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에 숨어있는 정치 이야기
맥주에 숨어있는 정치 이야기
맥주 산업과 시장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오랜 시간동안 그 중심에 정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약 500년 전 독일 남부 바이에른 공국 빌헬름 4세의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 공포는 독일 맥주 명성의 기반이 됐다. 유럽연합(EU) 체제 출범 이후 단일 유럽시장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독일의 맥주순수령이 비관세장벽으로 지목되고 이후 주세법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맥주 시장은 정치적인 행위를 통한 제도에 따라 변화해왔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말은 사회적 조건들 및 사회 세력들의 투쟁이 국가에 의해 제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오늘날의 정치에도 맥주가 있다. 현대의 보편적 정치 이념인 민주주의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존 정치, 그리고 생활 정치까지 그 중심에는 맥주가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정치에 있어 맥주가 가지고 있는 함의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의아할 수도 있지만 맥주와 정치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사회민주주의 음료
독일 맥주에는 사회민주주의의 뿌리가 담겨 있다. 노동자는 19세기 독일 바이에른의 맥주와 함께 정치 의식을 키워갔다. 1830~1840년 쯤 ‘바이에른 맥주(Bavarian lager)’가 독일 전역으 로 전파됐을 때 ‘1848년 혁명’이 일어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참고 로, 이 당시 바이에른 맥주는 둔켈과 흡사하여 다크 몰트 캐릭터가 짙었다고 한다. 1890년까지 독일에서는 옥외집회와 시위가 철저히 금지됐는데 그 공간을 맥줏집이 대체했다. 이러한 맥줏집은 사회적 문제를 놓 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토론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바이에른 맥주 는 처음에는 노동자의 술이었다. 하층 노동자일지라도 귀족이 자 신보다 더 나은 맥주를 마시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와 같이 바이에른 맥주는 ‘평등’을 상징하며 민주적인 것으로 칭송 받 게 되면서 다양한 계층으로 퍼졌다. 노동자들이 저도수 술인 맥주 라는 절제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것이 바로 1848년 혁명이다. 1848년 혁명의 결과로 노동자의 권리가 증진됐 다. 또 혁명으로 탄생한 프로이센 헌법이 담고 있는 양심의 자유, 평등 원칙 등 기본권과 시민 사회의 기본 정신들은 독일 민주주의 의 전통적 뿌리를 형성하여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치인의 맥주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 레이스가 한창일 시 기에 힐러리 클린턴은 유권자들을 만나기 위해 위스콘신주의 펄 스트리트 브루어리(Pearl Street Brewery)에 방문했다. 전통적으 로 미국의 정당은 선거 유세를 할 때 미국식 라거를 판매하는 대 형 펍을 유세 장소로 활용했는데, 힐러리의 크래프트 브루어리 방 문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크래프트 맥주의 위상을 잘 보여준 예 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크래프트 맥주 산업이 각 지역 커뮤니 티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미 국 내 히스패닉(Hispanic)계의 크래프트 맥주 소비량이 증가 추세 에 있는 등 크래프트 맥주 애호가들이 다양한 출신 성분, 연령, 넓 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맥주는 선거 홍보 수단으로서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홍종학 전 의원에 버금갈 정도로 크래프트 맥주를 좋아하며 크래프트 맥주 산업을 지지하는 정치 인으로서 오하이오 주지사인 존 케이식(John Kasich)이 있다. 존 케이식 주지사는 그 동안 오하이오 주에서 맥주의 최고 알콜 함량(ABV)을 12%로 제한했던 법을 폐지했다. 또한 고객들에게 소량의 맥주 샘플을 무료로 제공할 수 있 도록 하는 법안에도 서명하였다. 이러한 법 개정은 오하이오 주의 크래프트 맥주 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함께 2010년 캐나다 토론토 G20 정상회담에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영국 캐머런 총리와의 맥주 교환도 인 상적이었다. 그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에서 생산하고 있는 구스 아일랜드 312 어반 윗 에일(Goose Island 312 Urban Wheat Ale)을 선물하였고 캐머런 총리는 영국의 대표적 에일 맥주인 홉고블린 (Hobgoblin)을 선물하였다. 이처럼 정치인에게 맥주는 하나의 소통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맥주와 생활 정치
한번쯤 ‘생활 정치’라는 걸 들어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반 대중이 일상을 통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 생활 정치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생활 정치는 일차적으로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생활 세계’를 그 기 반으로 한다. 오늘날 미국의 경우 성인 75%가 브루어리 근처(10마일 이내)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크래프트 브루어리는 관광 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맥주를 통한 세수 확보나 일자리 창출을 통해 지역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이처럼 크 래프트 맥주 산업은 지역 사회에 있어 자립의 기반이다.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자치를 실현하는 풀뿌리 생활 정치 에서 자립이 핵심 요소임은 분명하다. 한편, 생활 정치의 주요 이슈는 환경, 평화, 여성, 인권, 이웃, 도시 등 자기실현적 삶과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에 관 련된 문제들이다. 아래는 생활 정치를 실천하는 여러 맥주들 중 몇몇에 대한 소개다.
피네간스(Finnegans)
미국 미네소타주에 위치한 피네간스라는 맥주 회사는 건강한 사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핵심 가치로 내걸고 있으며 맥주 판매 수익의 100%를 식량난으로 허덕이는 이들에게 식품으로 기부한다. 이들은 지역 레스토랑, 펍, 마트를 통해 맥주를 판매하는데 그 지역에서 발생한 판매 수익은 그 지역에 위치한 농장으로부터 식품을 구입하는데 쓴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은 지역 공동체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피네간스는 설명한다.
브루독(BrewDog)의 헬로, 마이네임 이즈 블라디미르(Hello, My Name is Vladimir)
‘헬로 마이네임 이즈 블라디미르’는 더블 IPA 스타일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반(反)동성애 법에 항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맥주다. 브루독은 이 맥주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으며 판매 수익금의 50%는 소수자 단체에 기부된다.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가 뉴햄프셔주 헨니커 브루잉 컴퍼니 (Henniker Brewing Company)에 서 맥주 양조에 사용된 몰트(spent malt) 처리 과정을 체험하고 있다. (출처: 존 케이식 공식 인스타그램)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다양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기에 종종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맥주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또한 좋은 정치는 ‘사람’, ‘공동체’, ‘지속가능한 사회’를 지향하는데 크래프트 맥주가 추구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맥주가 추구하는 가치는 엄청나다. 바라건대, 좋은 맥주 한잔을 통해 우리 사회가 좀 더 민주적이며 살기 좋 은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EDITOR_김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