고수씨와 오렌지 껍질과 조화를 이루어서 부재료의 맛과 향을 도드라지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수도원 맥주와 벨기에 맥주
벨기에의 수도원 맥주, 그 중에서도 트라피스트 에일을 양조하는데 사용되는 효모는 대개 몇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벨지안 두블(Dubbel)이나 쿼드루펠(Quadrupel) 또는 다크 스트롱 에일 (Dark Strong Ale)과 같이 벨기에식의 어두운 색을 가진 알코올 도수가 높은 맥주에 사용되는 효모는 복잡하고 강한 과일향을 만들고 높은 알코올 농도에서 잘 견디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중 슈포르(Rochefort)의 양조에 사용되는 효모의 경우 복잡한 과일 맛을 연상시키는 에스테르와 후추를 연상시키는 페놀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특히 검붉은색 과일을 연상시키는 캐릭터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뉘앙스가 몰트의 향을 도드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효모의 풍부함이 드러나는 세종
효모는 발효가 진행되는 온도가 높을 경우에 온도가 낮을 때보다 에스테르와 페놀을 더 많이 생성시킨다.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지는 것이 세종 효모다. 세종은 그 이름과 같이 농번기에 농부들이 마시던 술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진 종류다. 전통적인 세종 효모 역시 벨기에의 왈롱(Wallonia) 지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세종 듀퐁의 효모다. 비교적 높은 온도(24-26도)의 발효에도 잘 견디는 편인 이 효모는 특히나 발효 과정에서 다른 효모에 비에 에스테르나 페놀이 많이 생성된다. 약간의 달짝지근함과 함께 밝은색 과일의 풍미와 함께 후추 등 스파이시한 향신료를 연상시키는 풍미가 나타난다.
‘개성파’ 야생 효모
효모는 크게 에일 효모와 라거 효모 그리고 야생 효모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에일 효모와 라거 효모는 사카로마이세스(Saccharomyces) 속에 속한 효모로 하위의 종만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야생 효모라고 부르는 통칭 브렛(Brett)’ 효모는 브레타노마이세스 브뤼셀렌시스(Brettanomyces Bruxellensis)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효모다.
벨기에에서 유래한 람빅은 자연 발효 맥주로 불리며, 공기 중에 떠 있는 브렛 효모를 맥주에 끌어들여 발효하는 맥주로 브렛 효모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브렛 효모는 건초, 땀에 젖은 말안장 또는 가죽, 농장, 정향, 쿰쿰함, 젖은 이끼 등으로 표현되는, 맥주와는 멀리 떨어진 듯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트라피스트 맥주중 오르발(Orval)은 람빅과는 달리 발효에 일반 효모와 함께 야생 효모를 의도적으로 함께 사용한다. 이를 통해 효모의 풍미를 보다 복잡하게 끌어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야생 효모의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EDITOR_장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