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맥주 명가를 꿈꾸는 제천 뱅크크릭 브루잉(Bank Creek Brewing)
솔티 마을에 솔솔 불어오는 맥주 바람
벨기에 맥주 명가를 꿈꾸는 제천 뱅크크릭 브루잉(Bank Creek Brewing)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 쌓인 아담한 충북 제천시 봉양읍 솔티마을. 열다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곳에 신선한 맥주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부터 밭에 고추, 감자 대신 홉 덩굴이 뻗어 올라가더니 올해는 홉 작목반이 생겼다. 달 콤하고 아삭한 제천 사과는 애플 사이다가 되고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던 오디, 오미자와 같은 지역 재배 농산물 등 도 맥주 재료로 변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 꽃송이버섯 농장에서는 맥주 효모 찌꺼기를 활용해 버섯을 키 우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이런 변화는 지난 해 이 마을에 자리잡은 뱅크크릭 브루잉으로부터 시작됐다. 글로벌 정보통신기업의 프로그래머로 시작해 23년 동안 미국, 일본, 중동 등지에서 IT관련 일을 했던 홍성태 뱅크크릭 브루잉 대표는 오랜 기간 맥주에 대한 애정을 키워오다 귀농해 브루어리를 열었다. 작년 9월부터 맥주 생산을 시작했고 12월부터 블론드(Blonde), 브라운 (Bruin) 두 종의 벨기에 스타일 맥주를 내놓고 있다.
막바지 꽃샘추위가 매섭던 3월 초 방문한 뱅크크릭 브루잉은 마치 지역 사랑방을 방불케 했다. 마을 주민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커피 한잔을 나누고 “이제 다른 맥주는 못 마시겠다”며 인근 마을이나 제천시에서 한참을 운전해 와 두세 박 스씩 실어가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홍성태 대표는 “로컬 브루어리로서 지역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맥주 병이 코르크 마개로 덮여 있는 750ml 용량의 병인 데다 라벨에 맥주 이름도 영어(Solti)로 표기돼 있어 수입 맥주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하나하 나에 다 지역성을 담았다. 한자로 ‘물을 가두는 둑’과 ‘흐르는 냇물’이라는 뜻을 가진 제천(堤川)을 영어로 표현해 뱅크(bank 둑, 제방), 크릭(creek 시내, 개울)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맥주 이름도 마을 이름인 솔티로 지었다. 브루어리 로고 역시 제천의 지도를 홉으로 표현했다. 올해는 본격적으로 마을 주민들과 7000평의 농지에 사츠, 캐스케이드, 센테니얼, 치눅 등을 포함한 14가지의 홉을 재 배할 예정이다. 홍 대표는 “홉은 기존 작물에 비해 수입이 2배 가량 높고 재배 기간도 짧아 농가 소득 증대에 큰 도움이 된다”며 “브루어리에서도 수입 홉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우리 땅에서 난 신선한 홉을 쓸 수 있어 윈윈”이라고 밝혔다.
뱅크크릭 브루잉에서는 벨기에 스타일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 벨기에 맥주 맛을 제 대로 내기 위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벨기에에서 몰트, 홉, 효모, 오렌지필과 일부 장비들 까지 직접 들여왔다는 설명이다.
“재료 중에서도 특히 몰트가 맥주 맛을 크게 좌우하는데 각 나라 맥주의 맛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원산지의 몰트를 써야 합니다. 벨기에 맥주는 벨기에 산 몰트로, 독일식 맥주 는 독일 몰트로 만들어야 제 맛이 나죠.”
현재 유통하고 있는 솔티 블론드와 브라운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잘 나가고 있다. 블론 드는 은은한 오렌지향과 스파이시함의 조화로, 브라운은 맥아 맛을 강조한 깊은 맛으로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의 투자 유치에 성공해 브루어리 증설을 추진 중이다.
맥주를 선보인 지 6개월 남짓 된 신흥 브루어리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홍 대표가 다 년간 쌓아온 탄탄한 노력 덕분이다. 양조를 전공하거나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홈브루잉 실험을 거듭하면서 전세계 양조 관련 서적 수백 권을 독파했다. 또 카리에레 스(Carrieres) 등 벨기에 브루어리에서 직접 양조 노하우를 배워 이론과 실제의 간극을 채웠다. 이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벨기에 맥주 전문가로 인정 받아 다른 브루어리에서 배우러 올 정도다.
홍 대표는 재료의 특성과 발효 과정의 화학적 변화를 완전히 이해하고 이를 활용한 과학적인 양조를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벨기에 맥주에서 중요한 것은 병입 후 2차 발효인데 이 과정에서 설탕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설탕에 포함돼 있 는 미네랄이 맥주의 풍미를 좌우하거든요. 여러 설탕의 특성을 이해하고 알맞은 것을 골라 넣어야 합니다.” 캔디 슈가만 해도 색깔별로 다양하고 원당도 만든 재료에 따라 발효에 미치는 영향이 천차만별이다. 물의 미네랄 비 율과 산성도 역시 맥주 맛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역삼투압 정수 후 칼륨, 칼슘 등 미네랄을 맥주별로 맞게 배합하고 산 성도를 맞춰 사용하고 있다. 양조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하는 홍 대표를 마주하고 있자니 고수는 숨어있어도 저절로 드러난다는 ‘낭중지추’라는 말이 떠올랐다. 뱅크크릭 브루잉은 올해 도수를 8.5%에 맞춘 두벨을 시작으로 트리펠, 페일 에일, 더블 IPA까지 라인업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크래프트 맥주가 대중화될 수 있도록 생산원가를 낮추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일단 임대료와 수도세가 없고, 몰트 등 재료를 직접 대량 수입해오면서 원가를 낮추고 있다”며 “올해 본격적으 로 홉을 수확하면 재료비를 더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근 농가에서 재배한 과실을 활용한 사워 에일, 쌀을 주재료로 한 맥주 등 실험적인 도전도 해 나갈 계획이다. 큰 목 표는 우리땅에서 나는 재료로 세계적으로 맛을 인정 받는 맥주를 완성하는 것이다.
브루어리 건물 앞에 나부끼는 대형 태극기에 대해 묻자 “정치적인 의미는 없다”고 선을 그으며 말을 꺼냈다. “오랜 해외 생활을 하면서 뿌리의 중요성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 동안의 경력을 버리고 브루어리를 시작하면서 세계 에서 인정받는 한국 맥주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죠. 세계 시장에서 대한민국 제천 맥주 솔티가 사랑 받는 날이 꼭 올 겁 니다.”
EDITOR_황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