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 6회 월드 챔피언십 오브 비어 소믈리에
비어 소믈리에계의 월드컵
지난 9월 26부터 27일까지, 한국 국가대표 비어 소믈리에 4명이 이탈리아 리미니에서 펼처진 ‘2019 월드 챔피언십 오브 비어 소믈리에’에 출전했다. 독일 되멘스(Doemens) 아카데미가 2년마다 주최하는 국제 대회로서, 올해 제6회를 맞이해 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었다. 월드 챔피언십 2019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브라질, 네덜란드, 미국, 일본 등 19개국을 대표하는 비어 소믈리에 80명이 치열한 경쟁을 치러 전 세계를 대표할 비어 앰배서더 단 한 명을 선발하는 자리였다.
되멘스 아카데미란?
되멘스 아카데미는 1895년에 독일에 설립된 전통있는 맥주 양조 교육 기관으로서, 국제 경쟁력을 갖춘 음료 시장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곳이다. 비어 소믈리에 코스는 2004년 시작되었으며, 단순히 테이스팅과 관련한 교육뿐 아니라 생산 과정, 맥주 관련 장비의 기술적 부분, 마케팅,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까지 포함한 체계적인 프로그램으로 비어 소믈리에를 양성해왔다. 현재까지 되멘스 아카데미는 30여개 국가에서 총 5천여 명의 비어 소믈리에를 배출했다.
안녕하세요. 디플롬 비어 소믈리에(Diplom-Biersommelier) 김미연입니다. 비어 소믈리에도 국가대표가 있냐고요? 네, 있습니다! ‘월드 챔피언십 오브 비어 소믈리에’는 월드컵 개인전과 같은 국제 대회입니다. 각국에서 예선으로 선발된 국가대표 비어 소믈리에들이 참가합니다. 지난 5월에는 한국 대표 비어 소믈리에를 뽑는 예선 대회가 열렸는데요. 디플롬 비어 소믈리에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블라인드 테이스팅과 영어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국가대표전을 치르게 됩니다. 올해 2회째 출전하는 한국에는 출전티켓이 4장 주어졌습니다.
맥주에 관심 있는 여러분께 소믈리에의 자질을 검증하는 대회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저희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개인의 경험에서 그치지 않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한국 국가 대표 비어 소믈리에들의 목소리를 모아 펼쳐놓으려 합니다. 저와 함께 그 치열했던 월드 챔피언십 대회의 자취를 따라가볼까요?
전야제
제6회 월드 챔피언십은 이탈리아의 휴양 도시 리미니에서 열렸습니다. 눈 부신 햇빛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아름다운 이곳에, 대회 참가자를 포함해 스폰서 관계자와 참관객 모두가 모였습니다. 태극기를 펼쳐들 때 어깨가 살짝 무겁기도 했지만, 여러나라에서 온 다양한 참가자들과 인사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진행될 대회를 생각하며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맥주를 멀리하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전야제의 미션이었습니다.
대회 당일에는 하루 안에 예선전, 준결승, 결승전이 모두 치러집니다. 오전부터 시작되는 예선전에서는 전문 지식과 감각 능력을 평가하는 이론 시험과 블라인드 시음 시험을 통해 상위 10명을 뽑습니다. 준결승전부터는 그 외 모두가 우승 후보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청중으로서 참석합니다.
