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호가든”. 한국을 방문한 셀리스 브루어리
화사한 과일 향에 상쾌한 풍미를 자랑하는 뽀얗고 하얀 맥주. 바로 벨기에 스타일의 밀맥주를 수식하는 말입니다. '벨지안 화이트' 혹은 '벨기에 밀맥주'라고 하면 많은 경우 호가든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즐겨 마시는 호가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고 계세요?
여름 햇살이 가을볕으로 넘어가던 어느 날, 한국을 방문한 ‘셀리스 브루어리’의 오너 크리스틴 셀리스가 이에 관해 다이나믹한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호가든 맥주의 이면엔 어떤 이야기가 있으며, 셀리스 브루어리는 호가든과 어떤 관계일까요?
꺼져가던 벨기에 밀맥주의 불씨를 살리다
호가든(Hoegaarden, 후하르던)은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지역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선 중세 후기인 14세기부터 밀맥주를 만들어온 전통이 있었으며, 이후 다른 지역으로 맥주가 수출되면서 많은 사람이 신선한 맥주를 맛보기 위해 호가든 마을을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마을은 큰 수입을 벌어들이게 되었고, 1571년에는 양조사 조합이 생기는 등 활발한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1608년에 주교가 밀맥주 수출에 세금을 매기면서 판매량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세기엔 대량 생산되는 황금빛 라거가 인기를 끌었고, 전통적인 밀맥주 양조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1956년엔 마을에 남아있던 마지막 밀맥주 양조장 톰신(Tomsin)마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역의 전통 밀맥주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젊은 우유 배달부가 꺼져가던 불씨를 다시 살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17살 때부터 톰신 양조장의 일을 돕곤 했던 피에르 셀리스(Pierre Celis)입니다. 양조장에서 사용하는 맥주 재료를 기억하고 있었던 그는 고수 씨앗, 오렌지 껍질, 그리고 효모를 이용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호가든'의 원형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홈브루잉으로 만든 밀맥주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결국엔 버려진 레모네이드 공장을 매입하여 양조장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참고로 이 레모네이드 공장은 지금의 ‘호가든’이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시기에 피에르 셀리스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현재 셀리스 브루어리의 오너, 크리스틴 셀리스입니다. 크리스틴 셀리스는 당시 아버지의 양조장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합니다.
“어릴 때 항상 양조장에서 지내곤 했는데, 냄새가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자연스레 거기 가서 놀고 싶어질 정도로요.”
아버지는 크리스틴 셀리스에게 항상 맥주 맛을 보게끔 했고, 맛이 어떤지 물어보곤 했습니다. 자라면서 크리스틴은 자연스럽게 케그에 맥주를 담고, 라벨을 붙이는 등 양조장 일을 도왔고 세일즈와 수출 등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기억과 경험은 세대를 거쳐 크리스틴 셀리스의 딸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저 역시 제 딸 데이토나에게 맥주를 한 모금씩 맛보게 하고, 어떤 냄새와 맛이 나는지 물어보곤 했습니다.” 크리스틴 셀리스의 딸 데이토나는 현재 셀리스 브루어리의 양조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부활시킨 밀맥주로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이후 양조장의 우여곡절이 시작되었습니다. 1985년 화재 사고가 일어나 양조장의 절반이 불타고 만 것입니다. 이때 맥주 회사 AB 인베브(AB InBev)의 전신인 인터브루(Interbrew)가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맺는 조건으로 양조장을 재건하기를 제안했고, 피에르는 결국 인터브루의 도움을 받아 다시 양조장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트너십으로 점점 맥주의 레시피와 생산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습니다. 타협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양조장을 매각함으로써 자신이 세운 브루어리를 떠나보내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즐겨 마시는 '호가든'의 탄생 배경입니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도전
1989년에 은퇴한 피에르 셀리스는 딸과 함께 미국 남부 텍사스에 위치한 오스틴으로 거처를 옮겨 다시 한번 양조장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1992년, 오스틴에 셀리스 브루어리가 탄생했습니다. “오스틴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물입니다. 호가든 지역의 물과 완전히 같은 물이었거든요.”
