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농업- 재료의 힘이 맥주의 특징을 만든다
미국, 영국, 독일, 벨기에, 체코. 맥주로 유명한 나라를 꼽을 때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다. 오늘날 맛볼 수 있는 현대적인 맥주의 기원이자, 주요 맥주 스타일이 개발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맥주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 이 나라들은 각각의 고유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소개된다.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 기조의 확산과 교통, 통신의 발달은 맥주 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세계적인 공급망이 더욱 빨라진 물류 과정으로 연결되고, 사람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출시된 맥주의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알게 된다. 세계 곳곳에서 유명 브루어리와 펍을 찾은 사람들이 그곳에서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국가들은 오래전 부터 맥주가 대중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맥주 관련 농업 또는 원료 관련 산업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원재료 산업이 필요한 이유 ― 맥아, 홉, 효모
맥주의 기본적인 원료는 맥아, 홉, 효모, 물이다. 맥아의 경우 알코올 생성의 재료가 되는 당분을 공급하고 색, 맛, 풍미, 곡물의 향기 등 미각적인 특성을 제공한다. 전통적인 맥주 산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던 것이 맥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공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맥아 품질이 균일하지 못하면 일관된 품질의 맥주 역시 만들 수 없다. 또한 그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면 양조사가 충분히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려우며, 제조할 수 있는 맥주의 스타일이나 맛의 스펙트럼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맥주가 술로서 기능하게 하는 근본이 바로 맥아라고 볼 수 있다.
맥주를 만들 때는 맥아를 통째로 사용하지 않는다. 당분과 여타 성분을 뽑아내기 위해 맥아를 우려낸 물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맥아가 가지고 있는 성분 중 사용되지 않는 부분이 발생하는데, 손실이 클수록 생산비용이 증가한다. 만약 맥아의 품질이 균일하지 못하다면 매번 생산되는 맥주의 원가 변동 폭이 커서 가격 산정이 어려울뿐더러, 매번 맥주를 같은 맛으로 양조하기 어려워진다. 맥아의 품질에 따라 알코올 도수가 달라지거나, 풍미나 색이 달라지는 등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양조자 입장에서는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게 되어 맥주 품질의 향상, 더 나아가 제품의 판매를 통한 수익 창출까지 불확실해진다.
크래프트 맥주의 확산은 전통적 맥주 원료 산업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IPA처럼 홉이 주인공인 맥주들이 인기를 얻으며 홉 품종개발과 관련한 산업의 주목도 또한 높아졌다. 단순히 홉의 수확량이나 병충해에 강한 품종 등을 개발하고 시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향기, 풍미 등 미각적 측면의 목적성이 전보다 더욱 크게 조명을 받고 있다. 홉의 중요성이 커지는 이유는 홉의 풍미와 향기가 맥주의 상품성을 결정짓는 요소로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홉은 다년생 덩굴식물로, 새로운 품종 개발에 1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며, 새롭게 경작지를 구성해서 상업적으로 경쟁력 있는 수확량을 확보하는데도 최소 3~4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필요한 만큼의 홉 공급량을 조절하는 데 시간이 필요해 수요와 공급 사이의 불일치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특정 품종이 큰 인기를 얻는다고 해도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는 충분한 수량을 공급하는데 시차가 발생하며, 이로 인한 품귀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세계적인 홉 공급업체들은 풍미와 향기가 좋고 새로운 홉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며,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홉을 개발하는데 많은 투자를 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효모는 맥주를 완성한다. 아무리 좋은 맥아와 홉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효모가 일하지 않으면 맥주가 아니라 ‘맥아 음료’일 수밖에 없다. 현대 맥주 산업에서 새로운 효모를 발견하는 일은 거의 이루어지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새로운 제품의 개발 면에서는 한계가 있으나 취급이 까다롭고, 즉시성이 중요한 만큼 연구와 보존, 공급의 면에서 산업화의 가치가 있다.
