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기술을 품은 크래프트 맥주, 혁신을 꿈꾼다
세계 최대 온라인 전자결제시스템 회사의 공동창업자이자 경영 베스트셀러 ‘제로 투 원(Zero to one)’의 저자, 피터 틸(Peter Thiel)은 기업의 성공전략은 ‘수직적 진보’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일을 해봤자 세상은 1에서 n이 될 뿐(수평적 진보)’이며 ‘경쟁하지 말고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야 세상을 0에서 1로 만들면서, 마침내 초과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다(수직적 진보)’고 말했다.
IT기술로 창조적 독점 기업을 만들었던 그의 권고는 지난 2~3년 사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한국 크래프트 맥주 산업계에도 유효하다. 대량생산이나 박리다매식 로우엔드(Low-end)에 가까운 비즈니스가 아니라 ‘0에서 1’을 만드는 차별화된 고객경험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IT기술’에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미국, 영국등 크래프트 맥주 선진국에 불고 있는 IT기술과 맥주의 컬래버레이션에 주목해보자.
IT기술로 수요와 생산량을 미리 예측
맥주생산관리 기기와 서비스를 만드는 미국의 스티디서브(SteadyServ)는 아이케그 (iKeg)라고 불리는 특수 저울과 센서를 제작한다. 이 장비는 케그 바닥 및 내부에 부착되어 펍에서 판매하는 맥주 라인업과 케그 내 맥주 잔량을 스마트폰이나 POS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게 쌓인 정보는 데이터 클라우드에 축적된다. 펍 대표는 맥주가 갑자기 떨어지는 일 없이 미리 브루어리에 케그를 주문해둘 수 있으며 브루어리는 지역별, 시즌별, 맥주별 판매 데이터를 확보하여 생산 및 유통량을 파악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스티디서브는 브루어리가 맥주 생산 단계부터 소비자 니즈를 파악하여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맥주를 미리 만드는데 필요한 기술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스티디서브와 유사한 스마트 케그 모니터링 장비를 만드는 호주의 스타트업 바이너리 비어(Binary Beer)는 지난 달 세계적인 맥주 회사 하이네켄, 안호이저 부시 인베브와 협업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 브루어리이자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스톤 브루잉(Stone brewing)과 시에라 네바다 브루잉(Sierra Nevada brewing)은 이전부터 이와 같은 기술을 도입한 것은 물론 더 나아가 데이터 관리회사인 글로벌데이터(GlobalData)의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기술과 각종 모션 센서를 사용하여 브루잉에 필요한 물과 에너지 소비의 최적화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인공지능(AI)이 빚는 맥주의 등장
인공지능에 소비자 정보와 취향을 학습시키고, 이를 활용하여 맥주를 양조하는 기업은 작년에 처음 등장했다. 영국의 인텔리전 트엑스 브루잉(IntelligentX brewing)은 페이스북 메신저봇을 이용, 소비자로부터 피드백을 수집하고 이를 이용해 양조자는 레시피 구상에 반영한다. 인간이 대량 데이터를 학습할 때 걸리는 시간보다 인공지능이 대신 할 때 빠르고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회사의 설명이며, 벌써 4종류의 상업용 제품도 출시되었다.
양조과정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움직임은 대기업 맥주 공정에도 등장했다. 올해 8월 일본 기린맥주는 인공지능을 이용한 맥주 양조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머신러닝 방식의 인공지능이 20년간 사람이 만들어낸 양조 데이터를 습득하여 최적의 양조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기린맥주가 이러한 기술을 도입한 이유는 숙련된 장인의 일손이 부족한 일본의 현실도 있지만 다각화된 소비자 기호를 발견하는데 사람보다 기술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깔려있다
소비자의 불편을 해결해주는 IT기술 접목이 나타나야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이 크래프트 맥주업계에 적용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효용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맥주 애호가’가 ‘덕후’로 진화하면서 쉽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내 손으로 직접 맥주를 만들어 먹는 ‘자가양조’다. 국내에도 몇몇 수입산 자가양조 기기가 판매되고 있으나 대부분 온도, 빛 등 외부적 요인을 꼼꼼히 신경써야 하는 제품들이다. 그렇다고 안정적인 양조를 위해 공방을 방문하자니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이 같은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나온 미국 시애틀의 스타트업 피코(Pico)는 세계적인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 ‘킥스타터 (Kickstarter)’에서 성공적으로 거액의 펀딩을 달성하여 화제를 모았다. 피코의 장점은 간단한 기기 버튼 조작으로 미국 내 50여개 유명 브루어리의 레시피를 집 안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이를 위해 피코는 브루어리들과 라이센스 체결을 하였고, 소비자들은 넓은 땅덩어리 때문에 전국 유통이 힘들어서 구하기 어려웠던 크래프트 맥주를 손쉽게 맛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발달한 미국, 영국등에서는 온라인을 통한 맥주배달 서비스도 흥행 중이다.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 스타트업 홉시(Hopsy)는 ‘서브(The sub)’라는 가정용 크래프트 맥주 탭 기기를 판매하고 라이센스 계약을 맺은 브루어리의 맥주를 전용 용기에 담아 정기배송해주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브루어리에서는 온라인으로 주문이 들어옴과 동시에 맥주를 전용 용기에 담고, 홉시는 콜드체인을 활용하여 48시간 이내에 맥주를 배송한다.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맥주를 간편하게 집앞까지 주문할 수 있고, 신생 브루어리들은 처음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 가장 어려운 ‘유통’을 온라인을 통해 해결할 수 있어 맥주의 품질과 브랜딩에 집중할 수 있다.
홉시는 단순 배송서비스에 머무르지 않고 소비자들에게 각 브루어리의 양조 철학과 맥주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를 알려주고자 용기에 NFC 기반의 라벨을 부착하였다. 소비자는 주문한 맥주를 마시면서 스마트폰을 활용, 브루어의 맥주 소개 영상을 시청하며 브루어리와 유대관계를 이어나갈 수도 있다.
2002년 하우스 맥주 열풍 이후 다시금 불어닥친 한국의 맥주 르네상스 시기는 분명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 브루어리들은 높은 기준을 가지고 다양하고 질 좋은 맥주를 생산해야하며, 소비자들은 여러 채널을 통해 이를 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 중 하나가 IT기술과의 접목에 있다.
지난 6월 영국에서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와 테크 스타트업의 첫 공동 콘퍼런스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영국과 캐나다의 브루어리와 IT기술 기반 스타트업이 한데 모여 크래프트 맥주와 테크를 뒤섞어 세상을 변혁해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러한 흐름은 크래프트 맥주가 전체 맥주 시장의 1%도 되지 않는 한국에서는 아직 요원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의 간지러운 부분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설 기반으로 실험하며 배움을 통해 서비스를 개선하는 애자일(Agile)한 IT기술과의 결합은 장차 국내 크래프트 맥주 업계에 선택이 아닌 필연이 될 것이다.
EDITOR_오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