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휴식을 위한 맥주, 세션 비어
사람들은 라거를 생각하면 ‘쭉~↗ 쭉↗쭉↗쭉↗ 쭉~↘ 쭉↘쭉↘쭉↘’ 들이켜는 맥주를 떠올린다. 갈증을 해결해줄 알싸한 탄산과 가벼운 맛과 함께. 페일 라거보다는 진하지만 마시는 데 부담 없고, 쉽게 들이켤 수 있는 맥주가 있다면 어떨까. 쉽게 취하는 사람, 취하지 않고 가볍게 마시길 원하는 사람. 혹은 마신 듯 마시지 않은 듯 낮술을 즐기고픈 사람에게도 좋을 그런 맥주가 있다면? 약 100년 전에 ‘가볍게 들이켜기 좋은 맥주’이자 ‘음주가 허용된 시간에 마시는 맥주’라는 뜻을 가진 말이 등장했다. 맥주의 특정 재료나 양조방식을 지칭하기보다는 맥주의 알코올 도수에 초점이 맞춰져만들어진 말. 바로 세션 비어(Session Beer)다.
산업혁명, 알코올, 맥주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맥주는 항상 사람들과 함께 했다. 위생적인 물을 구하기 어려워 음용할 음료가 필요한 지역에 서는 물을 대체할 훌륭한 음료였으며, 한여름 농사철의 뙤약볕 아 래에서 노동해야 할 때는 갈증을 없애주는 단비와 같았다. 수도원, 주점, 여관 할 것 없이 방문자를 맞이해야 하는 곳에서는 음식과 함께 맥주를 내어주곤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맥주잔을 앞에 두고 갈증을 해소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맥주는 사 람들이 서로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인 동시에 고단한 노동의 피로를 잊게 해 주는 역할도 했다. 그런 맥주가 산업혁명의 시기를 지나며 사람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초기부터 도시의 수많은 노동자는 긴 노동시간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되어 있 었다. 어떤 곳에서는 하루 20시 간에 가까운 장시간의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고, 언제 다칠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도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술은 노동자들에게는 하루의 고단함 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줄 존재였 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몰려 든 사람들, 그리고 장시간의 노 동은 사람들의 음주 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술을 마실 절대적인 시 간이 부족해졌던 것이다. 시골에서처럼 해가 뜨면 농사를 짓고 해 가 지면 노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쳇바퀴 돌듯 하루 내 내 반복되는 고되고 긴 노동을 해야 했다. 오랜 시간 펍에 머물며 천천히 취하게 해 줄 맥주보다 짧은 시간 고주망태로 만들어 줄 증 류주의 인기가 늘어났다.
공장은 쉴새 없이 연기를 뿜어내며 제품을 생산했고, 술은 노 동자들의 생산효율을 떨어뜨리는 사고뭉치 취급을 받았다. 빠른 시간에 사람을 인사불성으로 만들 수도 있는 증류주는 많은 부작 용을 낳았다. 술로 인한 범죄도 증가하고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지경이었다. 자본가들은 술을 마시느라 일 을 게을리한다고 생각했고 술을 마셔서 제품의 수율이 떨어진다 고 생각했다.
물론 맥주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어떤 술이 더 좋고 나쁨 을 이야기할 것 없이 알코올은 경제 발전을 해치는 적이 되었고, 기업들은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 나라의 존폐가 걸린 전쟁 중이라면 더욱 술로 인한 폐해를 막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음주허용시간의 맥주
세션 비어(혹은 세션 에일)는 1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에서 노 동자들의 음주허용시간(Drinking Session)을 제한한 것에서 유래 한다. 당시 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을 오전 11시에서 오후 3시, 오 후 7시에서 오후 11시 두 차례 각각 4시간으로 제한했다. 사람들 은 이 제한된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한 많은 양의 맥주 또는 다양 한 맥주를 마실 수 있도록 3~4% 정도의 낮은 알코올 도수의 맥주 를 마셨는데, 이 맥주를 세션 비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술 을 마신 뒤에도 일해야 했고, 시간도 제한되어 있으니 많은 양을 마시더라도 부담스럽지 않을 맥주가 필요했다. 즉, 세션 비어는 특 정 장르나 스타일의 맥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음주허용시간’ 을 위한 ‘많이 마시기 좋은 맥주’를 뜻한다.
시간이 흘러 현재에는 세션 비어가 알코올 도수를 낮춰서 음 용성을 높인 맥주를 총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의 맥주 장 르를 구분하는 데 있어 BJCP 카테고리를 기준으로 하면 영국식 맥 주 중에는 Ordinary Bitter(11A), Best Bitter(11B), Dark Mild(13A)를 세션 비어로 분류할 수 있다. 그 밖의 유럽 맥주로는 Altbier(7B), Berliner Weisse(23A), Belgian Pale Ale(24B) 등도 세션 비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발전과 함께 세션 비어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정 장르로 구분되기 보다는 기존의 인디아 페일 에일(IPA)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알코올 도수를 낮춘 스 타일의 세션 IPA맥주가 발달했다. 세션 IPA는 대개 알코올 도수가 4.5%를 넘지 않으며(4.5%를 넘는 경우도 있다), IPA인 만큼 페일 에일보다 홉의 특징을 더 도드라지게 나타낸다는 점에서 구별된 다. 기존의 IPA는 강렬한 홉의 쓴맛과 아로마를 전면에 내세우고 비교적 높은 알코올 도수를 가지고 있어 여러 잔을 마시기에는 부 담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세션 IPA가 인기를 얻 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미국 크래프 트 맥주의 인기가 늘어나며 세션 비어, 특히 세션 IPA를 시장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나른한 오후, 햇살을 즐기며 마시는 맛있는 맥주 한 잔은 조그 마한 평화와 행복을 주곤 한다. 한낮의 더위를 잊게 해 줄 맥주를 찾고 있거나 잠시 짬이 나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은데 거하니 취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런데 마냥 옅은 맛의 맥주는 마시 기 싫다면? 당신만의 “Drinking Session”을 위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맥주. 잠시 쉬어가는 시간 동안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맥주가 세션 비어다.
EDITOR_장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