맥주와 농업, 산업 단계의 연결이 새로운 기회를 만든다
우리나라는 맥주 산업 및 전후방 산업에 있어 후발주자의 위치에 서 있다. 단순히 맥주를 언제부터 제조해왔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후방 산업을 조직하고, 이를 하나의 산업군으로 만들어가는 측면에 있어 그렇다. 특히 2차산업을 뒷받침해줄 1차산업이 미비한 상황이다. 맥주 제조업의 전방산업인 농업 및 농산물 가공업에서는 맥주의 원료뿐 아니라 다른 작물에 대해서도 제대로 산업화가 이루어진 것을 찾기 어렵다. 일반적인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현대 농업에서는 비용과 효율성에 의한 가격 조건과 품질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단적인 예로 국내에서 주식으로 소비되는 쌀을 제외한 곡물의 생산량이 매우 적은 수준을 유지하거나 점차 줄어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중 맥주 산업의 기반이 되는 맥주보리와 홉 재배, 맥아 제조 등 농업과 농산물 가공업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결국 산업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맥주의 산업적 가치가 주목받는 것은 주류 음용 경향의 변화 등 사회문화적 측면으로도 접근할 수 있지만, 1차-2차-3차 산업을 아우르는 산업단계의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있는 이른바 6차 산업의 영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리와 홉, 국내 맥주 관련 농업의 육성이 필요하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각자 농업 생산기반을 갖추고 있다. 농업의 기반이 대부분 주식으로 사용하는 식량 작물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외의 경우 일부 농업 선진국 또는 대단위 농업이 시행되는 국가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급작스러운 수요의 증가 또는 공급의 감소 등으로 발생할 수 있는 가격 변동에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맥아는 대부분 미국과 유럽의 생산 물량에 의존하며, 홉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일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량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맥주에 대한 선호도의 증가는 세계적인 원재료 품귀현상을 유발할 수 있는데, 특히 홉의 경우 그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홉은 맥아의 원료 곡물인 보리, 밀 등보다 생산량 조정에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맥주 시장 성장세가 지속한다면 만성적인 공급 부족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국내에서 홉 재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 홉 수급의 차질로 맥주 제조가 멈춰질 가능성도 있다. 맥아의 경우 홉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업은 쌀 재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정부의 수매가 쌀에 집중되어 있고, 정부 수매가 거의 없는 타 작물의 경우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식생활의 다양화로 쌀 소비가 점차 감소하는 상황에서 일부 논이 밭으로 전환되어 과일, 채소 등을 재배하고 있기는 하나, 이 또한 풍작과 흉작의 반복으로 가격 불안정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맥아용 곡물인 보리 등의 재배를 통해 국산 곡물로 맥아를 제조하는 산업이 궤도에 오르게 된다면, 단순히 해외 수입분을 국내 생산분으로 대체하는 효과뿐 아니라 농업 구조의 개선 역시 기대해 볼 수 있다.
필요성과 한계, 장기적 관점에서의 전략이 필요하다
현재 홉 재배의 경우 일부 농가에서 시험생산 수준의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에 관심을 가지는 지자체가 지역 차원에서 홉 재배를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한 홉 재배만으로는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세계적인 홉 공급업체들은 자체 육종 연구를 통해 새로운 품종을 선보이고 있으며,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어 다른 곳에서 이들의 허락 없이 재배할 수 없다. 설령 재배가 가능한 품종이라고 할지라도 기후, 토양 등 재배환경의 차이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경작할 수 있는 절대 면적이 좁아 지대가 높으며, 이에 따라 경작 비용 또한 높아 동일 품종으로 해외 생산분과 경쟁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또한 같은 이유로 대단위 경작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므로 국내 재배 환경과 실정에 맞는 육종 프로그램이 결합한 형태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중앙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대학 등 고등 교육기관과 연구소와 연계하여 농민들에게 홉 경작에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면, 보다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할수 있을 것이다. 맥아의 경우 홉보다 외국산과의 가격 경쟁이 더욱더 어렵다. 현재 국산 맥아는 수입산보다 2~3배가량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맥주 제조에 있어 절대적인 소요량이 크기에 맥주 제조사의 입장에서 홉보다도 더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최근 군산 맥아 공장이 가동을 시작했으나 상용화의 시작 단계라 품질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이 미흡하다는 점이 현장의 지적이다. 단기적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무리가 있는 만큼, 소요량이 많은 기본 맥아보다는 특수 맥아의 가공 기술에 중점을 두고 품질개발과 가격 경쟁력 확보에 집중하면서 점차 그 영역을 늘려가는 것이 하나의 해법이 될 수도 있다. 품질이 보장된다면 다소 가격이 높다고 할지라도 수요가 있을 것이고, 이에 정부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수요자의 입장에서도 부담을 덜 수 있다.
2018년 현재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은 약 520만 톤이며,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맥아와 맥주용 보리의 수입량은 약 23만톤 수준이다. 맥아와 맥주보리의 수요량은 쌀 생산의 약 4.4% 수준으로, 맥주 생산량이 증가하면 수요는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쌀 소비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농가의 재배 작물 전환 효과도 노려볼 수 있는 셈이다. 현대 시장 경제에서 단순히 ‘국산 제품이니 소비해 달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경쟁할 수 없는 원료를 구입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는 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품질의 좋고 나쁨을 넘어 수치화된 제품의 ‘스펙’이 필요한 이유다.
많은 브루어리가 운영되고, 맥주 생산량, 특히 크래프트 맥주의 생산량과 소비량이 늘어가는 것은 맥주 시장에서도 그동안 소수의 대기업이 독점하고 있던 효율성 위주의 경제가 다양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신호다.
소득 수준이 증가하면서 소비자의 요구가 세분되고 산업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다. 단순한 효율성보다는 고유한 개성이 중시되며, 이로 인해 새롭게 시장이 창출될 수 있다. 맥주 관련 농업과 농산물 가공산업의 육성이 필요한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국산 재료로 만드는 맥주. 단순히 ‘신토불이’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기반산업으로서의 농업을 보호하고, 이 자체로 고유의 개성을 지닌 상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그 맥주가 생산된 나라의 특징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것은 그 나라에서 생산되거나 개발된 재료를 이용한 맥주이기 때문에 공통적인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맥주 안에서 우리만의 고유한 맥락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기초인 농업과 연관산업의 육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