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북유럽에서 맥주를 즐기는 방법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날씨 예보는 후덥지근한 장마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주변에선 곧 다가올 날씨가 두렵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저는 조용히 여행 가방을 싸며 미소 짓고 있었죠. 여름철에도 시원한 곳으로 잠시 피신을 가게 되었거든요.
마침 밤에도 해가 떠있어 환한 백야(白夜) 시기를 맞은 북유럽 지역 국가들을 짧게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건강하고 평안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로 가득했던 그곳에서 기억에 남는 맥주 경험을 소개합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바에서 즐기는 로컬 맥주
위도가 그리 높지 않은 코펜하겐에서는 백야 현상이라기보단, 해가 밤 10시에서 11시 사이 늦게 집니다. 여행초반인 이때까지만 해도 햇살을 이렇게 늦게까지 누릴 수 있다니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죠. 실제로 너무 쨍하지도 않고 은은한 해를 오래 느낄 수 있어 맥주를 마시기에도 적당했습니다. 마치 서둘러 저물고 싶지 않아 게으름을 피우는 느긋한 해 같았어요.
숙소에 딸린 바에서는 덴마크 로얄 비어의 필스너, 클래식 두 종류와 아일랜드 머피스의 아이리쉬 레드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덴마크 로컬 맥주라고 하는 로얄 비어의 맛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아일랜드 맥주인 머피스 아이리쉬 레드의 맛이 좋았습니다. 질소 거품이 있어 무척 부드러웠던 아이리쉬 레드에선 땅에서 파낸 흙과 이끼 향이 났고 구수한 몰트 풍미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코펜하겐의 대표 맥주인 칼스버그를 마셔봤는데, 신기하게도 멜론과 수박 향이 나고 쓴맛이 덜했습니다. 칼스버그는 코펜하겐 사람들에게 단순한 맥주 회사가 아니더군요. 코펜하겐의 역사와 함께해온 칼스버그는 코펜하겐 시와 긴밀하게 협조하며 사회에 기여하려는 의지가 아주 강한 맥주 회사입니다. 코펜하겐의 랜드마크인 작은 인어 동상도 칼스버그의 자본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도시 곳곳에 칼스버그 마크가 보이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Welcome!’이란 인사를 건넨 광고판도 칼스버그였습니다.
노르웨이 예이랑에르 피오르: U자형 골짜기가 담긴 맥주
노르웨이 북서쪽 지방에는 빙하에 깎여서 생긴 U자모양 골짜기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지형을 일컫는 ‘피오르(Fjord)’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 예이랑에르(게이랑에르, Geiranger)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유명한 피오르 중 하나인데, 이곳에서 배를 타고 상쾌한 공기와 수많은 절벽 폭포를 가까이서 맨 얼굴로 느끼고 있노라면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보단 웅장하고 멋지단 인상이 강합니다.
물가와 맞닿아 있는 예이랑에르 마을에는 브루어리가 하나 있는데, 거기서 양조된 페일 에일을 배 안에서 마실 수 있습니다. 당연히 예이랑에르의 물로 양조된 이 맥주에서, 자신이 속한 자연을 향한 자부심과 애정이 느껴집니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맥주에는 하나같이 예이랑에르의 물과 산을 형상화하고 인격화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에는 폭포에 얽힌 설화가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폭포 중 하나가 ‘7자매 폭포’인데, 일곱 개의 거대한 물줄기가 일곱 명의 미혼 자매를 상징하고 맞은 편에 있는 폭포는 자매들에게 구혼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가 실패한 구혼자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예이랑에르 브루어리에서 나온 ‘구혼자’ 필스너도 있습니다.
예이랑에르 브루어리의 페일 에일은 열대과일 향과 미세한 몰트 풍미의 균형이 훌륭한 맥주였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더 많이 마시지 못한 게 아쉬웠어요.
노르웨이 북서부는 새벽 3시에도 바깥이 환해서, 전날 잠을 설치는 바람에 더 마셨다간 졸 것 같았거든요. 처음엔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백야가 이젠 잠을 방해하고 피로를 주는 현상으로 느껴지다니, 인간이란 뭘까요.
