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맥주 회사의 마케터로 도약하다 - 카브루 임성일 마케팅 팀장 인터뷰
국내 크래프트 맥주 업계 선두 기업 카브루의 임성일 마케팅 팀장을 만났다. 주류회사와 식품회사를 거쳐 카브루에 입사한 그는 이전까지 소위 ‘맥알못’이었고, 심지어 지금도 맥주보단 소주가 더 잘 맞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크래프트 맥주를 향한 애정은 숨기지 못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후 기자의 꿈을 꾸던 그는 기자 시험에 거듭 실패하던 차, 주류전문 제조사 보해양조에서 주관하는 대학생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 계기로 보해양조를 첫 직장으로 삼게 됐다. 그 후 해태음료, 풀무원, 11번가 등 다양한 회사에서 경험을 쌓으며 전문 마케터로 성장해왔다. 자못 진중하고 신중한 모습이 인상적인 그는 “이래 봬도 술 들어가면 아무도 못 말린다”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마케팅 노하우
마케터로서 임성일 팀장이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는 다년간 직접 겪어온 실무에 기반한다. 그는 마케팅의 일반적이고 학술적인 정의를 언급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마케팅 철학을 이야기했다. 마케터가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이며, 그 시작은 바로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부터’라고 말한다.
“내가 준비하는 제품이, 프로모션이, 혹은 브랜딩이 내 옆 사람과조차 관계 맺지 못하는데, 어떻게 일면식도 없는 고객과 관계를 맺겠느냐고 항상 스스로 질문합니다. 이것이 제가 지향하는 가치이자 원칙입니다.”
그가 말하는 ‘관계’는 끊임없이 옆 사람의 이해를 구하고, 동의를 받고, 내용을 공유하는 과정이다. 옆 사람 역시 한 명의 고객이며, 고객은 절대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케터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커뮤니케이션 담당 팀에 내용이 잘 공유되지 않으면 마케터의 의도가 잘못 해석되어 고객에게 전달될 수 있어요. 만약 재무 쪽에서 마케터와 생각이 다르다면, 업무에 사용한 비용을 제대로 처리해주려 하지 않겠죠. 마찬가지로 영업 쪽에서 '이미 잘 팔리는 제품이 있는데, 당신이 만든 신제품을 팔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라면 끝나버리는 거예요. 기획실과 관계가 좋지 않다면, 아무도 마케터가 하려는 일에 예산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 1차 거래처, 측 유통 채널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 그다음 단계인 고객으로까지 무사히 가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옆 사람과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관계 중심적 경향으로 인해 정말 좋은 제품이 최종적으로 고객에게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정말 나쁜 제품인데 고객에게는 좋은 제품으로 포장될 위험도 있다. "하지만 저는 본질은 항상 지키려고 해요. 나쁜 제품이 고객에게 전달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 또한 마케터인 저의 몫이겠죠."
‘지역이름 마케팅’의 자격
경기도 가평을 거점으로 10년 넘게 크래프트 맥주를 만들어온 카브루는 지역명 ‘가평’을 마케팅의 용도로 사용한 적이 없다. 진정성 없는 제품은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이 그 이유다. 임 팀장의 원칙에 따르면, 가평이라는 지역명에 걸맞아지려면 우선 양조장이 가평에 위치해야 하고, 가평의 원재료를 최대한 활용하거나 지역 사람들과 협업을 하는 등 지역과 상호작용 해야 한다. 그러한 지역 친화적 행보가 충분히 쌓이지 않는다면 맥주에 지역 이름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향이 여수인 그는 최근 ‘여수 지역맥주’를 표방한 제품 사례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심지어 여수에는 이미 '버터플라이 아일랜드'라는 브루펍이 있는데, 지역과 별 상관없는 업체가 그 지역명을 가져다 써버리면 브루어리 입장에서는 얼마나 속상하겠느냐는 것이다. 지역에 위치한 브루어리로서 지역명 사용을 아껴뒀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만약 가평과 아무 상관없는 업체가 가평산 메밀을 조금 넣었다고 가평 에일이란 이름으로 맥주를 출시한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순 없을 겁니다. 카브루가 10년 가까이 맥주를 만들어왔지만, 가평이나 청평 등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제품을 안 내놓은 이유도 진정성 없는 제품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지역 맥주회사고, 정말 지역과 함께하는 장을 형성하고 나서야 지역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브루는 진정한 지역맥주로 거듭나기 위해 꾸준히 준비하여 올 하반기에는 지역 이름을 딴 맥주를 출시할 계획이다.
수제맥주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업계를 경험해왔으며 ‘맥알못’으로 시작해 수제맥주 회사의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업계에 종사하려는 사람에 게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요청했다. 그는 각자 희망하는 분야에 맞는 방식으로 크래프트 맥주 관련 지식과 경험을 쌓을 것을 추천했다. 홈브루잉을 하거나, 전문 자격증을 따거나, 크래프트 맥주 전문 펍에서 근무하거나, 온라인 및 오프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방법 등이 있다.