최대한 예전 호가든에서 만들던 맥주 맛을 되살려야 했기 때문에, 완벽한 미네랄과 pH 등 효모가 활동하기 좋은 환경의 물을 찾던 중 만난 칼슘이 풍부한 오스틴의 물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는 벨지안 화이트를 만드는 브루어리가 거의 없었어요. 특히 오스틴이 있는 텍사스주에서는 맥주가 투명하지 않고 탁할 수 있다는 개념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맥주가 탁하면 어딘가 잘못됐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직접 맥주를 보여주며 교육하고, 대량 생산 방식의 라거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맥주도 있다는 것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 셀리스 브루어리에게는 호가든에서 시작된 특별하고 오래된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가 점차 미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셀리스 브루어리는 1995년에 이르러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양조장으로 선정되었고, 맥주 수요가 너무 많아서 주문하면 3개월이 지나서야 맥주를 받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잘못된 비즈니스 파트너, 그리고 재도약
1995년에 셀리스 브루어리는 밀러 브루잉 컴퍼니와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맺게 됩니다. 밀러가 브루어리를 확장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파트너십을 제안한 것이죠. 당시 밀러는 다른 크래프트 브루어리를 매입하여 잘 운영하고 있던 회사이기도 했습니다. 밀맥주 수요를 따라가기가 벅찼던 셀리스 브루어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밀러 측에서 맥주 레시피를 수정하고, 천연 재료 대신 인공향료를 사용하고, 맥주 만드는 기간을 단축하는 등의 요구를 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타협할 수 없었던 피에르 셀리스는 결국 2000년, 셀리스 브루어리를 밀러에게 매각했습니다.
그런데 밀러는 셀리스 브루어리를 매입하자마자 문을 닫은 뒤 상표와 양조 장비를 경매에 내놓았고, 미시간 브루잉 컴퍼니가 셀리스 브루어리를 매입한 뒤 파산했습니다.
피에르 셀리스는 2011년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가 남기고 간 유산을 살려야겠다는 운명과 책임감을 느꼈어요.”
크리스틴 셀리스는 피에르 셀리스의 유산을 이어가야겠다는 결심에 딸 데이토나에게 브루어리를 하자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남겨주신 셀리스 화이트의 레시피도 갖고 있었고, 호가든과 셀리스 브루어리에서 밀맥주 양조에 사용하던 효모 균주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틴 셀리스는 경매로 팔렸던 셀리스 브루어리의 상표를 다시 되찾게 되었고, 그렇게 가족의 기억과 이야기가 서려 있는 셀리스 브루어리를 되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벨기에 출신의 양조사들과 함께 2017년 6월부터 셀리스 브루어리의 밀맥주 ‘셀리스 화이트’는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벨기에 전통 밀맥주를 계승하여 만들어진 1965년의 바로 그 레시피가 결국 또 한 번 부활한 것입니다. “예전에 양조장에서 화재가 났을 때, 아버지가 그토록 강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처음 봤어요. 그 장면이 항상 마음속에 남아있었습니다. 결국 17년 만에 셀리스 밀맥주를 다시 일으키게 된 것이죠.”
셀리스 브루어리의 맥주
호가든의 본래 맛을 간직한 맥주 '셀리스 화이트(Celis White)'는 화사한 꽃 내음과 잔잔한 과일 풍미가 조화롭고 매력적인 맥주입니다. 밀, 귀리, 오렌지 껍질, 고수 씨 등이 재료로 들어가며 4.9 %의 낮은 알코올 수치를 지닙니다. 셀리스 브루어리의 로고에는 두 가지 그림이 있는데, 오른쪽은 호가든 지역의 전통을 의미하고, 왼쪽의 곰 그림은 절대 포기하지않는 강한 정신을 의미합니다.
셀리스 화이트에서는 효모가 중요하고 특별한 역할을 합니다. 벨기에 밀맥주 특유의 과일 및 에스테르 풍미가 상당 부분 효모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오직 2개의 브루어리만이 이 특별한 효모 균주를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호가든과 셀리스입니다.
셀리스 화이트는 이 효모의 캐릭터를 너무 부각하지 않고 은은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졌며, 마시기 편하다는 특징을 띱니다. 양조사 데이토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셀리스 화이트는 만들기 어려운 맥주에요. 효모가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발효 온도가 너무 따뜻하면 향이 너무 강해지고 너무 추우면 효모의 특성이 잘 발현되지 않거든요. 그렇기에 완벽한 온도 컨트롤이 필요합니다.”
‘셀리스 라즈베리’는 1994년에 처음 만들어진 맥주로, 최근 한국에서 인기를 누린 ‘호가든 로제’보다 훨씬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특징은 진짜 라즈베리 주스를 사용해서 추가적인 설탕이 첨가되지 않았고, 천연재료로만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단맛과 신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맛과 신맛의 밸런스가 좋아서 디저트나 샐러드와 먹기도 좋은 맥주입니다.
셀리스 브루어리는 벨기에식 밀맥주 말고도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만들지만, 현재 한국에 수입되고 있는 것은 셀리스 화이트와 셀리스 라즈베리 두 가지입니다. 피에르 셀리스는 두 가지를 반반씩 섞어 즐겨 마시곤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살던 지역의 맥주를 부활시키고자 쏟은 열정, 그리고 수많은 시련에도 본연의 맛을 지키고자 놓지 않은 고집은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일으킵니다. 뛰어난 맛으로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선사한 맥주 셀리스 화이트는 이제 우리에게 단순히 맥주가 아닌 두고두고 간직해야 할 이야기로 계속될 것입니다.
EDITOR_홍희주