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외관 속에 숨겨진 폭발적인 개성 뉴 잉글랜드 IPA
부드러운 외관 속에 숨겨진 폭발적인 개성 뉴 잉글랜드 IPA
왜 하필 ‘뉴 잉글랜드’인가
일단 뉴 잉글랜드 IPA라는 말을 언뜻 들으면 새로운 개념의 영국식 IPA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나 여기서의 ‘뉴 잉글랜드’는 미국 동 북부 지방의 6개 주(State)1)를 통칭하는 말이다. IPA는 다들 알고 있듯 홉의 캐릭터를 도드라지게 살려낸 맥주 스타일이고, 요컨대 뉴 잉글랜드 IPA는 ‘미국 뉴 잉글랜드 지방에서 만들어낸 홉 캐릭터 가득한 에일 맥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맥주가 다른 미국 전역에서 만들어지는 맥주들과 달리 뉴 잉글 랜드 IPA라는 분리된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당연히 기존의 아 메리칸 IPA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럼 뉴 잉 글랜드 지방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는 최초로 대중 의 주목을 받게 된 뉴 잉글랜드 IPA인 알케미스트(Alchemist) 브루 어리의 헤디 토퍼(Heady Topper)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버몬트(Vermont)와 헤디 토퍼
‘알케미스트’는 2003년 뉴 잉글랜드 지방에 속하는 6개주 중 하나 인 버몬트 주에서 브루펍(Brewpub)으로 시작했다. 버몬트 주는 평 범한 관광객이라면 쳐다도 안 볼 한적한 시골 지방이라 이들도 처 음은 그저 소박한 동네 브루펍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곳의 브루마 스터인 존 킴미히(John Kimmich)는 양조전문가 그렉 누넌(Greg Noonan)으로부터 받은 ‘영국에서 채취해온 모종의 효모’에서 가능 성을 보고 이 효모를 이용한 맥주를 만드는 연구를 꾸준히 해왔고 결국 2011년 이를 이용하여 ‘헤디 토퍼’를 만들어내게 된다. 헤디 토퍼는 기존 IPA에 대한 상식을 깨는 충격적인, 그러면서도 굉장히 맛있는 맥주였기에 금방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이 볼 것 없는 지 역에 맥주를 사려는 사람들로만 교통 체증이 빚어질 정도로 어마 어마한 대히트를 하게 된다. 오죽하면 이 전통도 근본도 없는 맥주 가 당시 세계 최고의 IPA를 넘어 세계 최고의 맥주(Beeradvocate. com 기준)라 여겨질 정도였으니 이 맥주에 대한 연구가 다른 브루 어리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같은 버 몬트 주에 있던 브루어리들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힐 팜스 테드 브루어리(Hill Farmstead Brewery), 로손즈 파이니스트 리퀴 드(Lawson’s Finest Liquids), 피들헤드 브루잉 컴퍼니(Fiddlehead Brewing Company) 등 같은 버몬트 주에 위치한 브루어리들도 훌 륭하게 헤디 토퍼의 캐릭터를 재해석하고 만들어 내면서 이러한 맥주를 두고 ‘버몬트 스타일 IPA’라 칭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 마찬 가지로 뉴 잉글랜드 지방에 위치한 메사추세츠 주(Massachusetts State)의 트릴리움 브루잉 컴퍼니(Trillium Brewing Company), 트 리 하우스 브루잉 컴퍼니(Tree House Brewing Company) 등의 여 러 브루어리도 이러한 스타일의 IPA를 훌륭하게 만들게 되면서 이 들을 통틀어 뉴 잉글랜드 IPA라 칭하게 되었다.
뉴 잉글랜드 IPA는 무엇이 다른가
뉴 잉글랜드 IPA는 대체 기존의 IPA와 어떻게 달랐기에 크래프트 맥주 신에 이와 같은 충격을 주게 되었을까. 우선 시중에 흔히 퍼져있는 IPA를 떠올려보자. 보통 진한 황금색 부터 호박색 정도의 색깔을 지니고 전반적으로 투명한 외관이 떠 오를 것이다. 맛은 어떠한가. 맥아의 캐릭터(쉽게 말하자면 곡물의 맛)와 홉의 캐릭터(다채로운 과일, 풀, 꽃의 향과 쓴맛)가 모두 강렬 하게 드러나는 것이
가장 대중적인(흔히 웨스트 코스트 IPA라 부르 는) IPA의 맛이다. 입안에 풀을 씹은 듯한 거친 느낌을 주거나 혹은 쌉쌀함과 더불어 딱 떨어지는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것도 IPA의 특징 중 하나다.
반면 뉴 잉글랜드 IPA는 같은 IPA라는 장르에 속해 있음에도 이러 한 대중적인 IPA와는 꽤나 상반되는 캐릭터를 지니고 있다. 일단 외 관부터가 다르다. 색은 샛노란색에서 주황색 정도의 밝은 색인데도 유리잔 반대편이 전혀 비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마치 구름과도 같 은 탁함을 지니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이러한 맥주를 받았으면 불 량품 아니냐고 할 법한 정도로 위화감이 느껴지는 외관이다. 하지 만 더욱 큰 충격은 맛을 봤을 때 느끼게 되는데, 한 모금 들이켜 보 면 놀라울 정도로 강렬한 온갖 과일과 꽃의 풍미가 구름처럼 입안 을 가득 메운다. 그러면 기존의 홉 향 풍부한 IPA랑 뭐가 다른가 싶 지만 뉴 잉글랜드 IPA는 맥아의 캐릭터와 홉의 쓴맛을 많이 절제 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때문에 홉의 다채로운 과일, 풀 의 풍미들만이 굉장히 도드라지게 느껴지게 된다. 거기다 일반적인 IPA에선 찾아보기 힘든, 마치 벨기에 맥주를 마시는 듯한 효모의 다 채로운 에스테르도 뉴 잉글랜드 IPA의 복잡한 풍미에 일조한다.