특히 마케터로 일하기 위해서는 전체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업계의 주요 이슈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영, 재무, 영업 등 타분야에서 다루는 지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만 이 시장에 와서 마케팅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수제맥주 회사에서 마케터를 뽑는다고 하면 대부분 경력직을 뽑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시장에 적용되는 법적 지식이나 변화를 꿰고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법행위를 저지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이러한 자질과 별개로 ‘수제맥주 업계와 잘 맞는 기질과 성향이 있다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쪽 시장에서는 또라이 기질의 사람이 성공하는 것 같아요. 패션 업계나 IT 업계는 분위기가 조금 더 정제된 것 같은데, 이곳은 주류시장이다 보니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직원 중에는 온몸에 문신이 있는 사람이 있어요. 또 다른 직원은 맥주 행사장에서 잔뜩 취해 춤추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스카우트했죠. 꼭 마케팅적인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정말 잘 논다. 정말 또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있는 그대로 즐기는 모습을 좋게 봤기 때문입니다. 틀을 깨는 '똘끼'있는 사람들이 업계에 많이 왔으면 좋겠고, 그런 사람들이 업계에서 훨씬 더 인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카브루의 브랜드 전략
카브루 맥주는 재미없다?
임성일 팀장은 카브루 맥주 중 더블IPA와 모자익IPA를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회사에서 모자익(Mosaic)을 단일 홉으로 맥주를 만들면 반응이 좋은데, 카브루가 만들었다고 하면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고 한다. 1세대 수제맥주 브루어리인 카브루에 혁신적인 이미지보다는 고전적인 이미지가 굳어져 온 탓일까?
그는 기존의 고루한 브랜드 이미지와 달리 카브루가 다양하고 앞서가는 맥주를 많이 만드는 회사라는 점을 말한다. 카브루는 위탁생산 등을 포함하여 총 25가지 이상의 맥주를 만들고 있다. 아마 국내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맥주를 만들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혁신적인 맥주를 만들 경우, 카브루보다 규모가 작은 다른 회사들은 배치 사이즈가 작다 보니 직영 펍에서 팔아도 두세 달이면 소진이 되는 구조인 데 비해, 우리는 한 번 양조하면 상대적으로 양조 규모가 크다 보니 그럴 수가 없어요. 그 점이 더 혁신적인 맥주를 만드는 데 제약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도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 나가고 있어요. 만들 능력이 되는데 굳이 안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조치로 별도의 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어 현재 브랜드와 동시에 운영하는 전략을 계획 중이다. “카브루 브랜드가 지금 당장 프리미엄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은 어렵고, 프리미엄 브랜드를 따로 하나 만드는 게 빠르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 카브루는 중가 브랜드로 포지셔닝을 하고 있는데,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서 배럴 숙성 맥주나 사워 등 새로운 시도를 선보일 계획이고, 아예 전용 공장을 지을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구미호 로고 & 사워맥주 출시
평면적이고 정적인 자세로 앉아있는 기존의 구미호 로고는 그간 소비자의 눈에 비친 카브루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연평균 성장률이 40% 가까이 되어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가만히 앉아있고 정체된 느낌이 든다는 카브루의 이미지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올해 4월 개정된 주세법시행령으로 소비자가 크래프트 맥주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넓어지면서, 이전까지 ‘B2B 시장’에 집중했던 카브루는 ‘B2C 시장’으로 이동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역동적이고 감성적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풀어보려는 노력 끝에 구미호 로고가 새로이 탄생했다. 카브루의 현재 브랜드 가치 및 방향성에 맞게 구미호라는 상상 속 동물을 재해석한 것이다.
작은 글씨 - 기존 로고로는 ‘맥주회사’라는 정체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꼬리에 홉을 매단 구미호’의 모습으로 맥주회사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물과 산의 형상은 가평의 지역적 특색을 나타낸다.
또한 카브루는 사워맥주 대중화의 차원에서 가평에서 생산된 포도즙을 넣은 사워 맥주를 9월경 출시할 계획이다. 국내에서 사워 맥주를 대량 판매 시장에 내놓는 첫 사례가 될 것이라고 임성일 팀장은 말했다.
나에게 수제맥주란
“저에게 수제맥주는 ‘나 자신을 찾는 것’ 입니다.”
임성일 팀장은 카브루에 합류하고 수제맥주를 만나면서 자신의 입맛을 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시간을 마주했다. 한때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시기를 겪었던 그는 각종 축제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맥주를 팔면서 점차 활달했던 예전의 자신을 되찾아갔다.
“사회생활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충격적인 일로 인해 자존감을 잃고 주눅 들었던 제가 인생을 되찾게 된 계기가 바로 수제맥주입니다. 만약 수제맥주를 알지 못했다면, 이 업계에 발을 딛지 못했다면, 저는 아마도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살았을 것입니다. 수제맥주를 통해 내 입맛에 맞는 맥주를 찾아가고 잃었던 저 자신까지 찾게 된 것은 진심으로 행운입니다.”
EDITOR_홍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