예선전
오전부터 시작된 예선전에서는 총 3단계의 시험을 통해 본선에 진출할 상위 10명을 선발합니다. 서로 격려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시험장에 입장하니 80명분의 시음 잔이 쫙 펼쳐져 있었고, 각자의 번호가 적힌 자리에는 열 개의 잔과 생수, 시험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1번부터 10번까지의 맥주를 맛보며 맥주 스타일을 맞추는 블라인드 시험이었습니다. 색깔과 탁도를 보며 나름의 순서를 정해 하나씩 향과 맛을 보고, 시험지에 제시된 30여 종의 맥주 라벨과 스타일에 각각 매칭했습니다. 한국팀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함께 했던 스터디가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평소보다 시음주의 상태가 너무 좋아서 놀라웠는데, 대회 운영에 얼마나 큰 노력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이취(Off-flavor, 오프플레이버) 시험입니다. 앞선 시험과 동일하게 10개의 맥주를 시음하면서 시험지에 제시된 30여 개의 보기 중 맞는 곳에 번호를 기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늘 연습했던 것을 먼저 구별해 놓고 보니, 당황스럽게도 남은 몇 개 중에는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이취도 있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도 있었고요. 그동안 수차례 이취 세미나를 했지만, 스스로 자만했고 게을렀다는 생각이 들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못 맞출 순 있어도 최소한 모르는 건 없어야 한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예선 마지막 관문은 필기시험입니다. 이렇다 할 가이드라인이나 범위 없이 맥주의 역사부터 양조 이론, 맥주 스타일, 글로벌 시장, 통계 수치에 이르기까지 맥주에 대한 전방위적인 전문 지식을 평가하는 시험이었습니다. 펜을 들자마자 마주한 첫 번째 문제에서부터 당혹스러워 웃음이 터졌고, 마지막 문제를 다 풀기까지 ‘멘붕’을 넘어 숙연함마저 들었습니다. 맥주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상당히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최근 동향과 다양한 정보를 넓고 깊게 알아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전에 특별히 ‘공략’할 만한 수준의 시험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선 결과 발표
3개의 예선 시험을 모두 마치고, 상기된 마음으로 다른 소믈리에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참가자 전원의 성적표가 프린트되어 벽에 탁 붙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최초로 시행되는 방침이라고 합니다. 테이스팅 시험지의 답안도 공개되었고요. 순위를 살펴보며 자신의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대회에 참가하고자 했던 목적을 이룬 셈입니다. 욕심냈던 예선 진출이란 목표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한국팀 모두 중위권의 성적을 냈고 최선을 다해 아쉬움 없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청중으로서 본선진출한 10명을 응원하며 본격적으로 대회를 즐길 차례입니다.
준결승전
예선전을 통과한 비어 소믈리에 10인은 2명씩 한 조가 되어 맥주 프리젠테이션으로 경쟁을 합니다. 이는 둘 중 승자만 뽑고 패자는 탈락시키는 ‘녹아웃 스테이지(knockout stage)’ 방식으로 진행되는데요. 심사위원단이 승자 5명과 ‘럭키루저’ 1명을 결정해 총 6명의 최종 우승 후보를 선발합니다. 한국팀을 이끌어주신 이지희 선생님 역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무대 위에 5종의 맥주가 가려져 있고, 참가자가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하기 직전 청중에게만 맥주가 하나씩 공개됩니다. 소믈리에들은 서로 격리된 채 한 명씩 무대 위에 올라가서, 전혀 정보가 없는 상태로 맥주를 시음한 뒤 그에 대해 즉흥적으로 설명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두 명이 하나의 같은 맥주를 블라인드로, 그것도 3분 내에 발표해야 하므로 매우 긴장되고,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살벌한 방식이죠.
이번 대회의 본선 진출자 10명은 독일인 4명, 오스트리아인 3명, 스위스인 2명, 이탈리아인 1명으로 공교롭게도 모두가 독어를 구사했습니다. 본 대회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에 한해 영어 동시통역을 제공하는데, 아무래도 공식언어가 독일어와 영어이므로 모두가 독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만약 한국팀이 본선에 간다면 영어로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한다는 허들이 있죠.)
준결승의 관전 포인트는 마치 한일전과도 같은 ‘독일 vs 오스트리아' 의 대결이었습니다. 두 국가는 늘 우승 후보를 배출하는 강팀인 동시에 지난 대회에서 박빙의 승부를 겨루었죠. 준결승 후보들은 팀 차원에서 전략과 훈련을 단단히 준비해온 분위기를 물씬 풍겼습니다. 1:1 프리젠테이션의 승부는 지켜보는 청중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맥주를 두고 다르게 풀어내는 프리젠테이션을 비교하는 것은 참가자로서는 상당히 부담되나, 지켜보는 입장에선 꽤나 재밌었습니다. 준결승의 결과는 독일팀의 완승! 5명의 승자 중 4명이 독일팀, 1명이 스위스였고, 오스트리아의 1명은 럭키루저로 결승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결승전
결승을 준비하는 동안 대회장에선 이탈리아 크래프트 맥주들이 제공되어 더욱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피드백과 응원을 주고받는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했고요.