재밌는 건 이 맥주의 질감이다. 맥아의 단맛을 절제한 맥주임에도 입 안에서 드라이하다는 인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되려 헤페바이 젠(Hefeweizen)과 같은 밀맥주를 마시는 듯한 부드러운 마우스 필 (Mouth Feel)을 선사해준다. 그럼에도 워낙 홉에 많이 들어간 맥주인 지라 신선한 풀떼기들이 주는 약간의 거친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어 여러 번 마셔도 이 맥주가 질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보통 맥주 를 마시고 마지막에 느껴지는 쓴맛이나 알코올의 여운도 감지되질 않 아 오롯이 홉의 풍미를 절정으로 느끼게 되니, 한잔의 홉으로 만든 쥬 스를 마신 듯한 인상이 절로 들게 된다. 이러한 매력 덕분에 홉을 사 랑하는 미국의 많은 맥덕들에게 뉴 잉글랜드 IPA가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상식을 파괴한 맥주
사실 기존의 IPA에서 맥주가 탁한 것은 일종의 ‘옳지 못한 것’ 정도로 도 취급이 되었다. ‘맥주가 탁하다’라는 것은 효모가 아직 맥주 중에 남 아있다는 뜻이고 이런 부유 효모는 맥주의 맛을 느끼는데 있어 흔히 이취(Off-Flavor)로 취급되는 여러 잡미를 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 존의 IPA를 만들던 브루어리들은 원심분리기와 같은 장비를 이용하거 나, 응집력이 좋은 효모를 사용하거나, 효모를 가라앉히는 물질을 집 어넣는 등 맥주를 최대한 맑게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 다. 다만 이 과정을 통해 손실되는 홉의 풍미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 다는 것이 IPA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에 과감히 의문을 제기한 것이 헤디 토퍼였다. 맥주가 좀 탁하면 어때서? 필터링을 하지 않고 홉 향을 더 살리는 것이 좋지 않나? 효모에서 오는 이취는 분명 히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맞지만 효모가 주는 부드러운 마우스 필과 에스테르의 풍미가 주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다. 이 점을 한번 살 려보자, 하는 데에 생각이 이른 것이다. 때문에 뉴 잉글랜드 IPA는 기 존에 사용하던 효모와는 정반대로 좀처럼 가라앉지도 않는(Powdery) 데다 에스테르도 많이 생성해내는 효모를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탁 함과 부드러움을 더더욱 강화해주는 재료(밀, 귀리 등의 단백질이 많 은 곡물), 다소 안 좋은 풍미를 주긴 하나 맥주의 질감은 더욱 부드럽 게 해주는 염화물(chloride)과 황산염(sulfate)이 많은 물 등 기존의 IPA에선 분명히 꺼리던 것들만 마치 청개구리처럼 골라서 사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안 좋은 풍미들은 필터링을 하지 않아 손 실이 거의 없는 압도적인 홉의 풍미로 가려버린다. 때문에 이취에 민 감한 사람들 중엔 홉을 좋아하더라도 뉴 잉글랜드 IPA는 좋아하지 않 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게 예민하게 파고드는 것이 아닌 이상 뉴 잉글 랜드 IPA는 브루어의 의도대로 홉 풍미 가득하고 부드러운, 주스 같은 맥주가 되는 것이다.
뉴 잉글랜드 IPA의 현주소
뉴 잉글랜드 IPA는 앞서 언급한대로 홉의 캐릭터를 극도로 살리는 맥주이기에 생산 이래로 하루가 다르게 풍미가 줄어드는, 신선함이 곧 생명과도 같은 맥주이다. 때문에 초기엔 현지에서만 생산, 판매 하는 뉴 잉글랜드 IPA의 특성상 미국 동부지역에서만 즐길 수 있는 굉장히 보기 드문 맥주였으나 현재는 미국 전역뿐 아니라 우리나 라 같이 크래프트 맥주 문화가 발전한 곳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에선 대표적으로 더부스의 헤이 쥬드(Hey Jude),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의 첫사랑으로 만나볼 수 있다. 최근 수입된 코로나도 브루잉 컴퍼니(Coronado Brewing Company)에 서 만든 노스 아일랜드 IPA(North Island IPA)도 뉴 잉글랜드 IPA를 표방하여 만든 맥주이니 뉴 잉글랜드 IPA의 느낌이 어떠한지 궁금 하다면 접해보시길 권한다. 물론 뉴 잉글랜드 현지에서 직접 구한 맥주를 마시는 것이 가장 좋지만 말이다.
뉴 잉글랜드 IPA는 기존의 ‘옳지 않다’라고 여겨지던 선입견을 과감 하게 깨부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혁명적인 맥주이다. 주변에서 규정한 틀만 계속 따랐다면 뉴 잉글랜드 IPA와 같은 훌륭한 맥주가 탄생조차 못했을 것이다. 알케미스트의 과감한 판단, 끈질긴 연구 끝에 탄생한 한 잔의 맥주가 시사하는 바는 살면서 이따금씩 되새 겨볼 만한 교훈이 될 것이다.
EDITOR_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