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트 맥주, 전주의 전통주가 되다, ‘술로시티’ 유상우 대표와의 만남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붐비는 전주 한옥마을에서 경기전을 지나 뒷길로 빠져나오면 ‘동문예술거리’라고 불리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홍지서림‘이 들어서고, 창작소극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들로 채워지면서 전북 지역의 문화예술가들을 위한 길로 자리매김했다. 비록 지금은 한옥마을의 상업화 흐름에 밀려 그 찬란했던 색깔이 다소 바랬지만, 화려한 한옥마을과는 대비되는 빈티지한 중소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골목의 끝 소극장 맞은편에서 공연이 끝난 후 조용히 한 잔 기울이기에 딱 좋을 것 같은 펍 ’시‘에 방문했다.
전주의 양조회사 ‘술로시티’의 유상우 대표가 운영하는 펍 시는 그와 닮은 구석이 많은 공간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시는 어떤 의미인가. 하루가 다르게 PC, TV, 모바일 등을 통해 전에 없던 새로운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시를 영향력 있는 예술 장르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시에서 멀어져 가던 때부터 지금까지도 시인들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진정한 예술의 정수를 만들어내기 위한 실험을 이어왔다. 누가 알아주든지, 혹은 그렇지 않든지.
유 대표 또한 과거 시인을 지망하던 문학가였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 실험이 시가 아닌 ‘술’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의 실험을 담아낸 공간의 이름을 시라고 지었다.
맥아가 아닌 생보리로 맥주를 만들 수 있을까
유 대표는 2012년부터 지금까지 술로시티에서 싹튼 보리인 맥아(몰트)가 아닌 국산 생보리로 맥주를 만드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90% 이상을 전주 지역에서 생산된 생보리를 쓰고, 맥주의 맛과 향을 내기 위해 10% 이하의 수입산 몰트를 사용한다고 한다.
몰팅이 되지 않은 생보리는 바로 당을 추출해낼 수가 없기 때문에 당을 분해하는 작업이 한 번 더 필요한데, 이를 위한 최적의 효소 조합을 찾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수입산 몰트는 맛과 향, 그리고 추출되는 당의 양 등이 항상 유지되기 때문에 일정한 환경에서 정해진 레시피대로만 양조를 하면 같은 맛을 낼 수 있지만, 생보리로 만든 맥주는 그 레시피도 전무하고 심지어 들판에서 수확한 형태 그대로 납품 받아 가공처리도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유상우 대표는 국산 보리로 만든 워트가 수입산 몰트로 추출한 것과는 다른 성분들을 함유하고 있기도 하고, 비발효 당이 발생하기도 해서 생각지도 못한 맛이나 이취가 발생할 수 있어 이를 컨트롤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이야기한다. 한때는 이취가 너무 많아 혹평을 들은 적도 있지만 이제는 많은 부분을 해결해서 일정한 수준의 맛을 유지하고 있다.
라거 계열인 ‘경기전’은 풍부한 몰트맛과 홉 향을 내면서도 깔끔한 바디감을 자랑한다. 한옥마을의 검은 기와지붕을 빗대 이름을 붙인 ‘오목대’는 스타우트 계열로 역시 고소한 몰트향과 담백하고 가벼운 바디를 동시에 가져서 마시기에 부담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맥주는 재미있게도 몰트가 10% 이하 사용되었고, 지역특산물인 전주 보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국내 주세법상 맥주가 아닌 전통주로 분류된다.
술의 차별성은 농업으로부터 온다
유상우 대표는 배상면주가에서 느린마을양조장 업무를 하다 퇴직하고 이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느린마을양조장이 배상면주가의 제품들을 판매하는 도심 속 전통주 펍 브랜드로 많이 알려졌지만, 처음에는 배상면주가와 지역농업인들이 협력해서 지역 특산물을 이용한 양조를 하는 컨셉이었다. 유 대표는 배상면주가에 몸담은 동안 경북 청송, 전북 고창, 전남 나주, 해남 등 6개 지역에 양조장을 세웠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나주 배, 청송 사과, 해남 고구마 등을 이용한 배상면주가의 ‘아락’이라는 증류주 브랜드다. 그 시기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각의 지역 특산물로 술을 빚던 그는 ‘술은 농업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지금의 술로시티를 만들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최근 일어난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붐은 사람들이 더 이상 획일화된 국내 대기업의 맥주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맥주 맛을 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기존과는 다른 강렬한 크래프트 맥주의 매력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없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다양한 종류로 늘어난 맥주들의 맛이 비슷비슷하다고 느껴지는 때가 온다. 그 이유로 유상우 대표는 수입산 몰트와 홉을 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술 맛에 차별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재료인데, 그 재료가 해당 지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모두들 사용하는 수입제품이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내는 구조를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유 대표는 지역 농업에서 시작하는 양조를 제시한다.
“특정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만들어 다른 곳에 찾아볼 수 없는 맛과 향을 품은 술, 그게 바로 시간과 거리를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좋은 술이 만들어지는 가장 중요한 시작점일 겁니다. 우리의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더 탄탄한 기반을 갖추고 세계인들에게까지 사랑 받을 수 있으려면, 단순히 맥주를 상품화하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농업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시 농업으로 돌아가는 양조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술쟁이는 술 맛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10여 년간 술을 만드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고향에 내려와 다시 시작한 도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참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유 대표는 왜 이런 작업을 시작했냐는 질문에 결국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모든 술 만드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제는 이렇게 힘든 줄 알게 되었는데도 그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맥주 레시피도 개발하고, 전주에 핫플레이스로 주목받고 있는 객리단길에 새로운 크래프트 맥주 펍도 열 예정이다. 그리고 전주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업으로 올해부터 시작한 양조 교육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맥주가 아닌 전통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온라인 유통도 비교적 자유롭다. 전주 농생명소재연구원과 함께 공동으로 ‘전주크래프트’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유통을 시작할 예정이다.
처음엔 술을 만들기 위한 정성이나 술의 문화적 의미 같은 것들을 사람들이 이해해주고 관심 가져주길 바랬다. 물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런 바람은 있지만, 유상우 대표는 술로시티와 보낸 몇 년 동안 ‘결국 술쟁이는 술 맛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주는 그 ‘맛’을 찾기 위해 지금도 고군분투 중이고, 만약 찾게 된다면 결국 이 모든 실험들의 과정과 의미도 함께 알아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도 전주의 자연으로 빚은 술인 술로시티가 그 맛을 알아주는 사람들에게 서서히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EDITOR_이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