총 6명의 진출자가 각각 무대 위에 올라가서 3종의 공개된 맥주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 선택하고,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경쟁이었습니다. 7분이란 제한된 시간 동안 우승 후보들은 각자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습니다. 비어 소믈리에로서 기술적 전문성이 돋보여야 할 뿐 아니라, 청중과 소통하면서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인먼트 요소 역시 심사의 기준이 된다는 점이 특히 신선했습니다. 우승 후보들이 한 명씩 호명될 때마다 각국 팀의 열띤 응원과 청중의 환호 소리가 현장을 더욱 뜨겁게 했습니다. 긴장과 흥분이 버무려진 와중에 무대 위 비어 소믈리에들은 무섭게 집중했고, 각자의 개성을 드러냈습니다. 감성적 전달이 뛰어나 표현이 유려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믈리에, 이야기 중심으로 흡입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이어가는 소믈리에, 스타일 특징이나 푸드 페어링 등 새로운 콘텐츠 제안에 집중는 소믈리에 등 개개인의 특징이 도드라져서 흥미로웠고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영예로운 우승을 거머쥔 비어 소믈리에는 독일 대표 엘리자 로이스(Elisa Raus)였습니다. 대회 역사상 최초로 여성 월드 챔피언이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뒤이어 2위는 스위스 대표 패트릭 토미(Patrick Thomi), 3위는 독일 대표 미하엘 프리드리히(Michael Friedrich) 이 수상했습니다. 월드 챔피언이 된 엘리자는 향후 2년간 타이틀을 유지하며 세계적으로 ‘맥주 앰배서더’(beer ambassador to the world)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에프터파티
대회의 마지막 순서, 세레모니 만찬은 리미니 그랜드 호텔의 영화 같은 핑크빛 연회장에서 열렸습니다. 월드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로서 너무나 아름다웠던 장면이 생생합니다. 이탈리아 음식으로 구성된 코스 요리가 지역 크래프트 맥주와 페어링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모인 열 정적인 비어 소믈리에들의 만찬은 웃고 떠들고 마시는 사이 어느샌가 댄싱 파티로 변모해있었고, 그렇게 자정을 훨씬 넘겨서야 끝이 났습니다.
직업으로서의 비어 소믈리에를 알고 싶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비어 소믈리에들은 정체가 무엇인지, 실제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형태로 일을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비어 소믈리에로서 먹고사는 것, 지속하는 것, 어떤 특별한 것이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대회에 참가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리고 호기롭게도 나의 실력은 어느 정도고 과연 재능이 있는지 테스트해 보고 싶었습니다. 승패를 떠나 국제 규모의 권위 있는 대회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젊은 비어소믈리에들에게 한 단계 성장하는 기회가 되었고, 저 역시 부족하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조금은 감을 잡았다는 점에서 월드 챔피언십을 향한 큰 첫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합니다. 2021년, 대회는 다시 뮌헨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언젠가는 아시아에서 개최되기를 꿈꿔 봅니다.
최원석
한국 챔피언, 신촌 뉴타운 펍 대표
이번 대회의 소회는 ‘졌지만 잘 싸웠다’거나 ‘세계무대와의 격차를 느꼈다’는 식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유럽 선수들이 한국팀의 퍼포먼스를 놀라워하고 어떻게 트레이닝하는지 질문할 정도였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서 한국의 비어소믈리에 혹은 비슷한 공부를 하고 계신 업계 친구 및 동료들의 수준이 얼마나 세계적 수준에 근접해 있는지, 그리고 맥주라는 주종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다시금 확인하며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여러 국제대회에서 한국 맥주들의 입상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 열악한 제도와 환경 속에서도 한국 크래프트 맥주가 세계적인 수준에 견줄 수 있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시는 한국 맥주 업계의 모든 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가 모두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한다면, 한국이 세계적인 맥주 강국이 되는 날이 정말 허황된 꿈만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상호
국내 크래프트맥주 브랜드인 문베어 브랜드 앰배서더
각국의 비어소믈리에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한국에 비어소믈리에가 소개되고 생겨난 지 이제 5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어느새 많은 비어소믈리에가 활동하고 있으며, 이제 한국 비어소믈리에의 실력 또한 해외의 여느 비어소믈리에에 견줘도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느낀 바로, 비어소믈리에들의 실력은 자국 맥주 문화와 수준과 어느 정도 비례하였습니다. 맥주를 사랑하고 가까이하는 국가일수록 소믈리에의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한국의 비어소믈리에도 한국 맥주 시장의 성장과 함께 발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성장한 시장은 뛰어난 비어소믈리에를 낳을 것이고, 뛰어난 비어소믈리에는 한국 맥주의 발전에 분명 이바지할 테니까요.
박장우
신사동 크래프트 루 펍 대표
감사하게도 정말 좋은 기회로 이번 월드 챔피언십 오브 비어 소믈리에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저 자신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확인해 보는 자리였으며, 나아가 한국 비어 소믈리에들의 가치와 잠재력을 몸으로 직접 느껴보는 기회였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전문 지식, 기술과 더불어 창의력을 발휘하는 세계의 비어 소믈리에들을 만나며 존경과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또한 한국 비어소믈리에로서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며 그동안 국내 크래프트 맥주업계의 발전에 밑거름이 된 많은 분께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가치 있는 일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은 항상 험난하지만,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발전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대한민국도 머지않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