스웨덴 스톡홀름: 마트에서 왕창 사먹는 저도수 맥주
노르웨이에서 국경을 지나 스웨덴에 당도했습니다. 여행 일정이 반쯤 지나 몹시 지친 상태였고, 눈을 들어보니 숙소 근처에 커다란 마트가 보였습니다. 그 순간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마트 안에는 분명 맛있는 맥주가 가득할테니까요. 마트에 들어가자마자 쌓여 있는 맥주 박스를 발견하고 한껏 들떠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알코올 도수 3.5%를 넘는 맥주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원래 6도가 넘는 맥주인데 ‘알코올 도수 1/2 버전’으로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맥주가 그득그득 쌓여 있는데 어째서 모두 저도수인 걸까? 알고 보니 스웨덴에서는 알코올 도수 3.5% 이하의 맥주만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구매할 수 있고, 그 이상의 맥주는 국영 술 판매점 ‘시스템볼라예트(Systembolaget)’에서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음주를 제한하기 위해 정부에서 주류를 독점하는 이 정책은 스웨덴에서 처음 시작되어 다른 북유럽 국가와 캐나다 및 미국 일부 주에도 해당한다고 합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실망했지만, 생각해보면 알코올 도수가 낮아진 만큼 다양한 맥주를 더 많이 마실 수 있는 거잖아요? 결국, 많이 마시고 잠이나 자려는 심보로 잔뜩 사다가 먹어 치웠습니다. 저도수라 그런지 우리 돈 3000원 내외로 값도 저렴했습니다. 이곳 3.5% 이하 저도수 맥주에서는 저마다의 홉 향과 발효를 거치기 전 맥즙의 맛이 주로 느껴졌습니다. 평소에 마시는 맥주라기보다는, 맥주 기분을 낼 수 있는 ‘음료’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기대했던 진하고 깊은 풍미는 아니었지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또다시 스웨덴을 방문하게 된다면 낮에 시스템볼라예트부터 들를 것 같네요
스웨덴-핀란드 구간 페리
햇볕 아래, 뻥 뚫린 바다를 가로지르며!
북유럽 국가들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있어, 국가 간 주요 이동수단 중 하나가 배입니다. 특히 덴마크와 노르웨이 사이, 또는 스웨덴,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사이를 잇는 규모가 큰 배는 여름철 햇볕과 바다, 그리고 맥주 3종 세트를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싶어요. 배의 가장 꼭대기로 올라가면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갑판이 있는데, 여기에 자리 잡은 바에서 맥주를 팝니다.
오직 해당 회사 배에서만 판매되기 위해 특별히 양조되었다는 맥주가 인상적이었습니다. ‘Pühaste’라는 에스토니아 브루어리의 ‘Sireen(또는 Madame Butterfly)’ 엠버 에일인데, 얼 그레이 티와 수레국화 꽃이 재료로 들어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쓴맛이 꽤있으면서도 꽃향기와 부드러운 베르가모트 향이 은은하게 지속해서 정말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었고, 알코올이 6도인데 전혀 세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에스토니아도 북유럽에 속해 있는데, 상대적으로 덜 익숙한 나라이기도 하고 그곳 맥주도 처음 마셔봤기에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에스토니아 ‘Pühaste’ 브루어리의 ‘Sireen’ 엠버 에일
배에서 내릴 때 현지 사람들이 저마다 낑낑대며 맥주를 몇 박스씩 수레에 싣고 가는 진기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앞서 스웨덴의 경우도 언급했지만, 북유럽 국가들은 술을 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높은 주세로 값도 비싸기 때문에 면세구역인 배에서 한 번에 왕창 쟁여가는 경우가 흔하다고 합니다. 국민의 건강 역시 국가에서 책임지는 사회보장제도 때문에(?) 건강에 좋은 식품이나 약품은 저렴한 편이지만,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은 값이 비싸다고 합니다. 국민의 건강이 나빠지면 그만큼 세금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네? 저는 맥주가 건강에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교역의 민족, 바이킹의 후예가 자리 잡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다녀왔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고 마실 맥주는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북유럽 국가 중에서도 특히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은 서로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데, 맥주는 ‘Øl’ 또는 ‘Öl’이라 쓰고 한글로 치면 ‘얼’과 ‘엘’ 사이의 애매한 발음으로 읽는답니다. 다음에 다시 갈 땐 ‘맥주 한 잔 주세요!’를 준비해서 가야겠어요.
Skål (건배) !
EDITOR_홍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